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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43화


“하지만 조금 전 말할 때는 하급의 뱀파이어만이 남녀를 가린다고 했잖아?”

방금 전의 말과는 다른 천화의 말에 딘이 이상하다는 듯이 의문을 표했다.
천화는 딘의 말에 한쪽에 서 있는 남손영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까 손영 형이 말했었잖아요. 그 휴라는 녀석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 같다고…. 사실 중, 상위권에 속하는 뱀파이어들이 큰 부상이나 사고를 당했을 때 가장 빠르게 회복하는 방법이 하급일 때처럼 남자, 여자 한쪽의 생명력만을 흡수하는 방법이거든요.”

“그럼……”

“네, 제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그 휴라는 마족 녀석 몸 상태가 상당히 좋지 못한 것 같은데요. 거기다 위에서 보르파가 그 소녀만 빼내 가려 했던 걸 보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일 테구요.”

“호~ 그렇단 말이지…..”

이어지는 천화의 말에 아리송한 표정들이었던 가디언들의 표정이 확 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강한 적이 있는데, 어디가 아파 누워 있다니….
명예를 건 전투가 아니라 이기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앞에 둔 사람에겐 아주 즐거운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는 보통 사람인 고염천의 얼굴에도 어느 정도 여유와 웃음이 돌아왔다.

“좋은 소식인데….. 그럼 빨리들 서둘러. 빨리 찾는 만큼 그 휴라는 놈은 그만큼 힘을 못 쓸 테니까 빨리들 뛰어.”

고염천의 힘 있는 지시였다.
하지만 그에 대답해야 할 가디언들과 천화의 힘찬 대답을 앞질러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염천과 가디언, 그리고 천화 일동은 신경질 난다는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려세웠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 다시 만난 너희들을 힘들게 뛰어다니게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유골더미 위에 앉은 보르파는 손 아래로 두개골 하나를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헌데 그런 보르파의 얼굴에는 뭐가 처음 나타날 때와 같은, 도망갈 때와 같은 그런 자신만만함 같은 게 나타나있었다.
그것은 꼭 만화에 나오는 악당이 새로운 무기를 들고 처음 등장할 때와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그런데 저기 저 보르파 녀석은 아는가 모르겠다. 항상 지고서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건 언제나 악당 쪽이라는 걸 말이다.
천화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에 미소를 띠고서 보르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천화에게 한번 당한 바 있던 보르파에게 어떤 이유에서든지 천화가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을 리가 없는 것.
보르파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표정은 천화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뭔가….. 즐거운 일이라도 있나 보지?”

천화는 화나는 걸 참는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보르파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것이 저 보르파 녀석만 보면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 별건 아니고…. 널 보니까 자꾸 만화 속 악당들의 모습이 생각나서 말이야….”

“…. 뭐?”

갑작스런 천화의 말에 보르파는 알아듣지 못하고 이상한 눈으로 천화를 바라보았다.
허기사 도플갱어가 마족으로 진화해서 TV를 볼 일은 뭐 있었겠는가.
하지만 가디언 중 눈치 빠른 몇 사람은 곧 천화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킥킥대고 있었다.
가디언들에게도 보르파는 긴장감 있는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천화는 주위 사람들까지 자신의 말에 웃기 시작하자 보르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마 다른 가디언들의 모습에서 방금 자신의 말이 그에게는 별로 좋지 못한 말이란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리고 보르파의 화가 터지기 직전, 천화가 입을 열어 그를 불렀고, 보르파는 순간 올라오던 화를 억지로 꿀꺽 삼켜야 했는데, 그 모습이 또한 재미있었다.

“이봐, 보르파. 우릴 언제까지 여기 그냥 세워둘 꺼야?”

“큭……. 무슨 소리냐? 꼬맹이…”

“꼬맹이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천화라고 불러. 그리고 너 머리 나쁘냐? 네가 아까 전에 나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분명히 휴라는 놈과 인사 시켜 준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기억 안 나?”

“아, 그, 그건…”

“그건? 그건 뭐? 말을 해야지 알아듣지.”

