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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44화


“물론, 맞겨 두라구….”

이태영은 딘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이고는 딘과 함께 달리는 속도를 더해 고염천의 양옆으로 붙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고염천이 움직이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움직이려는 생각에서였다.
고염천 역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슬쩍 미소를 띠며 달려나가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그들의 모습에 뒤쪽에서 남손영을 업고서 가부에와 나란히 달리고 있던 천화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에 맞게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이 매우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호흡이 척척 맞는구나.”

천화의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천화의 등에 업혀있던 남손영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였는지 남손영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자랑스러운 듯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그렇지? 우리 염명대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이거든. 각자 가진 실력도 실력이지만, 오랫동안 같이 싸우고 움직여온 덕분에 호흡이 척척 맞아 최고의 팀웍을 자랑하고 있지. 그러니까 천화 너도 정식 가디언이 되거든 우리 염명대로 들어와라. 이미 안면도 있겠다 실력도 봤겠다, 네가 들어오겠다면 우리는 언제나 환영이다.”

천화는 자부심 가득한 남손영의 말에 자신까지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정식 가디언이 되면 이쪽으로 올게요.”

“그래, 그래. 네가 와야 나도 이렇게 편하게 업혀 다니지….. 하하하… 도대체 어떻게 달리길 내가 업혀있는데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 거냐? 태영이나 딘 녀석이 업을 때는 상당히 불안했는데 말이야.”

부운귀령보로 부드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천화는 그 말에 푸석하게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장난스레 남손영을 째려보았다.

“설마, 그것 때문에 절 염명대로 오라고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하하하하…..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이렇게 달릴 때는 태영이나 딘 녀석에게 업혀야 되는데 그게 얼마나 불편하겠냐? 그런데 이렇게 편안한 등에 업히다니…. 이건 마을버스를 타다가 고급 승용차로 바꾼 느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란 말이야. 그보다 앞을 보고 달려라. 이런 속도로 달리다 뭐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디 한군데는 부러지겠다.”

“그렇게 불안하시면 내리시구요.”

천화는 남손영의 말을 그렇게 받은 후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앞쪽에 적이 있으니 계속해서 한눈을 팔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천화의 금령원환지나 고염천의 남명화우 같은 원거리 공격에는 본 척도 안 하더니,
가디언과 천화들이 직접 달려오자 불안했던지 제일 앞서 달려오는 이태영과 딘의 앞으로 기갑병들에게 주로 쓰는 방법처럼 흙으로 된 창을 생성시켜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을 상대할 때의 수법이다.
말이라면 자신의 몸무게와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꼼짝없이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찔렸겠지만,
지금의 상대는 인간. 그것도 엄청난 능력을 가진 가디언들이었다.
눈앞으로 갑자기 솟아오른 창에 딘은 몸에 강한 회전을 주어 토창을 살짝 피해버렸고,
이태영은 달려나가던 속도 그대로 검을 휘둘러 토창을 부셔버렸다.
참으로 두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모습이라 하겠다.

“하하하…. 이봐 초보 마족씨. 이 정도 공격밖에는 못하는 모양이지?
방금 전엔 우리 공격을 중간에 잘도 막아내더니만…. 혹시 빨리 움직이는 상대를 공격할 능력이 없는 거 아니야? 하하하….”

보르파와 약 십오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춘 이태영이 보르파를 보며 큰소리로 웃음을 흘려 보였다.
천화는 그 웃음에 어쩌면 저 보르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놀리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어버리고는 가부에와 속도를 맞추어 고염천의 옆으로 다가서며 업고 있던 남손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때 다시 뭐라고 소리치려는 이태영의 입을 딘이 급히 틀어막았다.

“네, 그런 실력으롭 음… 읍….”

“하아~ 그만 좀 해 그만 좀. 너 정말 성기사 맞냐? 상대가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그렇게 놀려대는 게 어디 있냐?”

“쳇,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 짠맛 나는 손 좀 치워라…”

“어? 어… 엉…. 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자신의 손을 간신히 떼어 내며 말한 이태영의 말에
딘은 얼굴을 벌겋게 만들어서는 헛기침을 하며 급히 이태영의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곤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고는 보르파를 경계하며 고염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험…. 대장, 이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 마족에 대한 직접 공격입니까?”

