이드 – 123화
‘뭘 생각해?’
[일리나의 구혼이요. 이드님 일리나가 싫지는 않죠?]
이드는 라미아의 물음에 옆에서 세레니아와 함께 말을 몰고 있는 일리나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이어진 라미아의 목소리에 말갈기에 고개를 묻어 버렸다.
‘응, 싫어 할만한 이유는 없지. 마음씨 곱지. 엘프답게 예쁘지. 저런 신부감 구하기 어려워. 게다가 일리나 쪽에서 먼저 날 평생 함께 할 짝으로 선택했잖아.’
[흑… 흑…. 우앙…. 나만 사랑해줄 줄 알았던 이드님이 일리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니… 흑흑… 이드님, 저에 대한 사랑이 식으 신거예요? 아니죠?
아니라고 말해주어요.]
‘끙…. 라미아~~~~ 후…. 아니야. 넌 나와 영혼이 이어진 검이 잖냐. 그런 내가 너에 대한 사…. 랑이 식을 리가 없잖아.’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는 말이긴 했으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유치해서인지 부끄러워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 말에 라미아가 다시 밣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첫 번째고 저기 일리나가 두 번째 라는 거 명심하고 일리나에게 승낙 못하는 이유를 말해 보세요. 아까 마음속으로 소리치는 걸 얼핏 들으니까 수명 문제도 있는 것 같던데… 다른건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끙하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고민되는 건 그 수명문제 뿐이야. 혹시라도 내가 무학의 끝에 다달아 신선(神仙)이라도 된다면 몰라도, 하여간 다른 건 별로 생각나는 것도 없고 걸릴만한 것도 없어. 누님들 한테 먼저 소개시키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제하고…’
[그럼 수명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는 거죠.]
‘그렇지.’
[그럼 해결 됐어요. 걱정 마시고 일리나한테 가서 결혼한다고 말씀하세요.]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뭐가 해결돼….’
[에효…. 이건 저번에 말씀 드리려던 거였는데. 이드님 수명이 얼마 정도 된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원경에 달해 있고 이미 탈퇴환골(脫退換骨)도 거쳤으니 아마 앞으로 삼 백년 인가? 아, 아니다. 드래곤 하트가 있으니까. 한 오백년 될 려나? 하여튼 인간으로서는 엄청 길겠지만 앞으로 칠, 팔 백년을 더 살 일리나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
[역시…. 이드님, 이드님이 아시고 계시는 건 어디까지나 저번 세계에 있을 때 그래이드론님고 만나지 않았을 때의 경우예요. 하지만 이곳에 와서 그래이드론님의 모든 것을 전해 받아 달라진 이드님의 수명은…. 아마 엘프들 보다는 몇 배나 오래 살 정도일 거예요.]
“뭐, 뭐야!!”
라미아의 말에 놀란 이드는 마음속으로 말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덕분에 주위 일행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아 버린 이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 주고는 라미아에게 급히 되물었다.
‘뭐야, 엘프의 수명이 천년이라고 했으니까. 그 몇 배라면, 내가 몇 천년을 살 거란 말이야?’
[네… 다른 일로 죽지 않는 한은요. 아마 그래이드론님의 정보들 중에 들어 있을 거예요. 그래이드론님이 이드님께 모든 것을 넘기실 때 그 육체도 넘기셨죠. 덕분에 이드님의 몸에 고룡의 육체가 융합되어서 재구성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드래곤 하트처럼 완전히 이드님의 육체에 녹아들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거예요.
그리고 재구성된다고 해서 이드님의 몸이 아닌 다른 몸이 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하시구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듣는 중 라미아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래이드론의 정보들중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라미아가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이드는 잠시 멍해져 버렸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길어도 삼 백년이라 생각한 수명이 갑자기 몇 천년으로 늘어 나 버렸으니… 하지만 이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의 정신을 찾았다. 평소 그의 생각대로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오래 산다는게 나쁜 것도 아니기에 좋은게 좋다는 생각으로 수명에 대한 고민을 저~ 멀리 치워 버린 것이다. 그럼 이제 수명에 대한 문제 해결되었으니…
[일리나에게 결혼 승낙을 하셔야죠. 수명에 대한 문제도 해결됐으니까요. 그리고 한 시라도 빨리 말해야 수도에서 먼 곳에 두고 갈수 있다구요. 아니면, 세레니아님에게 부탁해서 아예 라일론이나 아나크렌으로 보내 버릴수도 있구요.]
