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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26화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뭐, 그것은 뒤에 따질 문제이고 우선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한 이드와 이제는 사람으로 변한 검, 라미아는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의논하여 몇 가지 문제에 대해 대략의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첫째로 라미아의 변신. 이미 아나크렌에서 반지로 인해 이동했었고 또 그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것 때문에 반지의 영향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대신 이드와 라미아 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의견이 이곳이 다른 곳, 즉 이세계이기 때문에 원래 있던 곳에서 영혼까지 가지고 있던 라미아에게 어떤 영향을 주어 인간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견을 내놓아도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예측일 뿐이었다.

둘째는 앞으로의 문제였다.

이것을 생각하며 이곳이 이세계라는 것을 확인했다. 라미아의 의견으로 이드와 계약을 맺었던 정령들을 소환해 봤던 것이다. 이곳이 그레센 대륙이 있는 곳이라면 정령들이 답할 것이기에, 하지만 이드의 부름에 대답한 정령은 물, 불, 바람 등등 해서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정령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드가 계약을 맺었던 정령들이 없다는 것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빨리 움직여 이곳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중원이나 그레센 대륙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없는 지금 이곳에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아마도 언어 문제일 것이다.

우선은 말이 통해야 무슨 음식물을 사 먹어도 먹을 것이기에 말이다.

게다가 아까 전 와이번과 싸우던 ‘그것’을 보아서는 이곳도 중원에 있던 이드가 그레센 대륙에 와서 느낀 황당함 이상의 황당함을 건네 줄 것 같으니까.

뭐, 인간으로 변해버린 라미아가 있어서 조금 나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셋째로 중원이나 그레센 대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막대한 양의 순수한 음과 양의 기운을 찾아야 한다는 것.

잘못하면 또 전혀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는 방법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단 세 존재를 제외하고는 신도 불가능한 일인데 다른 방법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요 에너지 낭비다.

그리고 이드가 잠시의 운공을 확인한 것인데, 음양의 기운을 흡수하고 이곳으로 넘어올 때의 충격에 맞서 버티다가 라미아가 사람으로 변하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덕분에 저번 메르시오와의 전투 때와 비슷하게 하단전을 중심으로 한 기혈들이 막혀버린 것이다.

뭐, 이동이 거의 끝나갈 때 정신을 잃은 덕(?)인지 본신진기의 6할은 사용이 가능했다.

저번처럼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이드는 다음 번을 기약하며 정신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이것저것을 확인한 한 사람과 이제 사람이 된 검은 이곳을 벗어나 가까운 마을을 찾기로 했다. 언제까지 이곳 있을 수는 없는 것이잖은가.

결론을 내린 이드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바로 내려가자. 좀 더 머뭇거리다간 여기서 하루 더 자야 할지도 모르니까.”

“네, 저도 인간으로 변했는데, 폭신한 침대에서 이드님과 같이…. 꺄악….”

이드의 말에 방긋거리며 발딱 일어선 라미아였지만 인간으로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몇 발작 움직이지 못하고 중심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넘어지기 전에 이드가 잡아주어 땅에 뒹구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두 번의 시도에도 몇 걸음 옮겨보지 못하고 이드의 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상태라면 아마 하루 이틀 정도는 연습을 해야 정상적으로 걷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후~ 안되겠다. 라미아, 아직 걷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까. 마을을 찾아 쉴 곳을 찾기 전까지는 내가 업어야 되겠어. 업혀.”

“헤헷… 죄송해요. 하지만 이드님이 업어 주니까 기분은 좋은데요.”

“무슨 말이야? 얼마 전까지 내 허리에 항상 매달려 있었으면서…”

“헤헷… 그때는 이렇게 허리에 매달린 거잖아요. 거기다 허리에 매달려 있을 때와 달라서 편안하고 따뜻하다구요.”

라미아를 업은 이드는 별 힘들이지 않고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밖을 나서자 여름이 끝나가는 그레센 대륙과는 달리 한여름인지 강렬한 햇살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후아… 저번에 봤던 카논보다 경치가 더 좋은 것 같은데요.”