천화는 보르파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질문에 당황하는 듯 하자 대답을 재촉해댔다.
하지만 천화의 재촉에 말을 잊지 못한 보르파는 쉽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두 주먹만 꼭 말아 쥔다가 한순간 양손을 앞쪽으로 떨쳐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보르파의 양팔을 따라 남색의 마력들이 주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아무런 기척도 발견할 수 없었던 그곳의 구석구석에서 무언가 뚫고 나오려는 듯이 땅이 들썩였다.
또 차라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보르파가 올라앉아 있던 유골 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하나하나 자신들의 뼈를 찾아 모이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에 자신이 앉아 있던 유골 산이 무너졌음에도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던 보르파가 천화들을 바라보며 그런대로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크크크크… 잘해봐. 휴님은 함부로 뵐 수 없는 분이지만 너희들이 시험에 통과하면 뵈올 수 있게 해주지. 물론, 그때 가서도 그러고 싶다면 말이야.
가라. 안식 없는 암흑을 떠도는 자들아. 저들이 너희들이 시험해야 할 자들이다.”

보르파의 말 뒤에 붙은 주문에 어느새 인가 모습을 갖춘 해골병사들과 땅을 뚫고 나온 수십의 좀비들이 서서히 천화와 가디언들을 목표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특히 해골병사들의 경우 한쪽 팔의 뼈가 기형적으로 변해 마치 단검이나 에스터크처럼 변해 들려 있었다.
천화와 가디언들을 골을 띵하게 만드는 고약한 냄새와 함께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의 모습에 검을 들어 올렸다.
보기엔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질 것처럼 느릿느릿 걸어오는 좀비와 나무막대를 풀 스윙으로 휘두르기만 해도 모두 부서져 산산이 흩어질 것 같은 해골병사들이었지만,
저것도 어디까지나 몬스터. 그것도 마족에 의해 되살아난 녀석들이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쉽게 제압하는 것은 택도 않 되는 소리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일행들에겐 그렇게 큰 긴장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점을 눈치챈 천화가 이상하다는 듯이 아홉 명의 사라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고염천이 앞으로 나서며 목검 남명을 허리에 찔러 넣고 옆구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수장의 연홍색 부적을 꺼내 양손에 나누어 쥐었다.

“훗, 언데드라…. 이것 봐. 초보 마족. 이 시험 우리들의 편의를 너무 봐주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우리야 좋지만 말이야.
세이아, 신우영, 이태영, 딘. 아무래도 전공 분야가 나온 것 같다. 언데드 전문 처리팀. 앞으로.”

“넵, 하하하….. 근데 저 녀석 어째 시험 종류를 골라도 어째 우리들에게 딱 맞는 걸 골라 준 거지?”

걱정거리가 싹 가신 듯한, 아니 괜히 걱정했다는 듯한 분위기로 명령하는 고염천의 말에 이태영이 뱀파이어에 대한 걱정은 어디다 갔다 버렸는지 큰 소리로 대답하며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본 천화는 나직히 고염천이 했던 말 중 하나를 입에 담았다.

“언데드 전문 처리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는 생각에 고염천과 그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나서는 가디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한 손에 쏙 들어갈 정도의 작은 은백색의 십자가를 든 세이아의 모습과 유백색으로 물들어 가는 그녀의 손과 십자가와 주위에 일어나는 기운들을 느낀 순간 천화는 언데드 전문 처리팀이란 이름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세이아를 비롯한 네 사람만을 부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 네 사람, 아니 고염천 그를 비롯한 다섯 사람은 좀비나 해골병사 같은 것에 있어서는 거의 천적에 가까웠던 것이다.
좀비와 해골병사들은 모두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존재들이다. 죽은 후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자들이 이 세계에 남아 죽어버린 몸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분명히 신의 뜻을 거스르는 역천(逆天).
때문에 그런 그들에게 신의 힘, 신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둘도 없는 천적인 것이다.
헌데 이 자리에 그들의 천적이 되는 존재가 넷-물론 그 중 하나는 상당히 불안하지만 말이다.-이나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때에 따라 신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신력과는 또 다른 힘으로 좀비와 같은 악한 기운을 고, 소멸시키는 일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자 하나.
더구나 위험한 상황에 나서줄 동료들도 있는 상황, 이 정도가 되면 수십의 몬스터라도 긴장될 게 없는 것이니….. 보르파 녀석이 안됐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잠시 후 좀비들과 해골병사들이 사정권 안에 들자 고염천의 커다란 기합성과 함께 나머지 네 명의 공격이 이루어졌다.

“상대를 잘못 찾았다. 신령스런 불꽃이여….. 남명신화(南鳴神火)! 우(羽)!”

