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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25화


멍하니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던 이드는 순간 뻗어 오르는 짜증과 답답함에 왼쪽 팔목, 정확히는 그 팔목을 휘감고 있는 팔찌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팔찌가 대답해줄 리는 만무할 것.

이드는 순간의 짜증에 방금 전까지 왼손으로 집고 서 있던 동굴의 입구 부분을 향해 팔을 휘둘러 팔찌를 부딪혔다.

하지만 순간적인 흥분은 절대 좋지 못한 것.

이드는 팔찌가 부딪히며 나야 할 쨍 하는 소리가 아니라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팔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무언가를 공격하는 것도 그렇다고 방어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내력을 운용하지 않아 더욱 아팠다.

“크… 읍. 윽… 이번엔 또 뭐야!!”

아픈 부분을 문지르며 내력을 운용해 통증을 가라앉힌 이드는 왼손 손목을 눈앞에 들이대며 자신이 고통을 느껴야 했던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팔찌가 이상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전엔 엄청나게 얇고 은색의 바탕에 이해하기 힘든 몇몇 무늬가 새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얇다는 것은 같은데, 은색이 아니라 정확하게 세 등분으로 나뉘어 한 부분은 칠흑같이 검은색이고 또 다른 한 부분은 그와 정반대의 투명하리만큼 하얀 흰색이었다.

마지막 한 부분은… 특이하게 아무런 색도 없이 팔찌 안쪽 이드의 팔목이 보일 정도로 투명했고, 바탕을 장식하던 무늬마저 완전히 사라져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처럼 매끈했다.

갑작스레 변해 버린 팔찌의 모습에 아무 생각 없이 팔찌를 만지던 이드는 자신이 왜 그렇게 아파야 했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는데, 진짜 팔 주위로 종이를 붙여둔 것처럼 팔찌 건너의 살결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하, 하…….”

이드는 팔찌의 갑작스런 변화에 즐겁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 허탈한 웃음을 더했다.

팔찌가 변했다는 것은 이드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던 세 가지 조건 중 두 가지가 충족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니 좋았다.

하지만……

“왜 또 이런 엉뚱한 곳…..”

쿠콰콰쾅……….

팔찌의 변화에 아까 전보다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이드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들려오는 강렬한 폭음과 확 하고 밀려오는 열기에 팔찌의 변화에 까맣게 잊고 있던 두 존재의 싸움 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이드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두 날개를 축 늘어뜨린 채 떨어져 내리는 와이번의 모습이었다.

그 와이번의 등의 한 부분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그 검게 변해 버린 자리의 중앙에는 와이번을 눕혀놓고 그 부분에다 거대한 바위를 찍어 누른 듯이 푹 꺼져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와이번 몸속의 뼈가 작살이 났을 것이다.

마치 마법을 사용한 듯한 그 모습에 급히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드의 시선에 거의 직각으로 솟아오르는 회색의 괴상한 녀석이 보였다.

그 녀석은 곧 와이번이 떨어진 상공에서 와이번의 죽음을 확인하듯 한 번 선회한 후 한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쭉 지켜보던 이드의 눈이 한순간 반짝하고 빛났다.

갑작스런 폭음에 어떻게 한 것일까 하는 생각에서 자세히 놈을 살펴보던 이드의 눈에 녀석의 날개에 달려 있었던 기다랗고 굵은 막대기 같은 게 사라진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 화이어 스피어나, 화이어 애로우 같은 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모습에 자신이 들었던 폭음과 열기를 가지고 머리를 굴리는 이드였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기척과 함께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으… 음…”

“….. 정신을 차리는 모양이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방금 전까지 자신과 소녀가 누워 있던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과연 정신을 차리려는지 은발 머리의 소녀가 몸부림 비슷하게 움직이며 옆으로 누워있던 몸을 트는 모습이 보였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소녀를 깨우기 위해 몸을 숙였다.

하지만 잠꼬대와 비슷하게 말을 내뱉는 소녀의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하다 못해 몸서리쳐질 이름에 소녀를 향해 뻗어 내던 손과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우웅…. 이드… 님…”

“……..”

“…….”

“하, 하… 설마…..”

이드는 소녀의 목소리와 말에 소녀와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이 “이드님” 하고 부르는 한 존재를 생각해 내고 굳어 있던 얼굴 부분만 간신히 움직여 부정했다.

그러자 곧 다시 확인해 보라는 듯한 소녀의 잠꼬대가 들려왔다.

“헤…. 이드니임….”

이드는 그 목소리에 웃던 얼굴을 그대로 굳혀 버리고 소녀를 향해 뻗어 있던 손을 번개같이 돌려 자신의 왼쪽 허리,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에게 쫑알거리고 애교를 떨어대며 저 소녀와 같은 목소리로

“이드님”

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걸려 있는 허리를 만져갔다.

