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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45화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저기 황금색 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 대충대충 읽어 내리기로 하고 책장을 넘겼다.

…… 나는 지트라토 드레네크라고 하며, 마계의 일원인 화이어 뱀파이어 일족의 한 명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난 우리 일족과 그리 잘 어울리지 못했다.
뱀파이어라는 족속들이 다양하긴 하지만, 그 중에서 우리 화이어 뱀파이어 일족은 모든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가장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헌데 나는 화이어 뱀파이어 일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일족의 그런 성격을 가지질 못했다.
오히려 가장 차분하고 냉정하다는 콜드 블러드 뱀파이어 일족보다 더하다고 할 정도로 잔잔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몸이 약한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우리 일족에게서 특이한 눈길을 받았었다…….

…….. 오늘 드디어 우리 일족으로부터 홀로 섰다.
이미 충분히 홀로 서서 어둠을 다스릴 수 있을 나이였고, 나의 성격상 나의 일족과 어울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계속 마을에 남게 된다면 서로 마찰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그래도 서로 감정이 좋을 때에 떠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다음에 만나더라도 웃으면서 서로를 다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이 길로 침묵의 숲으로 향할 것이다.
조용한 그곳으로 내가 어린 시절 책을 읽던 그곳으로……

…….이곳은 뱀파이어 로드인 로디느 하후귀 님의 성이다.
몇 일 전 그분이 성의 일을 맡을 뱀파이어를 찾으셨고, 그때까지 내 성격을 기억하고 있던 우리 일족의 족장이 날 소개한 모양이다.
그리고 화이어 뱀파이어이면서도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 흥미를 끌었는지 나는 그날 바로 이곳으로 호출 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늘까지 이곳의 일을 배우고 있다…..

…….힘들다. 내가 이곳에서 일한 것이….. 후훗… 백년이 넘었구나.
백년 동안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
딱딱한 이곳, 항상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젠 다시 조용히 책을 읽을 침묵의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

… 하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몇 일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벌써 한 달이 되었나? 나는 그때 천사들을 만났다.
천계의 사절로 온 그들….. 그들의 분위기는 이곳의 거친 분위기와는 달랐다.
마치, 마치…. 나와 같은 그런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그들이다.
또한 그들은 너무도 아름답구나….

……. 벌써 반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그들, 천사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특히 그들을 이끌던 그녀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단지 외관상의 아름다움이라면 이곳의 여인들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난 그녀의 분위기가 좋다.
후~ 잊을 수 있을까?….

거기까지 읽은 천화는 다시 고개를 들어 황금 관을 바라보았다.
불쌍하다는 눈이기도 했으면 조금 한심해 보이기도 하는 눈이었다.
물론 그의 사정이 불쌍하기도 했다.
하지만…

“쳇, 바보 같은 녀석….. 마계를 더 뒤져보면 저 같은 녀석도 많을 텐데,
근처에도 한심한 마족 보르파가 있고…. 그런데 자기 주위의 사람들만 보고
마계를 다 본 듯이 찾아볼 생각도 않다니.
분명히 그래이드론의 기억 속에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마족이 많은데…. 이 녀석도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바 없군(井底之蛙).”

천화는 그렇게 한번도 본 적 없는 인물을 향해 혀를 내어 차고는 다시 일기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못 잊겠다. 하하… 이상한 놈, 마계의 마족이면서 천사를 동경하다니.
이 상태로는 도저히 이곳에 머물 수 없을 것 같다. 갑자기 이곳이 답답하다……

…… 감사합니다. 로디느님. 나는 그분께 쉬고 싶다고 말했고, 그분은 아쉬워 하긴 하셨지만 허락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아시기에 성에 있는 책들 중 필요한 것을 가지라 하셨었다.
나는 그분께 감사를 표하고 책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수많은 종족들이 모여 사는 이곳. 카르티나 대륙에…..

….. 근 한 달간이나 대륙을 떠돌던 나는 오늘 쉴 만한 곳을 찾았다.
그 옛날 인간이 이 공간(異空間)에 봉인되기 전에 만들어 놓은 지하 은신처 같았다.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들어와 있는 몇 마리의 도플갱어들이 있었지만, 내게서 풍기는 마기를 느끼고 복종을 표했다.
이제 이곳에서 쉴 것이다…..

“봉인이라니? 무슨 말이야. 이건….. 인간이 봉인되다니?”

일기책을 읽어나 가던 천화는 갑작스런 내용에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어 중얼거렸다.
인류만 따로 빼내어 봉인했다니…. 그런 일을 누가 한다 말인가.

