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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42화


그때 고염천의 곁으로 강민우가 다가오더니 한쪽 팔을 살짝 들어 올려 고염천의 맞은편 벽을 향해 뻗었다.

“나.와.라.”

단어 하나하나를 끊어 말하던 강민우의 팔이 슬쩍 당겨졌다. 그와 함께 마치 강민우의 팔과 실로 연결이라도 된 듯 지름 삼십 센티미터 정도의 돌을 시작으로 낚시대가 펼쳐지는 것처럼 점점 큰 돌들이 당겨져 나오며 벽 주위로 떨어졌다.

“아, 저건….”

그 모습에 다른 가디언들과 같이 서서 보고 있던 천화의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여기 들어오기 전 첫 번째 석문이 저런 식으로 뚫려져 있었다. 그때 고염천이나 딘, 이태영 이 세 명 중에 한 명일 거라 생각했는데, 고염천과 강민우의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저 앞에 있는 석문이 부서진 모습하고 똑같지?”

“아? 아, 네. 들어오면서 봤는데, 잘린 면이 깨끗하고 일검에 그렇게 한 것 같아서 누구 솜씨인가 했었죠.”

강민우의 염력에 의해 잘려진 돌덩이들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천화는 이태영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천화의 말투가 이태영의 맘이 들지 않았나 보다. 이태영이 천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 높이지마. 너하고 나이 차가 얼마나 난다고….. 그런 말 들으면 괜히 나이 든 기분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그냥 형처럼 편하게 대해라. 알았지?”

천화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이태영은 천화의 어깨에 놓아두었던 팔을 들어 천화의 어깨에 편하게 걸치며 말을 잊기 시작했다.

“방금 그 초식은 대장님이 사용하는 남명화조공(南鳴火鳥功) 중에서 강한 파괴력으로 수위에 속하는 기술이고 대장님이 애용하는 기술이기도 해. 주로 장애물을 부수거나 대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열에 팔 구는 저 초식을 사용하는데….. 그 상대가 몬스터일 경우에는…. 좀 보기 좋지 않지. 왜 그런지는 알겠지?”

“아, 대충 짐작이 가는데…. 저도 몬스터를 상대로 쓰는 모습이라면 별로 보고 싶지는 않네요.”

확실히 볼만한 모습은 못될 것 같다. 상대가 생물이고, 방금의 남명회회의 초식이 정확히 들어가 상대에게 먹힌다면…. 어김없이 내장이 주르르르륵 흘러나오거나 터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좀 더 신경을 쓰고 힘을 쏟아 그 초식을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제어한다면, 검기가 날아드는 부분을 최대한 축소시켜 작은 구멍을 내는 형식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커다란 구멍이 아니라 동전만 한 구멍을 만들어 적을 처리할 수 있으며 더욱더 위력적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섬세한 초식의 운용과 보통 때보다 더 많은 힘이 든다.

“좋아, 진입한다. 이곳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선두는 내가 맡고, 일행의 뒤는 딘이 맡는다.”

“네.”

“그럼, 모두 조심하고. 들어가자.”

고염천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뚫어 놓은 벽 안으로 들어서자 그 뒤를 따라 팽두숙, 가부에, 강민우 등이 일렬로 쭉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고, 천화도 세이아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벽의 뒤쪽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어두웠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벽 밖의 연회장이나 복도처럼 밝지 못하다는 것이다. 광구가 뛰엄뛰엄 자리하고 있다는 이유도 이유지만 뛰엄뛰엄 밖혀 있는 광구조차도 밖에 있는 광구들의 밝기보다 약해 그런 느낌을 더 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흐릿한 빛 사이로 보이는 내부는 조금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공사를 하다 중지한 모습이라고 할까? 바닥은 연회장처럼 대리석이 깔려 깨끗한데 반해 주위의 벽은 반듯하게 깎여만 있을 뿐 돌로 막아 놓거나, 대리석을 대놓지도 않고 있었다. 더구나 천정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는지, 울퉁불퉁한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으며, 여기저기 돌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거, 분위기 한번 되게 음침하네….. 설마 뱀파이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침침한 분위기에 주위를 돌아보던 이태영이 불안한 듯이 말을 이었는데, 그런 그의 고개는 연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고 한쪽 손은 언제든지 검을 뽑기 위해 검 자루를 꽉 잡아 쥐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에서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장난스런 분위기는 전혀 보이지 않아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모습에 이태영의 뒤쪽에서 걷고 있던 신우영의 입가로 짓굿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호…..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마족도 나왔으니까 뱀파이어가 있을지……. 도 모르겠는걸? 참, 그러고 보니, 너 뱀파이어 무서워한다고 했었지? 어떻하니….”