하지만 라미아의 말을 듣는 이드의 기분은 조금 묘했다. 방금 전까지는 수명 문제만 해결되면 당장이라도 결혼 승낙하고 문제가 해결 될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막상 수명문제가 해결되자 결혼 승낙한다는 말이 쉽게 나올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빨리 떼어 놓긴 해야 겠기에 라미아의 말에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알았어. 그런데… 라미아, 혹시 그래이드론의 레어에서 가지고 온 것 중에 반지나 목걸이 같은게 있어?’
[음… 모르겠어요. 그때 레어에서 나오실때 이드님이 보석 챙기셨잖아요. 그런데 그건 왜요. 혹시 일리나 주시려는 거예요?]
라미아의 말에 자신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어른주머만한 주머니를 뒤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갑자기 하는 거지만. 예물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잖아. 반지같은 건 가지고 나오지 않은건가?’
무심코 그렇게 대답하던 이드는 갑자기 조용해진 라미아의 목소리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금새 앵토라진 목소리를 내는 라미아였다.
[흥, 저한테는 그런 선물 해주지도 않으셨으면서… 쳇, 쳇….]
‘진정해, 진정해 라미아. 너한테는 선물해도 걸칠때가 없어서, 선물하지 않았지. 대신 매일매일 깨끗한 천으로 딱아 주잖아. 응? 있다. 라미아 이건 어때? 귀할 것 같아 보이는데, 거기다 일리나의 손가락 크기와도 맞을 것 같아.’
라미아를 달래던 이드는 그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주머니에서 꺼낸것은 은청색의 투명한 반지였다. 그 반지는 다른 보석이 달려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반지 자체가 보석이었고 그 반지위로 유연한 세공이 가해져 보통의 반지들 보다 오히려 특별해 보였다.
[그건, 블루 사파이어로 만든 건데 엄청 비싼 거예요. 원래 사파이어는 그런 식으로 가공해 놓으면 잘 깨지는데, 드워프가 그 위에 특이한 세공을 해서 잘 깨지지 않게 특별히 가공해서 만든거예요. 휘귀한 거라구요.]
‘그래, 좋았어. 이걸로 하자.’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나와 반지를 번가라 보던 이드는 다시 자신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처럼 말이 쉽게 나올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드는 그런 자신의 상태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바로 마음을 다잡은 이드는 손에 들고 있던 반지를 아무 손가락에 맞는 곳에 끼우고 저녁때를 기다렸다. 아무리 빨리 하는게 좋다지만 말을 타고 가면서 결혼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그런 생각과 함께 말을 달리던 이드는 왠지 시간이 보통 때 보다 배는 빨리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수록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 놓은 반지의 감각이 점점 더 선명하게 손끝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태양이 선홍빛을 발할 때, 이드가 일리나에게 결혼 신청하는 것이 코앞에 다가온 신간.
일행들은 영지가 아닌 작은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작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라 그런지 마을중앙에 여관도 두개가 들어서 있었으며 몇몇 곳의 주점 역시 눈에 뛰었다.
일행은 두개의 여관 중 좀더 깨끗하고 조용한 ‘메르헨의 집’ 이라는 여관으로 찾아 들어갔다. 깨끗하고 조용한 만큼 여관비가 좀 더 비쌌지만 한 나라공작에 한 나라의 여황의 할아버지 되는 인물들이 그것에 신경 쓸리가 없다. 1골덴으로 간단하게 방을 잡아 버린 일행들은 종업원에게 각자의 짐을 방으로 옮겨 달라고 말하고는 여기저기 많이 비어 있는 자리 중 하나를 골라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해야하는 일에 대한 생각덕분에 이드는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들의 맛은 물론 지금현재 배가 부른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어떻게 먹었는 지도 모르게 식사를 끝마치고 1골덴을 받은 주인의 서비스로 각자 앞에 차와 도수가 약한 술 한 작씩이 놓여 있는 것을 본 이드는 나직히 심호흡을 했다.
이어 뭔가 말하려고 하던 이드는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못하고, 하려다가 못하고… 그렇게 이드가 몇 번이나 말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자 우연히 그 모습을 본 세레니아가 뭔가 알겠다는 듯이 이드를 향해 귀엽게 생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드의 입장에서는 전혀 귀여워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오히려 뭔가 불안함이 밀려오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재대로 맞아 떨어 졌다는 듯 세레니아가 이드옆에 앉아 있는 일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일리나, 이드가 할 말이 있다는데.”