“그럼…. 지금 몬스터들이 나타난 것이 인간의 봉인이 풀렸기 때문에?
그럼, 그 봉인은 또 누가 풀었단 말이야?”

천화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내뱉었다.
그럼 여태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 봉인되어 있던 세상이란 말이나가.

천화가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그런 천화의 귓가로 홀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이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어어~ 신경질 나…. 빨리 좀 정하자 구요. 열건지 말 건지. 열어서 휴간가 뭔가 하는 놈이 나오면 싸우면 되고, 안 나오면 그냥 돌아가던가 더 뒤지면 되잖아요. 뭘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고생하느냐구요.”

“조용히 해 임마. 누군 이렇게 머리 쓰고 싶어서 쓰는 줄 알아?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임마!!”

“……..”

이태영의 고함 소리를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제압해 버린 고염천의 말에 이태영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긴 한숨만 내쉬고 고개를 숙였고, 고염천은 그런 이태영의 모습에 만족한 듯 다시 황금관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천화는 그 모습에 봉인이란 단어를 중얼거리던 것을 중단하고 다시 일기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은 눈앞에 닥쳐있는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 같았다.
천화는 잠시 일기책을 들여다보다 수십 여장을 한꺼번에 넘겨버렸다.
이런 일기식의 글이라면 저기 저렇게 황금관에 누워 있는 이유는 거의 끝에 가서야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넘기던 천화의 눈에 흥미로운 단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드디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내가 완전히 그들과 같아질 수는 없더라도,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더라도 내 몸에서 풍기는 마기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로드느님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 중에 마법책이 한 가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책에서 마나에 관여되는 몇 가지 마법을 발견했다.
아마 내 생각대로 한다면…. 시간을 오래 걸리겠지만 내 몸 속에 있는 마기를 순수한 마나로 전환하여 흡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내 몸에서 풍기는 마기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드디어 오늘이다. 그동안 꽤나 많은 준비를 했다.
인간들이 만든 지하 은신처 밑에 있는 또 다른 작은 은신처를 도플갱어들과 다른 몬스터들을 이용하여 넓게 넓히고, 내 마기를 정화할 마법진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방어결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벽을 만들어 혹시 모를 침입자의 일에 대비해 놓았다.
비록 도플갱어들에게 침입자를 막으라고 명령을 해 놓았지만 어떻게 할지는 모를 일이다.
특히 이 결계는 정화되지 않은 내 마기를 사용할 것이기에 그 위력은 믿을 만하다.
혹시라도 내 마나가 전환되는 도중 방해를 받는다면 그 충격에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기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다.
다음 내가 다시 펜을 들고 이 책에 글을 쓸 때 내 마기가 사라져 있기를 바란다…….

일기책을 모두 읽은 천화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었다.

“후우~ 그럼 그냥 손도 대지 말고 가만히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이거지.
후후후…. 그런데 이거 이렇게 되면 손영형은 완전히 바보 되는 거 아니야? 뭐, 그럼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런데 그 보르파라는 놈은 왜 그렇게 설쳐 댄 거지?”

그런 천화의 머릿속에는 뭔가 있어 보이게 모습의 마족 보르파가 떠올랐다.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날뛴 건지.
그럼, 홀 앞에 쌓여 있는 인골들도 보르파와 도플갱어들의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천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지금은 답이 나왔으니 편안한 심정이었다.
여전히 일기책을 한 손에 쥔 채 옷에 묻었을 먼지를 털은 천화는 아직 황금관 옆에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다섯 사람을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일이라는 게 사람의 생각대로 되지만은 않는 것.
몸을 돌린 천화는 어떤 하나의 장면을 눈에 담고는 몸을 돌리더자 자세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헤헷, 대장님, 제가 뭘 발견했는지 한번 보세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서 편안하………..”

“아? 아아… 보는 건 나중에 보도록 하지. 지금은 이게 먼저야. 자네도 이리 오게, 이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대비를 해야지….. 응? 왜 그러나?”

고염천이 자신의 말에도 꼼짝하지 않고 있는 천화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의 천화에겐 그런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천화의 눈에는 오로지 유백색의 검기 가득한 검을 관의 뚜껑 부분에 쑤셔 넣어 관을 자르고 있는 이태영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제, 젠장……”

“응? 왜 그래?”

“제길…. 멈춰요. 형. 도대체 뭐가 바쁘다고 벌써 관에 손을 대는 거냐구요!!!”

