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 156화


잠시 후 확 풀린 얼굴의 천화를 선두로 세 사람은 가이디어스를 나섰고, 그 뒤를 통통 부은 눈을 가린 남손영이 뒤쫓았다.

“으아아…. 하아…. 합!”

천화의 요란한 기지개 덕분에 카페 안에 떠돌던 시선들이 일제히 천화를 향해 돌려졌다. 그 많은 시선에 순간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자각한 천화는 급히 입을 막고 몸을 숙였다. 하지만 입을 막았음에도 이어지는 하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천화의 모습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중, 다리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역시 몸의 근육을 그대로 드러내는 티를 입고 있던 사내가 나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짜식이 이런 좋은 날씨에 축 쳐져서 하품은….”

과연 그의 말대로 여름 날씨로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것 같은 날씨 덕분에 카페는 물론 카페 밖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외는 있는 법. 바로 자신과 같은 상황의 사람일 것이다. 천화는 그런 생각에 축 쳐지는 팔을 들어 방금 시켜놓은 차가운 아이스 티를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바로 ‘롯데월드’에서 보고 두 번째로 만나는 이태영과, 저번 시험 때 천화에게 구박만 받고 돌아갔던 남손영이었다. 이미 천화의 테스트가 있은 지도 이 주가 지나고 있었다. 이 주일. 별로 길다고 할 수도 없는 시간이지만 천화에게는 힘든 고행의 시간과도 같았다. 과연 생각했던 대로 나이트 가디언의 선생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테스트로 천화의 실력이 증명된 덕분에 그레센에서처럼 실력을 의심하는 일은 없었지만, 가르치는 과정에 있어서는 그레센에서보다 몇 배나 힘들고 골치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명령에 대한 복종에 있었다. 중원에서나 그레센에서나 스승이나 상관으로서의 명령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무언가를 지시할 경우 그 지시를 최우선으로 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레센에서도 천화의 실력이 증명된 후 별다른 설명 없이도 천화가 지시하는 훈련을 묵묵히 또 절대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물론 스승을 하늘처럼 여기던 중원에서는 말 할 것도 없고 말이다. 헌데….. 헌데, 어떻게 된 것이 이곳 가이디어스의 학생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한 가지 수련과제를 낼 때마다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시험을 보여야 했다. 더구나, 가르치려는 것의 난이도가 높고 힘들다고 생각될 때는 자신들의 수준이 아니라고, 다음 학년으로 넘겨 버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 참고로 천화가 맡고 있는 것은 3학년들이었다. – 비록 천화의 나이가 자신들과 비슷한 때문에 격이 없어 보인 덕분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지만, 정말 중원과 그레센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번 달 내로 라미아를 가이디어스에서 졸업시켜버릴 것을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이 눈앞의 두 사람이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천화는 자신의 잠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한 번에 비워버린 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냥 단순히 안부만 묻자고 자신을 찾아올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 온 거예요? 특히 손영형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삐쳐서 돌아가더니만….”

“큭….. 험, 험… 삐치다니? 내 나이가 몇인데, 널 상대로 삐치냐?”

하지만 마시던 주스 잔을 급히 내려놓으며 말하는 남손영의 눈썹은 기이하게 휘어져 있어, 그의 말에 대한 신빙성을 상당히 떨어트렸다. 하지만 본인이 잡아 땐다면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천화는 두 사람을 은근히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자신이 이러고 있는 동안 3학년 녀석들이 빈둥거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오기 전에 담 사부에게 부탁을 해놓긴 했지만 자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천화의 뜻을 읽었는지 남손영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고…. 혹시 던젼이 발견됐다는 말 들은 적 있냐?”

“전혀….”

천화는 남손영의 말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천화로서는 그 비슷한 말도 들은 적이 없었다. 남손영은 그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직 못 들은 모양이군. 하기야 우리 나라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니까. 사실 며칠 전에 중국에서 던젼이, 그러니까 경운석부(憬韻石府)라는 고인(高人)의 은신처(隱身處)로 보이는 석부가 발견됐다.”