“네… 에? 무슨……. 아!”
세레니아의 말에 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일리나도 이드의 흠칫하는 모습과 세레니아의 말에서 뭔가를 눈치챈 듯 하얀 뺨을 붉게 물들였다. 이드가 엘프들이 짝을 짓는 방법을 알았다면, 이렇게 무언가 마을 하려고 한다면. 그 내용은 하나 뿐이다. 결혼승낙…….. 만약 거절이었다면 아무런 말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일리나는 그렇게 생각하자 저절로 이드의 손가락에 간신히 걸려있는 은청색의 투명한 반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순간 이드와 일리나를 중심으로 이상한 분위기가 흘렀고, 주위에 있던 크레비츠와 바하잔등의 나머지 다섯명 역시 눈치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드와 일리나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그리고 쭈뻣 거리고 있는 이드의 모습과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서 흔들리는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는 일리나의 모습에 무언가를 짐작한 다섯 사람은 좋은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드는 그런 사람들의 눈길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번인가 머뭇거리던 이드는 일리나가 자신을 바라보자 잠시 일리나를 바라보다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들을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리나… 저기… 그러니까. 흠, 저도 일리나와 같은 마음입니다.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동안 당신의 짝으로써 살아갈 것입니다. 하하… 멋진 말을 생각해 놨는데 전혀 떠오르지 않네요. 승낙해 주시겠습니까.”
좀 전 까지 일리나에게 할 말들을 생각해 두었던 이드였지만, 막상 말을 하려니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가물거리는 느낌에 떠듬거리다 그런 자신을 보고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일리나의 모습에 왠지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끼며 편하게 보통 때의 자신처럼 말을 이었다.
“네, 고마워요.”
일리나는 승낙의 말과 함께 이드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드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환한 미소와 함께 축하의 말을 던졌다.
“하하하하….. 이거 축하하네….”
“젊은 놈이 그렇게 떠듬거려서야… 안 봐도 뻔하다. 잡혀 살겠구만….”
“쯧, 하즈녀석 신랑감으로 찍었었는데, 한발 늦었구만. 하여간 미인을 얻은걸 축하하네.”
“이드, 그거 일리나에게 줘야 하는거 아니예요?”
이드는 주위의 축하 말들에 얼굴을 붉히다가 세레니아의 말에 자신의 손에서 주인을 찾지 못하고 아직 남아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 처음 말과 함께 건넨다는 것이 긴장해서 깜빡해 버린 것이다. 자신의 실수에 머리를 긁적인 이드는 조심스럽게 앞에 있는 일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드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일리나는 오른손을 내밀었고 이드는 그녀의 손가락에 은청색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짝짝짝짝짝…………. 휘익…..
크레비츠등의 말에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던 여관 식당 안의 사람들이 이드가 일리나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모습을 보고는 무슨 일인지 짐작하고 일제히 박수를 쳐준 것이었다. 그 중에는 상대가 엘프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거나 부러워하는 사람도 몇몇이 있었다. 여관의 주인도 축하한다면서 아까의 약한 술과는 달리 어느 정도 독하면서도 달콤한 지펠이란 이름의 고급술을 한 병 꺼내 주었다. 하지만 내일일찍 출발해야할 일행이었기에 가볍게 한 두 잔 씩-사실 술이 한 병이었기에 여덟 명에게 한, 두 잔씩 돌아가지 않았다.-을 건네고 윗 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윗 층으로 올라가자 어느새 방을 하나 더 얻었는지 이드와 일리나를 밤새 이야기라도 나누라면서 한방에 넣어 버리는 것이었다. 사실 크레비츠들도 둘 다 비슷한 나이였다면 그냥 약혼정도로 알고 따로 두었겠지만 이드의 상대는 자신들 보다 나이가 많을 지도 모를 엘프였기에 서로 결혼할 사이니 정말 이야기나 나누어라는 생각에서 같이 넣어 버린 것이었다.
그날 밤 이드와 일리나는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이드는 다음날도 결혼까지 서두르며 떨어트려 놓으려던 일리나를 떨어트려 놓지 못하고 같이 말을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예전보다 살갑고 부드럽게 자신을 대하는 일리나의 모습에 가끔씩 라미아의 틱틱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반면 자신의 짝이 위험한 곳에 가는데 마냥 보고 있을 수 만은 없다며 따라오는 일리나의 모습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휴~ 어쩔 수 없다. 발라파루에 가까워지면 수혈(睡穴)을 집어서 세레니아의 레어에라도 보내놔야지.’