하지만 곧 만져져야 할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느낌에 허리를 맴돌던 손을 그대로 굳힌 채 고개를 돌려 허리를 바라보고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라… 미아….”

이드의 입에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허리에 걸려있어야 할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시선은 누워있는 소녀에게 향해 있었고 머리는 처음 라미아를 만났을 때, 라미아와 영원을 함께 하겠다고 말하고 난 후 아스라이 보았던 모습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앞에 누워있는 소녀와 겹쳐지는 순간, 어째서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미 답이 나온 상황이었지만, 확답을 가지고 싶은 이드는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잠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는 라미아를 깨웠다.

그러면서 방금 전의 폭음에도 깨지 않았는데, 쉽게 깨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생각 이상으로 쉽게 일어났다.

“저, 저기… 이봐요. 라…. 미아… 라미아!”

“우웅…. 넴…. 이드님…. 후아암….”

자신의 목소리에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소녀의 모습에 이드는 그 소녀가 라미아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 사실이 확인되자 이드는 다시 한 번 왼팔에 차여져 있는 팔찌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여기저기로 날려 보내더니 이제는 결국 검인 라미아를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팔찌를 바라보던 이드의 눈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던 라미아의 행동이 한순간 굳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천천히 눈을 비비던 손을 눈에서 떼어내 손을 바라보더니, 어느새 놀라 동그랗게 떠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또 자신이 앉아 있는 땅을 두드려 보고, 다시 이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드는 그 모습에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중원에서 갑자기 그레센 대륙으로 날아가고 그래이드론을 만나 얼마나 당황했던가.

“라미아, 갑작스런 상황이라….”

라미아가 매우 당황스러워할 거라는 생각에서 말을 건네던 이드였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라미아의 모습에 이드는 중간에 말을 잘라야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라미아의 말에 라미아를 걱정했던 것이 아깝게 느껴지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거기에 더해 라미아가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에 대한 당황과 흥분도 완전히 싹 날아가 버렸다.

“호호홋…. 이드님, 보세요. 제가 사람이 됐어요. 아~~ 신께서 저의 이드님에 대한 사랑에 감동하셔서 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나 봐요. 이드님….”

이드는 그 말과 함께 자신에게 담뿍 안겨와서는 다시 자신의 손과 몸을 내려다보는 라미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라.미.아….”

“알아요. 알아. 근데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이드는 여전히 자신에게 안겨 떨어질 생각은 않고 물어오는 라미아의 모습에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라미아가 안겨 있는 팔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며 소매를 걷어 모습이 변해 버린 팔찌를 내보였다.

“아마, 이 녀석 때문인 것 같아.”

“… 하지만 저번엔 그냥 다른 나라로 텔레포트되었을 뿐이었잖아요. 그런데… 참, 여긴 어디예요?”

라미아 역시 이미 이드로부터 팔찌에 대해 들었었기에 이드의 말을 금방 이해하고 되물었다.

자신의 문제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드는 라미아의 물음에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에효~~ 네 문제인데 좀 심각해져 봐라.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는…. 나도 몰라.”

“호호홋…. 이드님도 영원을 함께할 사랑하는 존재가 검보다는 이런 모습이 좋잖아요. 그리고 해결될 문제라면 고민하지 않아도 해결될 거라고 이드님이 그러셨었잖아요. 자, 그만하고 빨리 근처 마을로 내려가서 여기가 어딘지 알아봐요. 빨리 돌아가야죠.”

“휴~ 라미아…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른다니까.”

이드는 라미아의 사랑 어쩌고 하는 말은 이틀에 한 번, 많으면 하루에 한두 번 꼭꼭 듣던 말이기에 그냥 넘겨 버리고 자신의 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 주었다.

“그러니까. 나가서 물어보자고요.”

“하아~~ 라미아, 내 말은 이곳이 그레센 대륙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 네?”

“라미아, 네가 일어나기 전에 봤었던 건데… 와이번과 처음 보는….. 뭔가가 싸웠었어. 그런데 그게… 처음 보는 녀석이란 말이야. 아니, 생물이 맞는지도 모르겠어. 너도 알겠지만, 그래이드론의 정보에 그레센 대륙의 몬스터에 관한 건 다 들어 있다는 거. 하지만 내가 본 것에 대해서는 그래이드론의 정보 어디에도 없더란 말이야.”

이드의 설명에 그제서야 라미아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드처럼 당황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라미아로서는 주인인 이드의 곁이라면 어디에 있든 다 똑같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모르겠다. 또 다른 곳으로 날아온 건지. 아님 그레센 대륙의 끝에 있는 암흑의 경계를 넘어오기라도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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