고염천은 딘의 말에 남손영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고염천의 시선을 받은 남손영이 고염천 대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진짜 목표는 저 붉은 벽과 그 뒤에 있을 휴라는 놈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기 저 보르파라는 마족부터 치워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러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태영이 손에 든 검을 치켜들고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남손영은 성질 급한 놈이라고 말하며 급히 그의 뒷덜미를 붙잡아서는 당겨 버렸다.
덕분에 한순간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이태영의 눈길을 받았지만 싸그리 무시해 버리고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너무 서두르지 말아. 될 수 있으면 쉽게 저 놈을 치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무턱대고 검부터 들고 덤빈다고 될 일이 아니야.
게다가 천화와 대장의 공격을 가로막은 그 붉은 결계 같은 것도 어떤 건지 알아봐야 할 거 아냐.”

남손영은 그제야 자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태영을 보며 나직한 한숨과 함께 품에서 세 개의 보석, 쥬웰 익스플로시브를 꺼내 보였다.
각각 순수한 마나의 기운을 담은 수정과 불꽃의 기운을 담은 루비와 얼음의 기운을 담은 문스톤이었다.
남손영은 꺼내든 세 개의 쥬웰 익스플로시브를 이태영에게 건네며 보르파를 가리켰다.

“던져봐. 단, 한꺼번에 던질 생각하지 말고 우선은 수정만 던져봐.”

이태영은 그 말에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땅에 푹 꼽아놓고는 세 개의 보석 중 수정을 골라들고 손위에서 몇 번 굴리더니 불안한 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보르파가 대처할 수 없도록 기습적으로 집어 던졌다.

“난 이 쥬웰 익스플로시브를 던질 때면 항상 아까워. 이게 얼마 짜린데…. 핫!!”

이태영의 손에서 엄청난 속도로 던져진 보석은 작은 크기임에도 그 이태영의 던지는 속도와 힘 때문에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일직선을 그으며 순식간에 보르파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보르파 앞 오 미터쯤에서 갑자기 형성된 붉은 기운에 부딪혀 폭발했을 뿐, 보르파 녀석의 머리카락 하나도 날리지를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손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다가 붉은 기운이 서서히 옅어지려 하자 이태영을 향해 소리쳤다.

“루비를 던져.”

이태영은 그 말에 곧바로 루비를 집어들어 냅다 집어 던졌고 같은 식으로 문스톤까지 집어 던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붉은 기운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보르파는 익숙해졌는지 불안하던 표정을 지우고 느긋한 표정을 찾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붉은 기운은 다시 서서히 옅어지면서 벽 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남손영은 고염천 등을 돌아보았다.

“저거……. 엄청 단단한데요.”

“………”

남손영이 고개를 돌리기에 뭔가를 알아냈나 해서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모두 눈으로 확인한 사실을 심각하게 말하자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보석을, 쥬웰 익스플로시브를 세 개씩이나 사용하고 알아낸 게….. 그게 다는 아니죠?”

황당하다는 이태영의 물음에 그제서야 다른 가디언들의 얼굴 표정을 알아본 남손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버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저 붉은 기운은 일종의 보호막,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호신강기와 같은 것 같다. 물론 그 주인은 그 휴라는 녀석일 테고 말이야.
하지만, 그 녀석에게서 나온 기운은 저 벽을 지나면서 일종의 결계의 성격을 띠는 것 같아. 모두 보이겠지만, 문에 새겨진 문양들이 일종의 마법진 역할을 해서 보호막을 결계로 바꾸는 거지.”

그의 말에 일행들은 시선이 보르파를 지나 그의 뒤에 버티고선 붉은 벽을 향했다.

“…. 그런데, 그 휴라는 마족이 힘을 쓴 거라면 왜 직접 나서지 않는 겁니까?”

벽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던 딘이 남손영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질문엔 남손영도 머리를 긁적일 뿐 정확한 답을 해주진 못했다.

붉은 기운이 벽에서 뿜어지고 형성되어 결계를 만들고 다시 거둬지는 모습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것 까진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 생각엔 아직 움직이지는 못하는 모양이야. 그러니 아직까지도 나서지 않는 것일 테고…. 그러니 지금이 기회야. 저런 기운을 가진 놈에게 시간을 더 줄 수는 없어. 빨리 놈을 끌어내야 되.”