“…… 우씨.”

능청스레 너스레를 떠는 신우영의 말에 이태영이 그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능글거리는 듯한 신우영의 모습과 주위의 음침한 분위기 때문에 다시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신우영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화는 킥킥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이곤 바로 뒤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손영의 모습에 머쓱해 하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천화라고 했던가?”

고개를 돌리려던 천화는 갑자기 물어오는 남손영의 말에 고개를 돌리려던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남손영……..”

“형이라고 해. 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까.”

“네, 형. 근데 왜 부르신건데요?”

천화는 자신을 부를 명칭을 정해준 남손영을 향해 물었다. 천화의 물음에 남손영은 여기저기 매달린 가방 중 자신의 가슴 부위에 가로로 매어진 작은 손가방에 손을 넣어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보석 두 개를 꺼내 드는 것이었다. 투명해서 수정과 도 같은 빛을 발하는 보석과 투명한 빙옥(氷玉)빛을 발하는 두 보석이었는데, 천화의 기억에 따르자면 이 보석들은 남손영이 조 앞에 가고 있는 가부에와 같이 도플갱어를 상대할 때 사용한 보석폭탄이었다. 천화는 그런 것을 자신에게 내미는 남손영을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걸 왜…… 아까 보니까 폭탄인 것 같았는데….”

“아, 맞아. 보석폭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보석을 쓰기 때문에 값이 좀 비싸기는 하지만 성능이 좋아서 내가 많이 쓰고 있는 거야. 보통의 화약폭탄과는 달리 마나를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새도우나 고스트한테도 먹히니까 급한 일이 있으면 사용하도록 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비상용으로 모두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으니까 너도 한두 개 정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잘 가지고 있다 유용히 사용할게요.”

천화는 꼼꼼하게 자신에게 신경 써주는 남손영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고는 그에게서 받아든 두 개의 보석들을 바라보았다. 투명하게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보석. 사실 그 보석은 천화는 잘 모르고 있지만 꽤나 유명한 것들이었다. 보석에 영력을 담아 터트리는 보석폭탄, 일명 쥬웰 익스플로시브(jewel explosive)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쥬웰 익스플로시브는 기존의 물리력만을 행사하여 오크나, 오우거 등의 몬스터만을 해치울 수 있는 폭탄이 아닌 영적인 존재. 그러니까 새도우나 고스트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특수 폭탄으로 위급한 상황에 민간인-이건 보석도 보석이지만, 그에 주입되는 마나 등을 생각해 값이 보석 원가의 두 배 정도로 높은 것이다. 다가 민간인이 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비상시에만 몇몇의 민간인에게 나누어준다. -이나 군에서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가의 지원 하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쥬웰 익스플로시브에 사용되는 보석의 주는 수정이다. 수정은 순수하기에 순수한 마나뿐 아니라 특이한 성질을 뛰는 마나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각각의 기운을 살리기 위해서 주입되는 마나에 맞는 보석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불꽃의 마나를 사용할 때는 루비를 사용하고, 전기의 마나라면 사파이어를 사용하는 식이다. 그리고 천화에게 주어진 것은 수정과 문스톤으로 수정은 아까 보았듯이 강력한 폭발력만 발할 것이고, 문스톤은 그 보석이 가지는 성질인 물과 얼음대로 던져서 터트리면 그 주위로 차가운 냉기를 퍼트릴 것이다. 보석에서 뿜어지는 빛과 마나를 잠시 동안 바라보던 천화는 곧 그곳에서 눈길을 떼고 두 개의 보석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 두었다. 던질 상황이 없더라도 한번 던져봐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거 하나 만드는데 얼마나 드는데…)