순간 고염천의 양손에서 뿌려진 다섯 장의 부적이 연홍색의 불길에 휩싸이며 하나하나가 좀비와 해골병사들에게 쏘아져 나가 그들을 불태웠다.
이어 고염천의 양옆으로선 네 사람의 공격이 시작되자 여기저기 시체들이 타기도 하고 녹아들기도 하며 순식간에 이십여 구의 좀비와 해골병사들이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공격에 이십 구, 다시 이어지는 공격에 이십여 구의 시신이…… 상당히 통쾌하고 속 시원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 보르파는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놀란 나머지 허공에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땅에 떨어져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 이런….. 어떻게 저런 놈들이….. 크윽….”

저 정도의 좀비와 해골병사들로 천화 일행을 쉽게 제압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힘은 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보르파로서는 황당한 광경이었다.
어떻게 된 빌어먹을 놈들이기에 사제에 성기사 둘, 그리고 전문적으로 언데드들을 상대할 수 있는 술법자가 두 명이나 같이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신경을 바짝 써대던 보르파는 마족이 되고 나서 처음 머리가 욱씬 거리는 두통을 앓아야 했다.
전투현장을 넘어 그런 보르파의 모습을 본 천화는 쯧쯧하고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큰소리로 보르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쯧쯧 안됐다. 보르파. 하지만 어쩌겠냐. 재수 없다고 생각해야지. 그러니까 우리들 그냥 통과 시켜 주고 그 휴라는 놈이나 만나게 해줘.
그리고 그 휴라는 녀석도 너한텐 크게 기대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 맙소사 저게 어디 위로하는 것이란 말이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보르파를 보기만 하면 놀리고 싶은걸…..
왠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전투 분위기가 진지해지지 못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크아~~~ 이 자식이…..”

천화의 격려를 들은 보르파는 자신이 언제 힘없이 앉아 있었냐는 듯 벌떡 일어나서는 곧바로 전투현장으로 튀어들듯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런 보르파의 모습을 천화 옆에서 지켜보던 강민우가 정말 불쌍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천화를 올려다보았다.

“우~ 형 정말 못됐어. 저 마족이 불쌍하다. 불쌍해.”

그러나 그 말에 천화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쯧, 나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저 녀석이 너무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말이야. 방금 말도 저절로 튀어나온 거라니까….”

“어휴~ 그 말을 누가…. 응? 형, 저기 저 녀석….. 오다가 섰는데요.”

천화도 강민우가 말하기 전에 보고 있었으므로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위 상황은 완전히 잊고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던 보르파가 누가 붙잡기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 그 자리에 딱 멈춰 서버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흥분으로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까지 안정을 찾은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번하더니 간간히 고개까지 끄덕이는 것이…

“누구랑 대화하는 것 같단 말이야…..”

“꼭 무슨 말을 듣고 있는 표정인데……”

한순간 같은 의견을 도출해 낸 천화와 강민우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보르파에게로 시선이 돌려진 천화의 입이 가볍게 열렸다.

“저 녀석과 대화할 놈이라면……..”

“….. 그 휴라는 보르파보다 위에 있는 중, 상위 마족이겠죠.”

같은 의견을 도출해 낸 천화와 강민우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보르파는 누군가와의 이야기를 마친 듯 천화를 슬쩍 노려보고는 얼음 위에서 저절로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걸이로 뒤로 쭉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천화는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를 제대로 잡아 쥐고는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지?”

천화의 말에 강민우 역시 곧바로 염력을 쓸 수 있도록 하려는 건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그런 두 사람의 분위기에 한창 다섯 명의 전투를 관전하고 있던 남손영 등이 무슨 일이냐는 듯이 물으러 다가왔지만 곧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각자의 무기 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붉은 벽이 있는 곳까지 물러선 보르파는 기사들처럼 한쪽 무릎만을 굽혀 자세를 낮추더니 양손을 검붉은 빛이 도는 귀기스러운 땅바닥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천화가 설마 하는 사이 양손은 그대로 땅속에 녹아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좀비에게로 날아드는 신우영의 화살 같은 부적이 중간에 불쑥 튀어나오는 굵직한 기둥 같은 것에 의해 막혀 버리는 것이었다.
그에 이어 성력이 담긴 검을 휘두르던 딘도 갑자기 자신 앞에 튀어나오는 붉은 기둥에 아연하여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 모습에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강민우가 천화를 째려보며 투덜거렸다.