“쳇, 그렇지만 저 녀석을 공격할 때마다 결계가 처지는 건 어쩌고요.”

남손영은 이태영의 말에 고개를 저어 보이곤 보르파가 아닌 그 뒤에 커다란 벽을 가리켰다.

“저 보르파란 마족은 무시하고, 저 벽을 직접 노려. 보르파의 공격은…… 천화 네가 좀 막아줘야겠는데, 괜찮겠지?”

“가뿐하죠.”

“좋아. 대장,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서둘러요.”

고염천은 남손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 든 남명을 고쳐 잡았다.

“알았어. 확실하게 부셔주지. 그리고 천화야. 우리는 밑에서 올라오는 공격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잘 부탁한다.”

천화는 그 말이 보르파의 모든 공격을 철저히 막아달라는 뜻임을 알고 보기 좋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일행들의 앞으로 나서서 보르파의 정면에 섰다.
그런 천화의 귀로 다시 고염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가자. 밑에서 올라오는 공격은 없을 테니 최대한 빨리 벽을 부순다.”

“넷.”

천화가 이태영의 대답이 가장 컸다고 생각할 때 등 뒤에서부터 가공할 기세의 공세들이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연홍빛의 바람을 타고 질주하는 불꽃과 어깨동무를 하고 날아드는 맑은 푸른색의 검기와 유백색의 검기들…. 가히 집 세네 채는 가뿐히 날려 버릴 정도의 기운들이었다.
그런 힘을 저쪽에서도 느꼈는지, 붉다 못해 검붉은 기운들을 토해내어 마치 한쪽 벽면을 완전히 가린 커튼을 친 것처럼 그 모습을 가려버렸다.
순간 검붉은 결계의 기운과 가디언들이 토해낸 기운이 부딪치며 굉렬한 폭음과 충벽파를 뿜어댔다.
하지만 그런 파괴력에도 검붉은 기운의 결계는 한차례 흔들리기만 했을 뿐 여전히 일행들의 앞에 당당히 버티고 서있었다.

“간단하게 끝날 거란 생각은 안 했지. 다시 간다. 남명쌍익풍(南鳴雙翼風)!!”

지하 광장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염천의 외침과 함께 다시 한번의 공격이 시작되는 모습을 땅에 박아둔 몽둥이에 기대어 보고 있던 천화는 한순간 뭘 느꼈는지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땅에 박아둔 검을 한쪽으로 스륵 밀며 뽑아 들었다.
그러나 그런 가벼운 동작과는 달리 몽둥이가 땅에서 빠져 나오며 그 끝으로 뿜어낸 강맹한 기운은 땅속이 비좁다는 듯이 땅을 헤치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

“역시 초보 마족이야. 기운이 너무 쉽게 읽힌단 말이야. 대지일검(大地溢劍)!”

천화의 몽둥이로부터 곧게 뻗어 나가 던 강맹한 기운은 어느 한 지점에서 벽에라도 부딪힌 듯 묵직한 폭음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천화는 그 모습을 보며 검붉은 커튼이 쳐진 곳을 바라보았다.
아마, 보르파란 마족 꽤나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공격이 가던 길목에서 차단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몽둥이를 다시 땅에 꽂아 넣던 천화는 다시 가디언들을 향해 뻗어오는 다섯 가닥의 기운에 땅에 그림이라도 그리는 것처럼 몽둥이를 이리저리 흔들며 뽑아내자 몽둥이가 지나갔던 지점을 기점으로 다섯 개의 기운이 뻗어 나갔다.
또 뻗어 나간 기운은 어김없이 무엇엔가 부딪혀 사라지길 몇 번.
막 또 한번의 대지일검을 떨쳐 내고 다시 몽둥이를 땅속에 박아 넣던 천화는 푸화악 하는 무언가 시원하게 찧어지는 소리와 함께 컴컴하던 하늘이 활짝 개이는 기분에 급히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그런 천화의 눈에 한쪽 벽면 전체를 검붉은 장막이 뒤덮고 있던 기운이 중앙부위부터 불타 없어지듯이 사라지는 모습과 그 장막을 지나 뻗어간 가디언들의 공격이 붉은 벽의 중앙부분을 강타하는 모습, 그리고 붉은 벽이 부서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쿠아아앙…… 쿠구구구구…..