천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일행들을 어느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한, 두 살 박이 아기도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 턱 높이를 가진 계단들이었는데 아까 들어서던 곳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계단이라 넓이만도 삼 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렇게 얼마간을 내려갔을까. 백 미터 정도는 내려왔겠다고 생각될 때쯤 일행들의 앞으로 계단의 끝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곳으로 비쳐 드는 괴괴한 빛과 검붉어 보이는 이상한 색의 땅은 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당히 저조시키고 있었다. 특히 방금 전까지 몬스터와 마족과 싸운 사람들을 긴장시키기엔 충분할 정도의 분위기였기에 고염천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대원들과 천화를 향해 다시 한번 당부를 잊지 않았다.

“별로 기분 좋지 못한 곳 같으니까. 다들 조심하고 출구를 나서자마자 경계대형 갖추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다.”

고염천의 말에 그의 뒤를 따르던 가디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 상 큰 소리로 대답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고개도 끄덕이지 못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가디언이 아닌 천화였다. 그러나 고염천도 천화를 생각해 냈는지 이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 천화 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 자리에 있으면 경계대형의 중앙에 저절로 들어가게 되니까 아무 문제없을 거다.”

잠시 더 앞으로 나아가던 그들은 출구에서 이 미터 정도의 거리가 되자 거의 뛰는 듯한 동장으로 출입구 밖으로 뛰어 나가며 흩어져 자신들의 자리를 잡았다. 순식간에 갖추어진 대형에 따라 전방의 고염천을 중심으로 양측에 세 명씩 여섯 명이 서고, 중앙에 천화와 세이아, 남손영이 버티고 서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주위에 아무런 기척도 기운도 없음을 확인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형을 풀어냈다.

“굉장히 조용한데요.”

“젠장, 혹시 우리가 잘못 찾아 온 거 아닐까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강민우와 이태영이 투덜거렸다. 왠지 조심조심 온 게 헛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의 말은 이어서 들려온 고염천의 목소리에 의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쏙 들어가 버렸다.

“아니,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저 앞쪽을 봐라.”

고염천이 말과 함께 가르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사람들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져 갔다. 그 중 특히 두 사람 신우영과 세이아의 표정이 좋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저 오십 미터 앞쪽에 놓여있는 붉은색의 벽과 그 벽에 새겨진 묘한 부조 때문이었다. 세이아나 신우영 두 사람의 직업상 영력이나 귀신은 꽤나 친숙한 것일 터에 그 벽에 새겨진 부조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왠지 기분 나쁜 모습인 걸요.”

신우영의 말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천화가 무얼 보았는지 반 듯한 눈썹을 접어 양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요. 저렇게 백골이 싸인 걸 보면요. 저기 있는 게 밖에 있는 것 보다 많은 것 같은데요.”

과연 천화의 말대로 그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에는 수십 여 구에 이르는 백골과 여기저기 찢어진 옷가지들이 쓰레기가 쌓여 있는 모양으로 아무렇게나 던져져 쌓여 있었다. 그 양 또한 상당했는데, 개중엔 어린아이의 것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두개골과 뼈들도 나뒹굴고 있었다.

“음, 이놈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냥한 거야? 위쪽에 있는 시신만 하더라도 대략 삼십 여구 정도 되어 보이던데….. 이건 대충 오, 육십 구는 되겠는데…”

“으….. 지금은 그것보다 여길 조사 해보는 게 먼저잖아요. 분위기도 음침한데 빨리 조사 마치고 나가자구요.”