“으이구….. 하려면 적당히 하지. 이게 뭐야. 쉽게 넘어갈 수 있었는데, 괜히 벌집을 쑤셔놓은 경우가 됐잖아.”

“……”

강민우의 말에 천화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강민우의 말 그대로 자신이 좀 많이 놀려대긴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자신이 왜 그렇게 상대의 신경을 긁어댔는지 모를 일이다.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저 보르파 놈만 보면 아무 이유 없이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이 사람들 놀려대는 녀석들이 이런 기분에 그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었던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은 짓이라 그런지 치고 빠지고, 조였다 풀었다 하는 능숙함이 없이 계속 조여대기만 한 덕분에 결국 보르파 녀석의 화가 터져버렸고 지금과 같이 잘나가던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음에도 왠지 자신 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천화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놀려대고 싶게 만드는 보르파 놈 때문이란 생각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된다면 저 보르파 녀석을 사로잡아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기분인기 알아봐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해볼 일이고 지금은 고염천 등 다섯 명을 막아서고 있는 붉은 기둥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이기에 강민우의 뒤를 따라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전투가 한창인 곳 바로 앞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걸음을 내디디는 천화의 한쪽 발에 한순간 딱딱해야 할 땅이 폭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마 저 보르파 녀석이 땅을 이용하는 기술을 사용할 때는 사용할 부분이 부드럽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천화는 따로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들고 있던 몽둥이를 땅에 박아 넣으며 검기를 내쏘았다.
이미 한번 경험한 바로는 상당히 빠른 속도라 완전히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바로 앞에 강민우가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피해버리면 그 공격은 자연스레 강민우를 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차핫!!”

푸쉬익……

천화의 검기에 미쳐 공격해 보지도 못한 보르파의 마기는 모닥불에 물을 뿌렸을 때처럼 힘없는 소리와 함께 소멸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 기운이 있었던 흔적인 듯 오목하게 살짝 꺼져 들어갔다.
그렇게 상황이 끝나고 천화가 목검을 빼낼 때서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강민우는 살짝 꺼져 있는 땅을 바라보고는 천화를 향해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 하. 고마워요. 형…..”

“당연한 거지. 그나저나 땅이 물렁해지면 조심해 그곳으로 뭔가 튀어오르니까.”

강민우에게 주의할 점을 말해준 천화는 강민우와 함께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고염천을 비롯한 언데드 전문 처리팀에 의해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하고 있던 좀비들과 해골병사들이 천화와 강민우 등 새로 합류하는 가디언들을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도 가디언. 단지 고염천들과 같이 언데드를 공격하기 알맞은 공격 방법이 없다 뿐이지 절대로 좀비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그들에게 달려들던 좀비들과 해골병사들은 바람에 날려가기도 하고, 푸짐한 몸집의 팽두숙에게 달려들다 튕겨 나가기도 했으며, 남손영이 쏘는 은으로 제조된 특수 총알에 맞고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편 강민우와 같이 행동하고 있는 천화는 주위를 둘러보며 상당히 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터.져.라.”

염력을 쓸 때마다 사용하는 딱딱 끊어 내는 외침과 함께 강민우를 중심으로 생성된 강력한 기운이 엄청난 기세로 주위로 퍼져 나가며 강민우와 천화에게 다가오려는 좀비와 해골병사들 전부를 저 멀리 튕겨내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손을 쓰기도 전에 주위가 깨끗하게 정리되니…. 편안한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마냥 놀고만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천화는 시야를 넓혀 저쪽 기분 나쁜 기운을 뿜고 있는 벽 앞에 앉아 있는 보르파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이 빨간 기둥들을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 그것만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지자 행동은 순식간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들려진 천화의 손가락 끝에서 찬란한 황금빛과 쩌어엉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일었다고 느낀 순간 금령원환지는 이미 보르파 앞 십 미터까지 접근해 가고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력을 보고서도 보르파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피할 생각을 하지 않을 뿐더러 멀뚱히 자신에게 뻗어오는 지력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황당한 모습에 뭔가 한마디하려고 입을 열던 천화였다.
그러나 곧 이어 벌어지는 현상에 표정을 굳혀버렸다.
금령원환지가 보르파 앞 오 미터 정도에 도달했을 때였다.
보르파의 등 뒤에 버티고 서 있던 붉은 색의 벽에서부터 혈향(血香)이 감도는 듯한 붉은 기운이 뻗어 나와 보르파를 보호하며 금령원환지를 막아낸 것이었다.