“그렇지. 내가 있던 중원의 산들도 이랬는데…”

자신의 등에 업혀 경치를 구경하던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중원의 산들과 비슷한 모습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드는 곧 산을 내려가기 위해 풍운보(風雲步)를 밝아가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파른 곳, 갑자기 나무가 튀어나오는 곳, 미끄러운 곳도 있었지만 풍운보에 의해 보법을 옮기고 있는 이드나 그런 이드의 등에 업혀 편하게 가고 있는 라미아로서는 평지를 가는 듯할 뿐이었다.

유유자적한 여유 있는 걸음으로 산을 반정도 내려오던 이드가 갑자기 멈추어섰다.

라미아가 갑자기 멈추어선 이드를 향해 물었다.

“이드님 무슨 일이예요? 갑자기 멈추어 서게.”

라미아의 말에 이드의 얼굴이 조금 어색한 웃음을 띄었다.

“하, 하, 그게 말이야. 이제 생각난 건데…”

“뭐가요?”

“…. 인가가 어느 쪽에 있지?”

이드는 그 말을 내뱉고 나서 라미아의 몸도 살짝 굳어지는 것을 손과 등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이어 포옥하는 라미아의 한숨이 이드의 목덜미를 살짝 간질렀다.

“… 저도 생각 못했어요. 이드님의 마나 조금 끌어쓸게요.”

“으응… 아, 아니. 잠깐, 잠깐만….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

마법으로 주위를 살피려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무슨 소리를 들은 듯 자신의 마나를 사용하려는 라미아를 제지했다.

이드의 목소리에 라미아도 마법을 시전하려던 것을 멈추고 이드가 말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이드처럼 내공을 싸은 것도 아니기에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서 라미아는 지금도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드의 영혼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라미아의 마음속으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부아아앙 거리는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소리가 멈추고 이어 들려오는 것은…

“이드님, 저거 사람 소리 아니예요? 한번도 들어보진 못한 언어이긴 하지만…. 이드님? 왜 그래요?”

이드의 영혼을 통해 사람의 말소리를 들은 라미아는 이드의 얼굴이 요상하게 변하는 걸 보고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이드는 라미아의 목소리에 조금 들뜬 기분으로 여전히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라미아…. 저 언어 내가 알고 있는 거야.”

순간 이드의 말을 들은 라미아의 눈이 서서히 커지더니 그 황금빛 눈동자의 광채를 더했다.

“저, 정말이요? 하지만 분명히 아까는 전혀 모르는 곳이라고 하셨잖아요.”

“맞아, 그랬지. 하지만 이건 분명히 내가 아는 언어야. 중간 중간에 이상한 말도 섞여있고 그레센 대륙의 말투 비슷하게 바뀐 것 같긴 하지만, 분명히 궁황(弓皇) 사부에게서 배운 동이족(東夷族)의 언어가 확실해. 내 기억 중에서 동이족의 언어를 찾아봐. 가능하지?”

이드의 말에 정말 그런지, 또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하던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영혼을 함께 하는 사이인데…. 그럼, 마음을 편안하게 열어 주세요.”

이드는 라미아가 그렇게 말하고 살포시 자신의 목을 끌어안으며 머리를 기대는 느낌에 목덜미가 뜨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있던 한순간, 이드는 어느새 자신이 라미아가 되어 자신의, 그러니까 이드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라미아의 들뜬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잠시의 한순간이었지만 쉽게 잊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라미아는 이드가 그런 느낌에 빠져 있는 사이 이드의 기억 중에서 이드가 말한 동이족의 언어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둘이 이미 영혼으로 맺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로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드가 알고 있는 동이족의 언어에 대한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촌각 전까지만 해도 웅성임으로 들리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정확하게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이봐, 빨리들 움직이라구. 이러다 또 다른 몬스터라도 나오면 골치 큰일이란 말이다.”

“안다구요. 그만 좀 닥달해요. 대장. 이제 크레인으로 옮겨 실기만 하면 된다구요.”