이태영의 말을 들은 고염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로 시선이 분산되어 있는 가디언들의 시선을 다시 끌어 모았다.

“자, 자. 자세한 건 일이 끝나고 살펴보고. 우선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부터 살펴보자 구. 여기에 그 마족 놈과 그 윗줄에 있는 놈이 없으면 다른 곳을 찾아 봐야 하니까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고염천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이려 할 때였다. 그때까지 백골 더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남손영의 목소리가 움직이려던 모두의 발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대장. 여기 뭔가 좀 이상한데요.”

남손영의 말에 모두의 행동이 멈춰졌고, 선두에 서 있던 고염천이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남손영은 고염천을 위시한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아지자 잘 보라는 듯한 시선으로 백골더미를 가리켰다.

“저 유골 더미 말입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그의 말에 따라 고염천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백골더미로 향했다. 그러나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 말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 지금이 사람 속 태울 때인 줄 알아?”

“네, 네. 잘 보십시오. 저기 있는 유골들….. 속에 있는 건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엔 남성의 것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저기 있는 건 모두 유아에서부터 성인까지 모두 여성들의 유골뿐이란 말이지요.”

“그런………….”

남손영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그제서야 흠칫하는 표정으로 백골더미들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가디언들의 그런 모습에 남손영이 안내라도 하듯이 몇 마디 말을 더했다.

“대부분 잘 모르겠지만, 저기 있는 유골들은 여성의 것이라 그 굵기가 남자들 것보다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저 위쪽에서 봤던 유골들 중 큰 것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되겠죠. 또 가슴의 갈비뼈도 여성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지요. 더구나 주위에 찢어져 흩어져 있는 옷들도 모두 여자들이 입을 만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요.”

그의 말에 따라 시선을 옮겨 가던 가디언들과 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손영의 말대로 였다. 굳은 얼굴로 고염천이 고개를 돌려 남손영을 바라보았다.

“그럼……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곳에서 식사를 한 녀석이 편식을 했다는 말은 아닐 테고.”

“…. 모르죠. 저희가 마족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게 아니니 편식을 하는 녀석이 있을 지도요. 아니면…. 아까 말했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부러 편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위에서 보셨지 않습니까. 우리들과의 전투 보다 소녀를 먼저 챙기던 모습 말입니다.”

그 말에 고염천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살풋 굳어졌다. 하지만 마족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으니…. 뭐라고 단정을 내리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중 굳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이태영이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낫는지 긁던 손을 바꾸어 머리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이태영은 그런 자신의 행동에 사람들이 요상한 시선으로 돌아보자 급히 손을 흔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이상하게 보지 말라 구요. 좋은 생각이 나서 그러는데….. 들어보세요. 우리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요. 우리 측에도 마족에 대해 괘나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이 있지 않습니까?”

“태영아….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 구나. 천화야.”

이태영의 말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에 물어봤지 라고 말하려던 고염천은 자신 앞에서 멀뚱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천화의 모습에 급히 말을 바꾸며 천화의 이름을 불렀다. 나머지 가디언 들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천화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맞아, 천화가 있었지. 깜빡하고 있었잖아….”

“하급 마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 모르지.”

“천화야. 아까 오고 갔던 이야기 알지? 혹시 마족 중에 여성의 생명력만 흡입하는 놈도 있냐?”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던 천화는 고염천의 말을 시작으로 모든 가디언들의 시선과 질문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한순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가 양손을 쭉 뻗으며 큰 소리로 그들의 질문 공세를 틀어박았다.

“시끄러워욧!!! 시끄럽다 구요. 제발 한 명씩 말해요. 한.명.씩.”

천화는 자신의 악에 받힌 듯 한 목소리에 한순간에 입을 닫아 버린 아홉 명의 가디언들의 모습을 보고는 살았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염천과 남손영을 바라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다른 생각하고 있어서 못 들었는데…. 여자의 생명력만 흡수하는 마족이 있냐 구요?”