푸스스스…..
타땅…..

천화는 날카롭게 울리는 금속성을 들으며 붉은 기운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려 했지만 금령환원지를 막아낸 그 기운은 제일을 마쳤는지 금세 붉은 벽 속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붉은 기운 사이로 보르파가 그런대로 능글맞은 웃음을 흘려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천화와 싸우면서 우연히 붉은 기운을 목격한 가디언들의 눈에는 그 붉은 기운만이 들어올 뿐 보르파의 그런 웃음은 눈에 차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인 고염천은 확인을 위한 것인지 손에 쥐고 있던 연홍색 부적 석장을 허공에 흩뿌렸고, 순간 연홍빛으로 타들어가던 부적들을 빠른 속도로 보르파를 향했다.
하지만 이번 것 역시 보르파 앞 오 미터 지점에서 붉은 기운에 막혀 사라지고 말았다.
한번 더 그 기운을 확인한 천화는 고염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그 휴라는 놈. 저 벽 뒤에서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군. 그렇다면…..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지.”

고염천의 천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에 들고 있던 부적 십 여 장을 쥐로 뿌렸다.
하지만 그 중 거의 반이 중간에 튀어나온 붉은 기둥 때문에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고염천은 그 모습을 보며 주위의 상황을 확인했다.
이미 처음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던 좀비와 해골병사들의 수는 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양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중간중간에 공격의 절반을 중간에서 막아서는 놈까지 더해진 덕분에 처리 속도가 더욱 늦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저 벽 뒤에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휴라는 놈이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뭔가 문제가 있어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가디언들에게 별다른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좀비와 해골병사들은 시간 끌기용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은 곧 시간만 있다면 그 휴라는 마족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이 해결된다는 뜻도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되자 더 이상 이곳에서 시체를 상대로 시간을 잡아먹힐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시간만 잡아먹을 순 없다. 세이아와 강민우, 선우영과 팽두숙 네 사람은 이곳을 맞고, 나머지는 저 초보 마족 놈과 그 뒤에 있는 벽을 맞는다. 길은 내가 열 터이니 따라와라. 남명분노화(南鳴噴怒火)!”

화아아아아…..

언제 다시 빼들렸는지 기세 좋게 앞으로 내뻗어지고 있는 고염천의 손에는 목검 남명이 들어앉아 연홍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뻗어지던 움직임이 멈추었고, 고염천의 팔이 모두 내뻗어졌다고 생각될 때 그의 입에서 나오는 기합성과 함께 목검 남명으로부터 드래곤의 입에서 불이 뿜어지는 것처럼 뿜어져 나온 연홍색 불길이 고염천 앞에 버티고 서있던 좀비들과 해골병사들을 덥쳤다.
순간 마치 용광로의 불길과 같은 뜨거움이 주위를 감싸안으며 좀비들과 해골병사들의 몸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하며 부셔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쭉 뻗어 나간 연홍의 불길에 고염천 등의 앞으로 막고 있던 좀비와 해골병사들의 일부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에 갑작스런 내력의 소모를 심호흡으로 충당하던 고염천이 몸을 날리며 뒤쪽에 서있는 사람들을 불렀고, 고염천의 무력에 감탄을 표하던 가디언들도 두말 않고서 고염천의 뒤를 따랐다.

“휴~~ 역시 대장. 언제 봐도 굉장한 실력이라니까. 후끈후끈 하구만….”

이태영은 고염천이 열어놓은 길을 달리며 주위에 까맣게 타들어 간 좀비와 해골병사들의 시선을 보며 말했다.
이미 연홍의 불길은 사라졌지만 아직 잔존하는 열기만으로도 사우나를 방불케 할 정도로 후끈후끈 했다.
과연 이런 불길에 얻어맞았으니, 좀비와 해골병사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 이해가 됐다.
이태영의 말에 옆에서 달리던 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얼굴은 마냥 편해 보이지 많았다.

“확실히 굉장해. 하지만, 그만큼 내력의 소모도 크셨을 꺼야….. 휴라는 놈과 상대하기 전까지는 너하고 내가 앞장서야겠다. 대장의 내력을 더 이상 소모시킬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물론, 맡겨 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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