그리고 그렇게 부서져 내리는 벽 사이로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산산이 부서져 가는 보르파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천화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깊게 심호흡을 하는 네 사람이 미소 짓고 있었다.

“성공하셨네요.”

“후~ 그래, 다른 건 신경쓰지 않고 강공을 펼쳤으니 깨지는 건 당연하겠지. 그나저나 너도 잘해줬다.”

“헷, 뭘요.”

고염천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던 천화의 곁으로 고염천등이 다가왔다.
그 중 이태영이 무너지고 있는 벽을 바라보더니 다시 천화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초보 마족 녀석은 어디 있는 거야? 우리가 공격에 성공하자 마자 피한 건가?”

천화는 이태영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무너져 내리는 벽 아래에 그대로 서 있던 보르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별다른 걱정이 되지 않는 천화였다.
보르파의 주특기가 땅 속, 돌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니…. 돌에 깔려도 아무렇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에 천화는 본대로 또 생각한대로 이태영에게 말해 주었다.

“헛, 이상한 녀석이네. 그래도 잘못해서 깔리면 꽤나 중상을 입을 텐데….. 뭐, 내 상관은 아니다만….”

이태영이 무너져 내린 돌 더미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 사이 이들에게 남손영이 다가왔다.
그도 결계에다 쥬웰 익스플로시브를 꽤나 던졌었는지 오른쪽 팔을 빙글빙글 돌려 대고 있었다.

“자, 자…. 이렇게 한가하게 수다 떨 시간 없어. 휴라는 놈도 결계가 깨지면서 충격을 받았을 테니, 지금 이 기세 그대로 쳐들어가야 되.”

일행들은 남손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들이 무너트린 벽을, 아니 벽이 있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붉은 색에 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던 그 벽의 지금 모습은 깨어진 유리창과도 같았다.
가디언들의 공격이 정확하게 들어갔던 벽의 중앙부분은 완전히 날아가 보이지 않았고,
그 아래로 삼 미터 정도의 넓이로 무너져 내려 만들어진 통로에는 돌무더기가 수북했으며,
제법 멀쩡하게 모습을 형성하고 있는 부분들도 크고 작은 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 마디로 정말 볼품없게 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뻥 뚫린 부분으로부터는 지금 천화와 가디언들이 서 있는 곳보다 훨씬 밝은 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으며,
그 사이로 정확하진 않지만 보이는 모습은 새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거대한 하나의 홀처럼 보였다.

“저기 들어가기 위해 그만큼 고생했는데…. 들어가 봐야죠. 자, 가자 천화야. 이번엔 너하고 내가 앞장서는 거다.”

벽 안쪽을 바라보며 서 있던 천화는 이태영이 자신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태영 옆에 서 일행들의 제일 앞쪽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중앙 부위에서 아래로 무너져 내린 모습의 문은 사람 세 명이 한꺼번에 드나들어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너질 때 쌓인 돌과 먼지로 인해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일었고, 옮겨갈 때마다 무언가 돌덩이들이 천화의 발끝에 차여 나뒹굴었다.
그때 천화의 발끝으로 또 하나의 돌맹이가 차여 굴렀다.
천화는 그 모습을 보며 길을 좀 치워야겠다고 결심하고는 몽둥이를 들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들려오는 듣기 좋은 가부에의 목소리와 여러 부산물들이 양옆으로 밀려나는 모습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대 정령들이여, 그대들에게 항상 편안한 길이듯 나에게도 항시 편안한 길이길…. 나의 길이 안락하기를….”