천화는 남손영의 말에 바락 소리를 지르고는 엄청난 속도로 황금관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검을 잡고 있는 이태영의 손목 맥문을 잡고는 뒤로 당겼다.
그 힘에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중심을 잡지 못한 이태영은 뒤로 넘어갔고, 황금관을 자르고 있던 검 역시 힘없이 뽑혀 홀의 바닥에 차가운 쇳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하지만 천화는 그런 것엔 신경도 쓰지 않고서 검기를 머금은 검 날이 다았던 부분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워낙 다급하고 진지했기에 뒤로 나가 떨어졌다가 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고 있는 이태영이나 고염천, 남손영 등 그 누구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급박해 보이는 천화의 모습에 지금은 오히려 은근한 불안감까지 들고 있었기에 고염천과 남손영의 명령에 황금관에다 칼을 댔던 이태영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둘을 째려보았다.
그의 눈길은 정말 황금관을 여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 맞는지 묻고 있었다.
그러나 천화에게 시선이 가 있는 고염천과 남손영은 그런 이태영의 눈빛에 대답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시선들 속에서 검이 박혔던 부분을 중심으로 관을 살펴 나간 천화는 상당히 남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통의 검도 아니고 검기가 실린 검이 박혔기 때문이라서 그런지 검기에 의해 잘려 나간 부분을 중심으로 관과 제단의 문양 사이사이로 흐르던 마나가 넓은 호숫물에 바람이 일어 물이 찰랑이듯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느낀 천화는 급한 마음에 검지손가락 끝에 극양지력을 모아 잘려 나간 부분을 문질렀다.
그러자 열에 제법 잘 녹는다고 할 수 있는 금이 녹아내려 천화의 손가락이 지나가는 부분들을 채워 나갔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천화의 시선에 관과 재단에 빼곡히 새겨져 있는 변형 마법진이 보였다.
그 모습에 급히 시선을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천화가 붙여 놓은 부분은 뭉퉁하게 뭉개져 있었다.
천화는 그 모습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몽둥이를 찾았다.
하지만 몽둥이는 책장 앞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 천화가 앉아 있던 자리에 놓여 있었다.
관을 잘라내는 모습에 너무 놀라 그냥 놓아두고 와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런 천화의 시선에 떨어진 검을 주워드는 이태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자신이 이태영을 밀어낸 것을 생각해 낸 천화는 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해요. 형. 하도 급해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그 검 좀 빌려줘요.”

“아, 그래. 그리고 그렇게 신경 쓸 거 없어. 급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천화는 이태영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내밀자 그 검을 받아들며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급히 검을 받아든 천화는 곧바로 검을 쓰지 않고서 황금관을 바라보며 그 황금관에 새겨진 무늬의 형식과 깊이 등을 파악해 가며 그래이드론의 기억을 이용하여 지워진 부분이 어떠했는지 떠올려 놓았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지워진 부분이 완성될 즈음 천화는 그것들과 함께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긴박감이 감도는 얼굴을 사정없이 구겨 버렸다.
그때 떠오른 내용은 마법진에 관한 것으로 한번 마법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마법진은 새로 만들어내지 않고 중간에 보수해서 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엔 상당히 아까웠기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생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 천화의 검에서는 어느새 손가락 굵기의 아주 가는 검기가 뻗어 나와 있었다.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고 포기해야지….. 하아~ 제발 되라……”

푸스스스스……

천화의 조용한 기합 소리에 이태영의 검이 천화의 손에 들린 채로 바람에 흔들리듯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뭉개졌던 황금관의 부분부분들이 무언가 타들어 가는 냄새와 같이 다시 원래의 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작은 삼 사십 초만에 끝이 났고, 녹아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곳은 그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것은 다른 무늬들과 같은 시간에 만들어진 것처럼 그 깊이와 넓이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모양을 갖추기만 했을 뿐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질 못했다.
아니, 오히려 역효과였는지 이어진 부분을 따라 마나의 파문은 더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제기랄…..”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천화의 거친 음성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고염천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일인지를 물어왔다.
이미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는지 꽤나 굳어 있는 얼굴이었다.
천화는 그런 고염천의 모습에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어찌된 일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관과 제단 위를 흐르는 마나의 움직임은 점점 더해져만 가고 있었다.
천화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고염천 등은 허탈한 얼굴로 천화의 허리에 끼어 있는 일기책과 황금관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머릿속에는 천화가 어떻게 마계의 글을 알고 있나 하는 생각 같은 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닥친 사건이 더 급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남손영이 황금관을 한번 바라보고는 천화와 고염천, 이태영, 그리고 딘을 바라보며 강격하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저 휴라는 자가 깨어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뿐이야.”

