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33화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는 맛보기였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비급이 사라졌다는 소식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말을 한 연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쥬스를 한 모금 마시며 천화와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반짝반짝 거리는 눈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옛날 이야기 듣는 아이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연영은 두 사람의 기대에 답하듯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사흑영의 활동은 그 행적이 정천무림맹과 천마사황성까지 이어지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자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이 이상 자파의 무공비급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비사흑영을 잡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져 갔다. 그리고 그런 의견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무림전역에 한 가지 소문이 퍼져 나갔다. 바로 무공의 대부분을 사장시켜 버리는 소문이…
- 비사흑영이 멸무황의 무공을 노렸다. 하지만 멸무황의 무공에 밀려 천무산(天霧山)의 비애유혼곡(悲哀有魂谷)으로 도망쳤다. –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그 소문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퍼져 나간 이 소문은 어느새 뼈와 살이 더욱 붙여져 비사흑영이 도망친 비애유혼곡이 비사흑영의 근거지이며 그곳에 지금까지 비사흑영이 훔쳐간 각파의 모든 비급들이 그곳에 숨겨져 있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당연히 이 소문을 무림인들, 특히 비사흑영에게 자파의 비급을 도둑맞은 문파와 무공을 찾아 강호를 헤매는 들개와 같은 유랑무인들이 너도나도 비애유혼곡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중에 생각 있는 인물들에게서는 이번 일이 함정일 수도 있다는 말과 함께 사파의 계략일 수도 있다는 말이 터져 나와 정도의 몇몇 인물들의 발길을 붙들어 놓는 듯 했다. 하지만 곧 들어온 정보에 의해 사파의 세력들과 천마사황성이 비애유혼곡을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잠시 멈칫하던 정파의 인물들이 망설임 없이 비애유혼곡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정천무림맹이 뒤따랐다. 혹시라도 소문이 사실일 경우 무림의 모든 무학을 천마사황성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천무림맹의 세력에는 이번 일이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던 인물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끼어있었다.
몇 일이 지난 후 천무산 깊은 곳에 자리한 거대한 계곡인 비애유혼곡은 소문 때문에 찾아든 무림인들 때문에 수도의 번화가처럼 각양각색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천무산이란 이름답지 않게 비애유혼곡 주위의 안개들이 사람들의 기운에 밀려나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의 수에 비해 계곡 안은 조용했다. 모두 자신들의 목적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계곡 주위는 정천무림맹과 천마사황성의 고수들로 포위되었고 양 세력에서 편성한 수색대에 의해 철저하게 파헤쳐졌다. 하지만 양 세력 간에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들이 목적하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쓸 데 없이 힘을 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양 세력이 계곡에 들어선 지 오일 째 되던 날 한 유랑검사에 의해 발견된 비사흑영의 근거지처럼 보이는 동굴 때문에 완전히 뒤바뀌었다. 동굴이 발견되자 정사양측 모두 자신들이 먼저 들어가기 위해 신경전을 펼치기 시작했고, 결국 다음 날 더 이상 참지 못한 유랑무인들이 동굴로 뛰어드는 것을 시작으로 정사양측은 상대방의 몸과 머리를 밟아가며 동굴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죽이고 밟아가며 동굴로 뛰어드는 동안 폭약으로 가장 유명한 벽력당(霹靂堂)을 비롯 폭약을 보유하고 있던 대 문파들이 차례차례 공격당하며 화약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폭약을 빼앗은 봉두난발의 인물이 바로 이번 일에 대한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인 비사흑영이자, 멸무황이란 사실을 말이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연영은 말을 끊고 쥬스를 진을 비웠다. 천화는 그런 연영의 모습에 그녀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기 전에 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무림인들이 비애유혼곡으로 몰려간 것이 그 비사흑영이란 사람의 함정 같은데…. 그런데 누나, 그 비사흑영이자 멸무황이란 사람. 정체가 뭐예요?”
천화의 질문에 쥬스를 마시던 연영은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입안에 머금은 쥬스를 넘겼다.
“꿀꺽….. 몰라. 그가 동굴 안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곳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 없으니…. 다른 자료가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멸무황으로 강호를 떠돌아다니던 그의 모습 정도 뿐이야.”
천화는 연영의 대답을 듣다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살아 나온 사람이 없다니, 그렇다면 그 많던 무림인들이 그곳에서 모두 죽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연영에게 급히 되물으려던 천화였지만 라미아가 먼저 물어주었기에 이어질 연영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 언니, 그럼 그 많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모두 죽었다는 말 이예요? 살아 나간 사람 하나 없이?”
“응, 거의가 죽고 이 십 여명만이 살아 돌아왔데, 그 이 십 여명도 동굴 안으로 들어가다, 동굴의 기관 때문에 상처를 입고 되돌아 나온 사람들과 동굴 밖을 지키던 사람들이었지. 동굴 깊이 들어간 사람 중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지.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그들이 들어갔던 동굴은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한 보보박살(步步搏殺)의 중첩되는 함정과 기관의 연속이었다고 하더래.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음에 본 게 엄청난 진동과 함께 원래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리는 비애유혼곡의 모습이었데….”
“그럼 그때의 사건 때문에….”