제법 굵직한 중년인의 목소리와 아직 상당히 젊은 것 같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빨리해 임마. 다른 사람들은 주위를 경계하고. 저번엔 여기서 오크에다가 코볼트까지 봤는데… 으… 오크는 그래도 볼만한데 코볼트라는 놈들은 정말 징그럽단 말이다. 게다가 또 어떤 놈들이 더 늘었는지 몰라.”

“쳇, 그래서 저기 가디언인 진혁 아저씨가 같이 따라 오셨잖아요. 아저씨, 주위에 아무것도 없죠?”

중년인의 말에 또 다른 청년이 그 말을 받았고 곧 가디언이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에게 물었다. 곧 차분한 연륜 있는 기사 같은 목소리가 청년의 말에 답했다.

“그래, 아직 주위로 몬스터의 기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서웅 대장의 말대로 서두르는 게 좋겠네. 괜히 몬스터와 전투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때 처음 중년인의 목소리에 답했던 청년의 목소리와 기이이잉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자, 자, 그만 떠들고 비켜주세요. 그래야 빨리 일을 끝내죠. 그리고 대장 저기 와이번 묵어 놓은 로프 좀 크레인에 걸어 주세요.”

“알았어….. 됐다. 끌어 올려.”

이어 다시 기이이이잉 하는 뭔가 힘을 쓰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라미아가 이드를 바라보았다.

“중간 중간에 모르는 단어가 몇 개씩 끼어 있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이제 어쩌실 거예요? 저 사람들에게 가 보실 거예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야지. 어차피 어제고 부딪혀야 할 사람들이니까. 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거야.”

“하지만, 산중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도와줄까요?”

이드도 라미아의 말에 같은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한번 부딪혀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뭐, 저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아도 그만이지. 하지만 우린 조금 있으면 저런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야 돼. 저 사람들을 겪어 보고 마을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음, 이드님 생각도 맞긴 하네요. 그럼 한번 가봐요. 하지만 만약에 저들이 공격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 돼요.”

“물론, 위험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내 마나를 사용해서 공격해. 그럼 간다. 꼭 잡고 있어.”

라미아에게 그렇게 당부한 이드는 다시 풍운보를 펼치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곳, 와이번이 떨어졌던 장소로 빠르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복잡하게 뻗어 있는 나무가지들이 라미아에게 스치지 않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다가가기를 몇 분, 이드와 라미아가 그들과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가자 그 가디언 진혁이라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이드의 기척을 눈치챈 것이다. 기척을 죽여 다가가서 일부러 그들을 긴장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이드가 전혀 기척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드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면 그의 코앞에 가서야 그가 이드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서웅 대장, 주위를 경계하십시오. 무언가 다가옵니다. 기척으로 봐서 숫자는 하나.”

“알았습니다. 야, 빨리 모여. 그리고 너는 와이번 실는 것 서두르고.”

“알았어요.”

이드는 진혁이라는 사람의 말을 들으며 풍운보를 풀고는 보통의 걸음으로 바꾸어 천천히 걸어갔다. 기척을 숨기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2, 3분 정도를 더 걷자 여기저기 부러진 나무들과 그 위로 로프에 묶여 허공 중에 떠 축 늘어진 와이번과 커다란 바퀴를 가진 이상한 모양의 말도 차(車), 그리고 그 앞에 나무들 사이로 걸어 나오는 자신과 라미아를 향해 잔뜩 긴장한 채 길고 짧은 막대기 몇 개를 붙여 놓은 듯한 검은색과 회색의 처음 보는 물건을 겨누고 있는 6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6명의 앞에서 한쪽 허리에 매어진 왜도(倭刀)에 한 손을 올린 채 언제든 뛰어 나올 수 있는 자세를 잡고 있는 중년인이 있었다.

아마도 그가 이드의 기척을 감지했던 가디언 진혁이라는 사람일 것 같았다.