[우씨, 그럼 서둘러서 일리나의 청혼을 승낙한게 헛일이잖아요.]
이드와 라미아는 무언가 속은 듯한 감정에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생각으로 말을 달린 이드는 여관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간단히 점심을 끝내고 한시간 쯤을 더 달려 멀리 거대한 산맥군이 보이는 평야에 다다른 일행들은 그 거대한 산맥 앞에 만들어져 있는 흐릿한 성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거리는 멀어 지금부터 말을 달린다 하더라도 저녁때는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나절 정도의 거리겠어. 시간상으로 대충 해가 질 때쯤 도착할 것 같은데… 그리고 이드의 말대로 라면 침입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귀국의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 침입을 시도 해봐야 할텐데… 밤에 움직이는게 좋겠는가?”
크레비츠가 그렇게 물으며 그의 옆과 뒤쪽에 서있는 일행들, 그 중에서 바하잔과 차레브를 바라보았고,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가 의논을 하는 듯 하던 바하잔이 크레비츠를 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쉬었다가, 자정에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럼 수도의 외곽 부분에 새벽에 도착할 수 있을 텐데. 그때쯤이면 어떤 경비병도 긴장과 경계가 풀어지지요. 그리고 이드의 말처럼 그런 대단한 결계라서 발각되어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전투 인원이 3명이나 많은 저희들에게는 밝은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새벽이라면 얼마의 시간만 흐르면 환하게 밝아오니 그 시간을 기다리시지요.”
크레비츠는 바하잔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자네들이 다른 의견이 없으면 바하잔의 말대로 하지. 그럼 모두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지. 자고 싶은 사람은 잠시 자두는 것도 괜찮을 거야.”
이드는 크레비츠의 말에 따라 모두가 말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말에서 내리기 위해 박차에서 한발을 뺐을 때였다. 전방으로부터 몇 번씩이나 느껴본 마나의 흔들림을 느낀 것이다.
이드는 그 느낌에 말에서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하며 일행들을 향해 소리쳤고, 그 뒤를 이어 이드와 함께 같은 것을 느낀 세레니아의 목소리가 이어져 여유 있어 하던 일행들을 초긴장시켜 버렸다.
“모두 준비해요. 아무래도 여기서 쉴 일도, 저기 수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거든요.”
“긴장해 주세요. 혼돈의 파편입니다. 주위의 공간이 흔들리고 있어요. 그리고… 마나 반응으로 봐서 한 명이 아니예요.”
스릉…. 창, 챙…. 슈르르르…..
히이이이잉……. 푸르르르….. 푸르르르…..
두 사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기 중으로 맑은 쇳소리와 마치 안개가 흐르는 듯한 기성이 일었다.
그리고 말들도 순식간에 변해버린 주위의 분위기와 하루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주인인 자들이 갑작스레 뽑아든 검에 겁을 먹고 거칠게 투레질을 해댔다.
말들의 모습에 일리나가 흥분하고 있는 자신의 말에게 다가가 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뭐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말이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를 그 말의 울음소리를 들은 말들이 뒤따랐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일리나 옆으로 다가섰다. 그런 이드의 손에는 어느새 라미아라 그 붉은 아름다운 검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왜 남았어요. 말들하고 같이 도망 갔어야죠.”
“후훗, 이드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저 혼자 다른 곳으로 피하겠어요…. 왔어요.”
이드의 추궁 비슷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일리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이 왜 가지 않았는지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이드 자신이 일리나를 안전한 곳에 두기 위해 서둘렀던 결혼 승낙이 그녀가 위험한 곳에 서있는 이유라니.
그리고 뒤에 이어진 일리나의 말과 함께 우우웅 하는 기성이 일며 이드들의 앞과 옆, 그리고 허공 중의 공간이 흔들렸다.
이드는 그 모습에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생각에 옆에 세레니아를 불렀다.
“세레니아, 일리나를 라일론이나 아나크렌으로 텔레포트 시킬 수 있어요?”
평소의 그녀라면 가능했을 일이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가능은 하지만, 지금은 저들이 공간을 열고 있기 때문에 잘못했다간 어디로 떨어질지 몰라요. 하려면 저들, 혼돈의 파편들이 완전히 모습을 보인 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늦을 것 같은데….. 맞다. 시르드란!!”