“음… 그렇긴 하지만….”

남손영의 말에 이태영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허기사 그도 그럴 것이 아무런 죄도 없는 존재를, 아니 죄를 따지자면 오히려 자신들에게 있는데, 상대를 죽여야 한다니….
호탕하고 시원한 성격의 그에게는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하지 않겠다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
그건 딘이나 고염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어정거릴 시간 없어. 그도 자신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깨어나면 제 정신이 아닐 거라고 했어.
그러니 우린 그가 흉한 꼴을 보이지 않게 해주는 게 최선이야. 깨어나기 전에 처리해야 돼.
더 이상 끌다가는 사람들이 희생될 수도 있어.”

이어지는 남손영의 말에 세 명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고염천은 일의 진행 방향이 결정되자 남손영과 가부에를 밖으로 내보냈다.
비록 전투가 없더라도 네 사람의 최선을 다한 공격이 이어질 경우 잘못하면 이곳 지하광장 전체가 완전히 폭삭하고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곧바로 나가서 밖에 있는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이곳을 벗어나도록 해.
아, 아, 다른 말 할 생각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하도록 해라.
만약 이곳이 무너지기라도 할라치면 우리들이야 어떤 수를 쓸 수나 있지만….
손영이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좀 힘들지. 그리니까 우리 걱정시키지 말고 빨리들 이곳에서 나가.”

전혀 틀린 말이 없는 고염천의 말에 남손영과 가부에는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의 말대로 잘못된다면 자신들이 오히려 저들의 발목을 잡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럼, 대장….. 숲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너희들도….”

“그래. 걱정 말고 나머지 대원들 대리고 어서 나가.”

고염천이 다시 한번 재촉하자 남손영과 가부에는 다시 한번 고염천 등을 바라보고는 홀 밖을 향해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고염천은 두 사람이 홀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남은 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어느덧 다시 그 호탕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자, 어차피 해야 될 일이면, 최선을 다하자. 알았지?”

“넷!”

“물론이죠. 근데 임마. 너는 그런 걸 찾아내려면 좀 일찍 찾아내서 가져올 것이지….
어째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딱 한 발 늦게 찾아내서는 사람 곤란하게 말이야.”

고염천과 같은 생각인지 조금 침울했던 분위기를 한방에 날려버린 이태영이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옆에 있는 천화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을 건네왔다.
천화는 그런 이태영의 모습에 마주 웃어 보이며 대답해 주었다.

“흐흐…. 그래도 나 정도 되니까 찾았죠. 형처럼 단순한 사람이었으면 그런 책이 있었는지도 모랐을걸요. 안 그래요?”

“뭐야? 이 놈이…”

“왜요? 틀린 말도 아닐 텐데……. 안 그래요? 딘 형.”

“뭐……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나저나 이제 그만 해. 이런 곳에서 장난 칠 생각이 나냐?”

딘의 말에 뭔가 장난스럽게 대답하려던 이태영과 천화는 한순간 물이 넘쳐 흐르듯이 갑작스레 흘러나오는 혈향 가득한 마기에 얼굴을 살짝 굳혔다.
이태영은 천화에게서 다시 돌려 받은 검을 한 바퀴 휘잉 휘두르며 자신에게 닥쳐오는 마기를 날려버렸다.

“이 녀석이 오면 그만둘 생각이었어. 대장, 이제 시작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태영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고염천은 남명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가볍게 몸을 풀어주며 부서진 벽을 등 뒤로 하고 황금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행들이 공격할 자리를 하나하나 정해주었다.

“사방으로 나뉘어져서 공격했으면 좋겠지만, 이렇게 삼면이 막혀 있으면 오히려 우리들이 위험해진다.
그러니까 반원 모양으로 진을 갖추어 공격한다. 태영이하고 딘은 양끝으로 서고, 천화는 내 오른쪽으로 서라. 그래. 태영아, 너무 이쪽을 붙었어. 그래. 됐다.”

고염천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서자 가만히 남명을 들어 올려 공격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천화를 비롯해 나머지 두 사람도 각자의 최고 기량을 보이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다.
몽둥이를 들고 있던 천화는 양측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몽둥이를 한바퀴 돌리며 뭔가 곤란한 걸 생각할 때면 으례 그렇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12대식 중 하나를 써서 한 번에 끝내 버려야 하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나….’