아마도 그가 이드의 기척을 감지했던 가디언 진혁이라는 사람이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양측은 서로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스포츠형의 검은 머리에 푸른색의 바지를 입고 있던 청년에 의해 깨어졌다.

“뭐야….. 애들이잖아.”

목소리로 보아 아까 서웅이라는 사람과 이야기하던 두 명의 청년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검은색의 이상한 막대, M-16 A1을 내리려 하자 그 옆에 있던 중년의 짧달막한 키를 가진 서웅이라는 사람이 급히 말했다.

“총 들어 임마. 너 저런 복장하고 다니는 애들 봤냐? 혹시 그거… 그….. 사람의 모습을 훔친다는 그 놈일지도 모른다.”

시안의 말에 총을 내리던 홍성준은 흠짓 하고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서웅에게 대답했다.

“에이… 그래도 애들인데… 그것도 여자 애들 같은데…..”

그렇게 말을 잊던 성진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이드의 날카로운 시선에 흠칫하며 내렸던 총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러는 그의 머릿속에는 왜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으면서 자신을 날카롭게 쏘아보는지 의아함이 들었다. 혹시, 진짜 도플갱어라서 자신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던 건가.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진혁의 목소리에 그는 이드를 향해 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반쯤 올려졌던 총을 슬그머니 다시 내렸다.

“아니요. 도플갱어는 아닙니다. 아직 한국에 도플갱어가 나타났다는 보고도 없었습니다. 또 도플갱어라도 저 소년이나 소년에게 업혀 있는 아이 같은 눈에 띄는 복장과 염색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좀 이상하긴 하군요. 이런 위험한 산속에 아이들이라니…”

진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 하던 자세를 풀어 자연스럽게 했다. 하지만 한쪽 손은 여전히 왜도의 손잡이에 올려져 있어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이드는 진혁이라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이젠 자신이 말을 해야 할 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라미아가 이드의 등에 묻고 있던 얼굴을 이드의 어깨 너머로 살짝 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드는 라미아가 고개를 드는 것과 함께 진혁이라는 사람과 말도 없는 이상한 차 위에서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한 장내 모든 시선이 라미아에게 쏟아지는 것을 알고는 입맛을 다셨다. 기분 나쁘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레센에서도 몇 번 여관이나 음식점 같은 곳에 들어가면서 저런 광경을 본 적이 있으니까. 그리고…. 이드 자신도 몇 번 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막 하려던 말이 끊긴 것 때문에 입맛을 다신 것이었다. 그러나 말을 계속해야겠기에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으려던 이드였지만, 그보다 먼저 서웅이라는 중년 남자의 말이 먼저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입맛을 다셔야 했다.

“저….. 저 애들…. 그 말로만 듣던 엘… 프라는 거 아니야?”

“에, 엘프?”

“정말… 그럴지도. 하지만 내가 아들 녀석에게 듣기로는 숲에서 산다고 하던데… 여기는 산이잖아.”

“에이… 귀가 길지 않잖아요.”

그 서웅이라는 사람의 말을 시작으로 여기 저기서 이런저런 기가 막힌 말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진혁이라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서웅이라는 사람의 상상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엘프는…. 아닙니다. 그보다 저기 소년의 말을 먼저 들어보지요.”

“아저씨, 아저씨 확인되지도 않을걸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 구요. 나까지 헷갈리잖아요. 그보다, 뭐 할 말 있니? 참, 우리말은 아는가 모르겠네…”

이드는 청년의 물음에 상황을 진정시킨 진혁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두 번이나 잘렸던 말을 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어딘지요?”

“무슨 말이야? 너 지금 니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는 거냐?”

그의 입에서 생각했던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며 이드는 라미아와 짜놓은 대로 심각한 고민거리가 있는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혀 보였다. 그런 이드에게 라미아의 응원 소리가 들렸다.

[호홋…. 화이팅 이드님. 이 실력이면 배우 하셔도 되겠어요.]

“그게 아니라… 저도 지금의 상황이 어리둥절해서 그럽니다. 그러니 자세히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여기가 어디죠?”