쿠르르르 하는 수리와 함께 크고 작은 돌들과 부스러기들이 양옆으로 밀려나는 모습에
천화는 뒤쪽에 있는 가부에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이곳에서 나간 후에 정령을 불러봐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천화였다.
이 세계에 와서 이것저것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것이 많아 정령들을 소환하지 않아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
그건 일상 생활에서 적용되는 일일 뿐인 모양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벽을 지난 두 사람은 주위를 경계하며 벽 안쪽의 광경을 시야에 한가득 퍼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똑같이 놀란 얼굴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아야 했고, 그것은 그 뒤에 들어선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홀 안은 바닥과 천정, 그리고 사방의 벽들이 대리석, 그것도 뽀얀 것이 최고급품으로 보이는 대리석으로 온통 둘러싸여 치장되어 있었다.
심지어 유일한 출입구로 생각되는 일행들이 부순 거대한 벽마저도 새하얀 순백색을 띠고 있었는데,
부서진 단면을 보아, 일행들이 본 붉은 색도 색칠해 놓은 것인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홀 안의 외진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보석과 조각들을 생각하면,
이곳을 절대로 뱀파이어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차라리 하나의 신전이라고 하면 믿으려나?
만약 홀 안쪽에 놓여진 유백색의 책꽃이가 없었다면, 홀 중앙에 만들어진 제단과 그 제단 위에 놓여진 황금빛 관이 없었다면,
천화와 가디언들은 우리가 잘못 들어왔구나 하고 아무 미련 없이 뒤돌아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특히 중앙 제단에 놓인 황금빛의 관의 모습에 천화와 가디언들은 발길을 그쪽으로 옮겨갔다.
홀 중앙에 놓인 제단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단지 형식만 빌려 온 듯 한 모습으로 사람의 무릎 정도까지 올라오는 높이였다.
그러나 고만한 높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제단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아기자기할 정도로 만들어지기도 했거니와, 관이 올라가 있는 제단의 사면은 기하학적인 아름다운 문양으로 가득했는데,
그것은 관과 하나인 듯 그대로 연결되어 황금의 관을 뒤덮고 있었다.

잠시, 그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하던 천화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 한쪽에 있는 책장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뱀파이어 때문에 들어온 사람들 앞에 관이 있는 만큼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 열어…. 볼까요?”

황금관 만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냈을까.
가만히 있던 이태영이 원래의 그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그러나 고염천이나 남손영 두 사람 중 누구 한 사람도 시원하게 답을 해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 나름대로도 복잡할 것이다. 이걸 열어야 하는지 그냥 두어야 하는지….
처음 고염천과 남손영 두 사람이 이곳을 목표로 공격해 들어왔을 때 생각했던 건 절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밖에 싸여 있는 유골들과 벽에서 뿜어지는 붉은 결계의 기운으로 생각한 것은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마족의 모습이거나,
자신들에게 덮쳐오는 마족의 모습, 그런 것들이었지 이렇게 얌전하게 아름답게 꾸며진 황금관 속에 누워 있는 마족이 아니었다.
물론 위에서 생각한 식의 마족보다는 이렇게 관 속에 누워 있는 마족이 나았다.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관을 열어 보자니 괜히 잘 자고 있던 마족을 깨우게 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그를 분노하게 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덮어둘 수도 없는 것이, 혹시 마족이 이미 나와 있어 비어 버린 관일 수도 있고, 또 이 안에서 힘을 회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한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진 것이었다.

한편 가디언들이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고 있는 사이 천화는 반짝이는 시선으로 제단과 황금의 관을 뒤덮고 있는 무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단과 관이 그대로 이어지는 모습이 특이해 보였기에 그것을 바라보던 천화는 그 속에서 잔잔히 잠자는 호수의 물처럼 제단에서 관까지 이어진 무늬를 따라 흐르는 미약한 마나를 볼 수 있었다.
천화는 마나가 흐른다는 사실에 곧 그래이드론의 기억 창고를 열어 그 사이로 제단과 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화는 그 무늬가 일종의 독특한 마법진의 변형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효과는…..

‘마나의 안정. 마나의 안정이라…..’

천화는 그래이드론의 기억으로 풀이한 마법진의 효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진의 효과와 함께 떠오른 그 마법의 쓰임에 따르면 이 마법은 마법이 발전하던 초기에 만들어진 마법으로 고집강한 백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이라고 하는데,
이제 막 마법과 마나를 배워가는 마법사가 마나를 안정적으로, 또 순도 높은 마나를 모으기 위해 사용한다.
하지만 이 마법진을 사용할 경우 마나의 축척에 배나 많은 시간이 걸리기에 거의 사용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용 용도가 마법 물품에 마나가 안정되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사용한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뭐야? 이 마법을 첫 번째로 사용한 건가? 하지만 마족이 뭐 하러? 그럼 두 번째?
하지만 마족에게 이런 관 같은 마법 물품이 뭐가 필요해서….?’