지금 천화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공격 방법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12대식의 일식으로 한 번에 끝내 버리고 싶었다.
그것이 저 휴, 아니 지트라토라는 마족에게도 좋은 것일 테고 자신에게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니 보는 눈이 있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TV를 통해 본 대로라면-
대중매체라는 게 무섭군요.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천화가 저럴 정도라니.-
자신이 본래의 힘을 보일 경우 꽤나 귀찮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할 정도로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다.
어느 한순간 주위를 뒤덮던 마기가 늘어났다고 생각되는 순간 황금으로 만들어진 관의 뚜껑 부분에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길다랗고 가느다란 금이 가는 것이었다.

“온다. 모두 준비해. 저 관이 깨어지는 순간이 신호다.”

고염천이 자신의 목검 남명을 화려한 연홍색으로 물들이며 말하는 소리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천화도 더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 양손으로 몽둥이를 잡아 세웠다.
이어 천화의 내력이 몽둥이에 주입되자 몽둥이에 강렬한 은백색의 기운이 뭉쳐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이곳에 하루, 이틀 있을 것도 아니고….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생활해야겠지….’

천화는 그런 생각과 함께 몽둥이에 가해지는 내력을 더했다.
그러자 몽둥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은백색의 커다란 원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천화로서는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 라미아와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서 12대식이 아닌 무형검강결(無形劍剛決)의 최후 초식인 무형대천강(無形大天剛)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멈춰있는 상대라면 강(剛)의 구결만을 극도로 한 무형대천강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천화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지금 자신이 펼치고 있는 무형대천강만으로도 12대식 못지않은 시선과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한마디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고민을 했던 것.
그렇게 일초 십 초의 시간이 지나갈 때쯤 마치 냇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관의 뚜껑이 한 차례 들썩이더니 반짝이는 금가루로 변해 허공으로 날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인물은 길고 긴 녹옥색의 머리카락으로 온몸을 휘감은 이십 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
마족.
하지만 그냥 보기에 그의 가늘지만 부드러운 얼굴선을 보기에, 가늘지만 따뜻한 보이는 몸을 보기에, 포근한 편안한 분위기로 보기엔 그 사람은 마족이라기보다는 천사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덕분에 천화를 비롯한 세 사람의 가디언들은 공격하려던 것을 일순 주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뜨여진 그의 눈을 본 후, 붉게 물든 혼돈의 바다를 연상케 하는 그의 눈을 보고서 일행들은 아무 망설임 없이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는….. 그의 예상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

“내가 판단을 잘못한 때문이지…. 내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자네에게 백 배 사죄하겠네….. 남명…. 신화조(南鳴神火鳥)!”

“흐아압…. 실버 크로스(silver cross)!!”

“크압….. 궁령무한(窮寧務瀚)!”

천화는 양옆에서 뿜어지는 가공할 공격력에 자신도 합세하기 위해 무형대천강이 형성된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려치려는 한순간, 천화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깜빡여 지고 다시 뜨여지는 지트라토의 눈은 이성을 읽은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맑은 하늘은 눈에 담은 듯한 창공의 푸르른 빛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것은 잠깐, 다시 감았다 뜨여지는 그의 눈은 언제 그런 푸른빛을 뿜었었나 싶을 정도로 칙칙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카하아아아….”

“다음 생은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영위할 수 있기를….. 무형대천강!!”

우어어엉…..

천화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날린 몽둥이는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은빛 원형의 강기의 모습, 다른 공격들과 같이 그대로 지트라토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한순간 지트라토가 붉은 기운에 싸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속도는 너무도 느렸다. 마치…. 일부러 느리게 하는 것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양측의 기운들이 충돌을 일으켰다.

쿠콰콰콰쾅…………..

쿠르르르르………….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지하광장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정이 부서져 떨어져 내렸으며, 벽이 갈라졌다.
자신들을 덥쳐오는 충격을 막아서던 고염천은 그 모습에 급히 나머지 세 사람을 부르며 홀 밖으로, 지하광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딘, 태영아, 천화야. 뛰어. 무사히 뛰어나가기만 하면 끝이다. 뛰어….”

그런 고염천의 뒤를 딘과 이태영이 뒤따라, 그 뒤를 천화가 따라 달렸다.
그리고 지하광장을 벗어나는 마지막 순간. 천화는 잠시 뿌연 먼지에 뒤덮여 있는 곳을 뒤돌아보며 자신이 그때까지 들고 있던 일기책을 그 뿌연 먼지 사이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저 앞에 가고 있는 딘과 이태영의 뒤쪽에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런 천화가 지각하지 못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가 던졌던 책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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