라미아의 응원을 한 귀로 흘린 이드의 심각한 표정에 정말 무슨 심각한 일이 있는 듯 하자 청년의 얼굴에 떠올랐던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 스르르 사라졌다.

“… 여기는 대한민국의 6개 대 도시 중 하나인 대구다. 정확히는 대구 팔공산의 한 자락이지만…. 자, 그럼 무슨 일이길래 그런 걸 묻는 건지 말해줄래?”

이드는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청년의 모습에 장난치는 듯한 가벼운 표정이나 지금의 이 진지한 표정 모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그 청년이 한 말 중에 들어 있던 대구라는 지명. 궁황 사부께 동이족의 말을 배우면서 같이 들었던 몇 몇 곳의 지명 중 하나였다. 오래 전엔 달구벌이라고도 불렸었다고 했다. 이드는 머릿속에 청년의 말을 간단히 정리해 두고 청년의 말에 대답했다.

“우선, 저는 이곳 사람이 아닙니다. 제 고향은 호북성의 태산으로 이름은 이드 아니, 예천화(叡川華)라고 합니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말도 몇 년 전 할아버지께 배워서 사용하고 있는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드의 말이 우선 거기서 끊어지자 이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호북성이라는 지명이 어디죠?”

“글쎄… 호북성, 호북성이라………”

주위의 사람들이 국명을 대지 않고 지명을 댄 이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진혁이라는 사람은 그 지명을 안다는 듯 이드에게 다시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호북성(지금도 사용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염…^^;;)은 중국의 성 이름인데… 그런데 그런 니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그것도 이곳의 지명도 알지 못하고 말이다.”

이드는 진혁의 말에 다시 곤란하다는, 자신 역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와 정연(晶淵)이는 태산 깊은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량은 거의 태산 안에서 구하지요. 그리고 이곳에 하루 전에도 정연이와 같이 산 속으로 덫을 쳐놓은 것을 확인하고 나물을 좀 뜯기 위해서 집을 나섰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 둘 앞에 강렬한 빛이 일어나더군요.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떻게 피해보지도 못하고 빛에 휩싸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위에 있는 동굴 안이더라구요. 그때가 오늘 아침이었을 겁니다.”

“갑작스런 빛이라고?”

“네, 강렬한 빛이었어요. 거기다…. 그 빛이 일어나기 전에 주위의 기운들이 이상하게 변화하는 게 느껴지기도 했구요.”

사실 이드와 라미아가 짜놓은 이야기의 중심은 텔레포트 마법이었다. 이 세계에 마법이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와이번도 있으니 있겠지. 라는 생각에서 튀어나온 이야기였다. 어떻게 보면 단순 무식한 대답이었지만, 다른 어떠한 질문에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는 궁극의 답안이기도 했다. 누군지, 아니면 자연현상일지도 모를 일로 자신도 모르게 날려왔는데, 대답해 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모른다고 말하면 완전 해결인 것이다. 그리고 진혁이 이드의 말을 곰곰히 되새기고 있는 사이 라미아가 이드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이드님, 저와 상의도 없이 이름 정하셨죠~~ 근데 무슨 뜻이에요?]

‘하하하… 미안해. 네 이름을 말해야 하는데, 그 사이에 너와 의논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내 이름하고 비슷한 뜻을 가진 정연이라고 했는데. 괜찮지? 밝을 晶자에 못 淵자를 썼는데.’

이드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기에 웃는 얼굴로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한 번 정해 놓으면 이곳에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써야 할지도 모를 이름인데 그것을 혼자서 정해 버렸으니.

[음… 좋아요. 뜻도 좋고, 이드님 이름과도 비슷한 느낌이라서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드릴게요. 하지만, 다음 번에 또 이러시면… 이번 것까지 같이 해서 각오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손으로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이드의 말을 모두 정리한 듯 진혁이 다시 고개를 들어 이드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이유 모를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자네… 아까 빛에 휩싸이기 전에 주위의 기운이 이상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고 했었는데, 자네 혹시 능력자인가?”