왠지 고염천화 남손영 두 사람이 고민하는 것 이상으로 머리가 아파질 것 같은 천화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자신의 고민은 저 두 사람의 결정에 따라 저절로 풀릴 것이다.
뭐, 풀리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천화가 마법에 목숨 건 마법사도 아니고…..
궁금하면 궁금한 대로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황금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리는 천화의 시야에 저쪽 홀의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책꽃이가 들어왔다.
천화는 그 모습에 다시 고개를 돌려 얼굴 가득 ‘심각한 고민 중’이란 글자를 써붙이고 있는 가디언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겨 책꽃이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천화의 모습을 이태영이 보긴 했지만 별달리 말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홀 안에 적이라 할 상대도 없었고, 천화의 실력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눈앞의 문제가 더 급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책은 꽤나 많은데…..”

천화의 말대로 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책장엔 많은 책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충 잡아도 약 백여 권 정도는 되어 보이는 분량이었다.
그리고 그 중 위쪽에서부터 오십여 권의 책은 최근에 보기라도 한 듯이 깨끗했지만, 밑에 있는 나머지 오십여 권의 책들은 뽀얀 먼지가 싸여 있어 쉽게 손이 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천화의 손은 먼지가 쌓여 있는 책이든 그렇지 않고 깨끗한 책이든지 간에 어느 책에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 도대체 이게 어디서 쓰는 글이야?”

그랬다. 책의 표지에는 그 책의 내용을 알리는 듯한 제목이 써져 있었다.
그러나 벌써 윗줄에 있는 이십 권의 책을 빼보았지만 그 표지에 써있는 그레센 대륙의 글과 흡사해 보이는 언어는 천화 자신은 물론 그래이드론의 기억창고에서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쉽게 손을 뗄 수는 없었던 천화는 나머지 밑에 있는 책들,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는 책들까지 뽑아보았고
개중에는 혹시나 해서 표지 안의 내용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그만둘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맨 아랫줄에 꽂혀 있는 이십 권의 책 중 하나를 빼들었을 때였다.
묵직한 검은색의 한 획 한 획, 머릿속에 박히는 듯한 박력을 가진 윗쪽에 꽂혀 있던 책들과는 다른 글자의 책이었으나
천화가 모르는 글이란 점에서 똑같기에 그냥 꽂아 넣으려던 천화였다.
그러나 한순간, 무언가 아련히 떠오르는 기분에 꽂으려던 책을 다시 들어 표지를 넘겨 펴들어 그 안에 적혀 있는 글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래이드론의 기억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천화 자신의 기억 속에는 이런 글자를 본 일이 결단코 없었다.
천축어에 희한한 파자, 그리고 과두문은 본 적이 있지만 이런 글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면…..

“찾았다. 역시 그래이드론의 기억 속에 있구나…. 근데….
호오~ 마계의 언어라 이거지.”

그래이드론의 기억 속에서 그 글자가 마계에서 사용되는 것이라는 것이 떠오르자 천화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족이 있는 곳이니 만큼 마계의 글로 된 책이 몇 권 있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차원이 틀려서 신들도 틀릴텐데 마계의 언어가 같다는 건…
빛과 어둠의 근원은 하나뿐이기 때문인가?”

천화는 저번에 들었던 빛과 어둠의 근원이란 말을 떠올리며 마계의 글로 적혀진 책으로 눈을 돌려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몇 장을 읽고는 덮어 버렸다. 천화에게는 별 필요 없는 계약에 관한 글이기 때문이었다.
천화는 그 책을 다시 책장에 끼워 넣으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책을 빼내 들었다.
그리고 잠시 읽다가는 다시 끼워 넣고 다시 빼들고 그러기를 십 수 권,
다시 한 권의 책을 빼들어 표지를 덮고 있던 먼지를 걷어낸 천화는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표지를 넘겼다.
그러나 곧 눈에 들어오는 책의 내용에 천화는 눈에 이채를 뛰었다.
‘나는 지트라토 드레네크라…..’ 로 시작하고 있는 일기 같기도 한 이 책은 아무래도 저 관 속에 들어 누워 있는 마족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화는 고개를 들어 가디언들이 둘러싸고 있는 황금빛의 관을 바라보고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막상 읽으려니 책의 두께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저기 황금색 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 대충대충 읽어 내려가기로 하고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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