다른 방법을 생각하던 이드는 뭔가 생각 났다는 듯이 허공에 대고 바람의 정령왕, 시르드란의 이름을 불렀다.
아나크렌에서 라일론으로 갑자기 텔레포트 되면서 몸이 좋지 않아 시르드란을 소환하지 않았었고, 몸이 나아지고도 시르드란의 존재를 잊어먹고 있다가 이제서야 소환하는 것이다.
그런 이드의 말에 따라 허공 중에 어린 소녀의 모습인 노드의 모습을 한 시르드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 나타난 그녀는 곧 자신을 소환한 소환자를 보고는 반갑다는 듯 방긋 웃다가 주위에 느껴지는 기운을 눈치챘는지 금방 그 미소를 지워버렸다.
[오랜만에 날 부르는구나. 그런데 왠지 기분 나쁜 기운이네. 이번에 싸워야 할 적이니? 꼬마 계약자.]
“그렇긴 하죠. 하지만 시르드란이 해줄 일은 따로 있어요. 저들이 나타나기 전에 여기 일리나를 이곳에서 멀리 데려다 줘요. 그런 다음 노드를 불러서 호위를 시키고 돌아가세요. 노드가 위험신호를 보내면 도와줘요. 시르드란이 이곳에 있으면 제 마나가 많이 소모되거든요.”
[간단한 일이네. 그 정도야 간단하지. 하지만 저들이 싸워야 할 적이라면… 조심해라, 꼬마 계약자.]
이드는 시르드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요, 일리나. 하지만 이곳에 있으면 위험해요. 그리고 내가 신경이 쓰이거든요.
그러니까 잠시 피해 있어요.”
일리나는 이드의 얼굴에 떠오른 곤란한 안색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 덕분에 옆에 있던 클린튼이 말했다.
“이런 상황에….. 그래, 좋은 때다.”
“알았어요. 하지만 조심해요. 그리고 이드가 결혼 승낙을 한 이상, 이드가 살아만 있다면 저는 영원히 기다릴 거예요. 그게 엘프거든요. 알았죠.”
이드는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꼬옥 말아 쥐며 말하는 일리나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시르드란이 일리나를 안아 들어 허공에 뛰었고, 이내 쐐애애액 거리는 공기가 찧어지는 소리와 함께 일리나의 모습은 순식간에 엄청난 거리로 멀어졌다.
그리고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흔들리는 공간 사이로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이드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고, 하나는 이드도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허리에 걸려 있는 세 자루의 검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드는 이번에 라일론에 반란군과 함께 들어왔던 페르세르라는 혼돈의 파편인가 했지만, 그의 허리에 걸린 세 자루의 검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다.
이드가 듣기로는 페르세르의 허리에는 네 자루의 검이 걸려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의아함에 크레비츠와 바하잔을 바라본 이드는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전투의 흥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크레비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세르라는 존재가 맞다.
“저 자가 가지고 있던 네 자루의 검 중 하나는 수도의 삼 분의 일을 날려 버릴 때 크레비츠님의 검과 함께 사라졌네. 아마도 거대한 폭발에 어디론가 날려갔거나 소멸했을 거야.”
다시 세 명의 혼돈의 파편을 바라보는 이드의 눈에 메르시오의 미소짓는 모습이 보였다.
한쪽 눈은 여전히 빛을 잃고 있었지만, 이드에 의해 잘려졌던 오른쪽 팔은 멀쩡한 모습으로 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군. 십여 일 정도는 더 있다가 올 줄 알았는데.”
이드는 그런 메르시오의 모습에 마주 미소지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페르세르와 자신을 보며 반갑다는 듯이 방긋방긋 거리는 아시렌을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 좀 빠르거든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네 명이 남아있다고 들었는데, 세 명뿐이네요. 성안에 아직 한 명이 남아 있나 보죠?”
이드의 말에 메르시오는 슬쩍 미소지었다.
“훗, 아니다. 원래 그 녀석의 행동이 좀 느리거든. 이제 곧 올 거다.”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성에서 이곳까지 마중 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저번엔 성문을 꼭꼭 잠가 놨던데…”
“약속 때문이지. 그 때문에 저번에 자네가 왔을 때도 문을 열어 주지 못했던 거고 말이야…”
이드는 메르시오의 말에 두 눈을 빛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들이 힘도 완전히 찾지 못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도 저 약속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약속이라… 혹시 그 약속이라는 것에 게르만이라는 마법사가….. 흡!!! 일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