이드는 진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능력자라는 말이 뭘 말하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반면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진혁의 말에 놀라 이드를 바라보았다.

“능력자라니요? 그게 뭐죠?”

“이런, 서두르느라고 자네가 산 속에서 생활했다는 걸 잊고 있었군. 능력자란 말이야… 아니, 이것보다. 자네 7개월 전의 일을 알고 있나?”

진혁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 이드와 라미아는 아무리 깊은 산 속에 살았다지만 어떻게 그런 일을 모를 수 있냐는 주위의 시선을 받으며 진혁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이 세계의 상황을 대충이지만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7개월 전, 그러니까 2000년 12월 28일 목요일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2시 28분. 이 날은 전 세계의 인류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을 거의 지구 멸망과 같은 충격을 안겨 준 날이었다. 그날,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이 마지막으로 보내준 그 영상.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에서부터 황금빛, 빛의 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인간들에게서 ‘잊혀졌던 존재들’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의 기둥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전, 그 빛의 기둥을 중심으로 해서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파동이 지구를 뒤덮었고, 컴퓨터를 시작해 전화기까지 모든 전자장비가 고장나고 작동을 중지해 버렸다. 그런 갑작스런 일에 사람들이 불안해 할 찰나, 이번엔 대지를 뒤흔드는 지진과 함께 아무 것도 없던 평야에 숲이 생겨나고 바다에 섬이 떠오르고 솟아 있던 섬이 가라앉고, 높기만 하던 산이 사라져 버리고, 잘 돌아가던 원자로의 플루토늄 등이 모두 제 기능을 잃어 등의 사람들의 혼백을 빼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였다. 바로 예언. 노스트라다므스를 비롯해 꽤나 많은 예언가들이 말했던 인류 멸망.

하지만 이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 환상처럼 생겨난 숲과 산에서부터 만화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듯한 몬스터들이 걸어나오고, 하늘에서 와이번이 불꽃을 내뿜으며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잠시 떠돌던 노스트라다므스의 인류 멸망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상대가 뭐든 간에 자신을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것이 있는데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남겨두겠는가.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과 가까운 곳의 수도로 모여 들었고, 그때쯤에서야 부랴부랴 준비한 군대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군대는 작은 몬스터는 상대할 수 있었으나 대형의 몬스터는 쉽게 상대할 수가 없었다. 오우거나 트롤 같은 경우에는 소총 정도로는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해 박격포나 대전차 지뢰를 사용해야 했고, 와이번 같은 경우는 한두 마리를 상대하기 위해 두, 세 대의 전투기와 헬기가 투입되어야 했다. 허공 중에서 자유자재로 서고 움직이고 방향을 꺾는 와이번에겐 미사일을 먹이기도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생각해 보지도 못한 적을 상대하는 군인들의 정신이 침착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는 오히려 편했다. 고스트나, 새도우, 도플갱어 등의 수는 적지만 초자연적인 존재들 앞에서는 현대식의 무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몬스터들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 드래곤. 고스트나 새도우처럼 형체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을 뿐더러 그 엄청난 공격력으로 수도 하나를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절대의 존재. 그 앞에서 군과 정부는 주저없이 핵무기 사용을 허가했다. 하지만 핵무기는 사용되지 못했다.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가 그렇듯, 핵 폭탄에 사용된 플루토늄과 핵이 모두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마치 은과 비슷한 상태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람들을 공격한 드래곤은 블랙과 레드 두 마리의 드래곤뿐이었고, 또 수도 5개를 부수고 자취를 감추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일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또 뾰족한 방법을 찾지도 못한 상태에서 몬스터들이 수도까지 오지 못하게 하는데 급급하기를 삼일째 되던 날. 그날을 시작으로 사람들 앞에 검을 들고, 부적을 들고, 십자가를 들고, 바람과 불을 부리며 사람들 앞에 나서 몬스터를 물리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속세를 떠나 지내던 은자(隱者)들이자 기인(奇人), 능력자. 즉 가디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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