천화의 말에 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 사건 때문에 대부분의 무공이 소실된 거지. 그리고 후에 들어온 총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무공이 외면을 받고 은밀하게 전수되기 시작한 거야. 어머? 벌써 10시가 다 돼가잖아?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었던 모양이다. 그럼 이제 자자…. 라미아, 들어가자. 천화도 잘 자라.”
천화는 연영의 말에 연영과 라미아에게 잘 자라고 답해 주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천화의 방은 상당히 단순했다. 한쪽에 놓여진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 책상, 아이보리색 테두리에 체크 무늬의 옷장이 가구의 전부였고, 장식물이라고는 벽에 걸려있는 서양풍의 풍경화 한 점이 전부였다. 만약 일라이져라도 벽에 걸어둔다면 상당히 보기 좋겠지만, 책상의 서랍 속에 들어가 있으니…. 아쉬울 뿐이다. 침대에 몸을 얹은 천화는 엎드린 그대로 자신의 짧은 강호 생활 중 보고 들은 것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멸무황과 비슷한 사람이 있었는지를 찾았다. 하지만 한참을 그렇게 있었지만 멸무황과 비슷한 인물에 대한 것은 들은 적도 없었다.
“음….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라…. 하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누나의 말처럼 명 초기에 있었던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는걸. 만약 그런 인물이 나왔다면, 혈월전주나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나서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그런 생각은 중원으로 돌아가서 하기로 하고…. 자자….”
천화는 그 말과 함께 침대에 엎드려 있던 몸을 바로 눕히고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바로 잠드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천화의 입에서 나지막한 주문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는 자, 다시 걷는 자… 내가 원하는 시간을 회상하며 다시 걸으리라… 미디테이션.”
천화는 자신이 시동어를 외움과 동시에 마치 꿈처럼 몽롱한 영상으로 오늘 공부했었던 한글의 내용이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 라미아도 지금쯤은 자신과 비슷한 영상을 보고 있을 것이다. 지금 천화와 라미아가 사용하고 있는 이 미디테이션이란 마법은 마법사들이 좀 더 쉽고 편하게 명상과 학습을 하기 위해 만들어낸 마법이다. 시전자가 수면을 취하는 동안 꿈과 같은 영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보는 것으로 반복학습의 효과를 볼 수 있고, 꿈과 같은 영상이기에 머릿속에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천화와 라미아는 한글을 빨리 익히기 위해 이 미디테이션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음…. 내일이지?”
“뭐가요?”
토요일 아침. 식당으로 향하던 길에 연영이 천화와 라미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주위로부터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을 받고 있던 천화가 반문했다. 가이디어스에 첫 수업을 받은 것이 삼일 전. 첫 날부터 천화가 연영 선생과 라미아, 두 사람과 같은 호실을 사용한다는 소문이 퍼진 덕분에 천화는 다음날 아침부터 연영 선생과 라미아와 함께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이런 부러움과 질투가 진하게 어린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가이디어스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두 사람과 같은 호실에 머무르는 것도 모자라 자랑이라도 하듯이 아침부터 두 사람과 식당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런 학생들의 반응에 연영도 첫날만 웃어 보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어 했다. 어제는 오히려 장난스럽게 천화의 팔짱까지 껴보여 천화에게 향하는 시선을 몇 배로 불려버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뭐, 그 덕분에 반에서까지 태윤을 비롯한 남학생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뭐라뇨? 어제 반장이 말했던 거 벌써 잊어버렸어요? 우리 반 애들이 저희들이 5반에 들어온 걸 축하한다고 환영회를 겸해서 놀러 가자고 했었잖아요.”
“아, 맞다. 갑자기 물으니까 그랬지.”
설마 벌써 잊어버린 거냐는 듯한 라미아의 날카로운 말에 천화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아침 조회시간에 반장이 연영에게 천화와 라미아의 환영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일요일날은 자유시간인 만큼 아무런 문제도 없었기에 연영은 쾌히 승낙했고 자신 역시 같이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가장 좋아했던 것이 라미아였다. 지금까지 검으로 있었던 만큼 놀러간다는 것이 처음인 라미아에겐 상당히 기대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라미아 앞에서 전혀 모르는 일인 듯이 대답을 했으니 라미아의 반응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도 그렇지. 근데…. 너희 둘. 특별히 가보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아무래도 내일은 너희들을 중심으로 다닐 것 같은데, 가능하면 너희들이 가보고 싶은 곳으로 가야지.”
하지만 한국, 아니 이 세계에 온지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 뿐인 두 사람이 가고 싶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두 사람의 고개가 내저어지는 줄 알았는데….. 고개를 젖고 있는 것은 천화 뿐이고 라미아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한 곳을 말했다.
“롯데월드요. 저 거기 가보고 싶어요. 몇 일 전 TV에서 봤는데…… 엄청 재밌을 거 같거든요.”
“호호…. 그럴 줄 알았지. 걱정 마. 반장 말로는 거긴 오후에 갈 거라고 했었으니까. 다른 곳은 없어?”
“네!”
연영의 말에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라미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천화는 자신을 향하던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이 한순간이나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신 자신을 향하던 시선들이 모두 라미아를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라미아 웃기만 하면 저러니…. 라미아 보고 계속 웃으라고 해볼까? 나한테 오는 시선이 없어지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