못 들었다고 하면서 정확하게 자신들이 알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천화의 말에 고염천 등은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천화는 그 질문에 그런 마족이 누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다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이드론의 정보 덕분에 마족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 정보를 이용해 상대를 알아볼 생각을 못한 건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정보인데도 말이다.

‘이거 내 것이 아니다 보니…. 참나, 이럴 게 아니라 몇 일 좋은 시간을 택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겠어…..’

천화의 머리는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열심히 그래이드론의 기억 창고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화가 눈을 반짝하고 뜨더니 제일 먼저 천화에 대해 생각해 낸 덕에 자신에 찬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이태영을 안됐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태영은 순간 그 시선에 움찔 하더니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찬찬히 사라지더니 불안한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천화에게서 나온 말에 그의 인상이 팍 하고 구겨지며 검을 뽑아 드는 것이었다.

“…. 안됐어요. 형. 내가 알고 있는 마족중에 여성의 생명력만을 흡수하는 마족은….. 형이 실어하는 뱀.파.이.어 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젠장. 제기랄…. 어째 분위기부터 음침한 게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 이씨. 왜 하필 그거야?”

왜 하필 그거냐니? 어디에 어떤 마족은 있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천화는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에 쿡쿡하고 웃음을 짓고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왜 뱀파이어라고 생각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 우선 설명하기 전에 하나 말해 두자면요. 마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사람의 생명력을 흡수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계약이나 특별한 의식을 통해 사람의 생명력을 흡수할 수는 있지만 자연스럽게 사람의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는 마족은 수많은 마족 중에 일부뿐이거든요. 주로 알려진 것이 도플갱어가 마족으로 진화한 경우. 정확히 따져서 도펠이란 이름의 마족이죠.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는 뱀파이어와 꿈을 통해 사람의 정기(精氣)를 먹어 치우는 몽마(夢魔), 서큐버스와 잉큐버스 등등해서 몇 종류가 있죠. 하지만 그런 종류들 중에서도 여성이나 남성, 그 어느 한쪽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죠. 뱀파이어와 몽마, 서큐버스와 잉큐버스로요. 물론 계약을 통해서 여성들의 생명력을 흡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엔 성별을 별로 따지지 않지요. 그러니 남는 건, 두 종류뿐이란 소리죠. 그리고 여기서 서큐버스와 잉큐버스는 주로 꿈을 통해 정기를 흡수하는 종류이기 때문에 빠진다면, 남는 건 뱀파이어뿐이란 소리가 되죠. 그런데 여기서 알아두실 게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잠시 말을 끊은 천화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남손영을 싱긋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선에 남손영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알아두실 것은 뱀파이어도 하급에 속해 있을 때까지만 자신과 반대되는 성의 생명력을 흡수한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힘을 길러 중급 정도의 힘을 소유하게 될 때부터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는 소리죠. 아니, 그때가 되면 오히려 사람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경우가 줄어들어 몇몇 자신의 마음에 드는 상대의 생명력만을 흡수할 뿐이죠. 그리고 이때부터 뱀파이어에게 생명력을 흡수당하는 사람은 그의 의지에 따라 뱀파이어로 변하게 되죠.”

천화가 다시 한번 말을 끊자 가만히 듣고 있던 강민우가 입을 열었다.

“….. 음, 그럼 이곳에 있는 뱀파이어가 하급의 뱀파이어란 말이예요?”

“그렇지는 않아. 만약 하급의 뱀파이어라면, 같은 하급에 위치한 보르파가 님자까지 붙여가며 신뢰를 보이진 않았겠지. 아마 못돼도 중급이나 상위급에 속하는 뱀파이어일 거야.”

“하지만 조금 전 말할 때는 하급의 뱀파이어만이 남녀를 가린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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