“경운석부…. 라고요?”

남손영의 말을 되뇌이는 천화의 몸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앞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남손영은 그런 천화의 모습에 자랑이라 하는 양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사천성에 있는 무슨 산에서 발견됐어, ‘그 날’ 이후로는 산에 오르는 것도 위험해서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그 지방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무슨 일 때문인지 올라갔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알려진 거지. 정말 그 사람도 운이 좋았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산에 올라서 별탈 없이 내려온 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인데, 그런 것까지 발견하다니….. 정말 천운에 천연이지.”

천화는 남손영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짐승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몬스터까지 어슬렁거리는 산에 올라서 무사히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인연이 없으면 발견할 수 없는 그런 곳까지 발견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천화가 궁금해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실은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이다. 정작 궁금한 것은 왜 자신을 불러냈는가 하는 것이었다.

“네, 네… 정말 천운이네요. 그런데, 그거하고 날 불러 낸 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줘요.”

서문이 긴 것이 지겨웠던 천화의 말에 남손영은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그리고 막 말을 이르려 할 때였다.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시켜놓은 음료수를 벌컥대고 있던 이태영이 갑자기 끼어 들어 한마디를 던지듯이 툭 내뱉어 버리는 것이었다.

“뭐, 간단한 거야. 우리 염명대가 거기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는 거지.”

“임마, 아직 내 말도 다 끝난 게 아니데….”

“뭐, 어차피 말할 거잖아요. 저렇게 궁금해하는데, 말해주고 난 후에 설명해줘도 되잖아요.”

순간 자신의 말을 끊어 버리는 이태영의 말에 따가운 눈총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기사 답지 않게 능글맞은 이태영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능글맞은 그의 말에 나직히 한숨을 내쉰 남손영은 천화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태영의 말을 들은 천화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가자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아직 석부 안으로 안 들어갔다는 말입니까? 벌써 석부가 발견된 지 몇 일이나 지났는데도?”

전혀 생각 밖이라는 천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남손영은 설명을 이태영에게 떠넘겨 버렸다. 아마도 그가 말하던 중간에 끼어든 불만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듣는 관계로 지루해 하던 이태영은 외려 신난다는 얼굴로 천화의 물음에 자신이 아는 것을 주절대기 시작했다.

“그래, 그리고 네 말에서 틀린 게 있는데 그들은 들어가지 않았던 게 아니라, 들어가지 못했던 거야. 처음 그 일이 중국 내의 가디언 본부에 보고되었을 때는 중국 내에서 처리하려고 했었지. 아니, 어떻게든 자국 내에서 처리하길 바랬지.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곳에서 나오는 무공서적이나 마법서들이 알게 모르게 그 나라의 국력에 영향을 주거든. 뭐, 어디까지나 각국의 높으신 나으리들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았던 모양이야. 알려 오기를 우선적으로 투입된 세 개의 조 모두가 얼마 들어가지도 못하고 엄청난 낭패만 보고 돌아왔다고 하거든. 그러니 어쩌겠냐? 자신들만으론 힘들겠다 싶으니까 그때서야 국제적으로 그 사실을 알리고 같이 석부를 발굴해 보자고 요청한 거지.”

이태영의 설명에 천화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확실히 그런 곳이라면 들어가기가 힘들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염명대가 가기로 했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럼 거기에 나는 왜 끼는 건데요? 아, 이번엔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 줘요.”

이태영은 천화의 말에 쩝쩝 입맛을 다시더니, 멋 적은 표정으로 천화에게 대답했는데, 그 말을 들은 천화로서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직히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게….. 통역할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하. 하. 하. 하아…..”

“야, 야, 내 말도 좀 들어봐. 사실 중국어를 통역할 사람들이야 많아. 하지만 우리가 가려는 곳이 곳인 만큼 아무나 동행할 수는 없는 일이잖냐. 안 그래? 그러니까 네가 우리 사정 좀 봐 주라. 응?”

“우….. 씨 그렇지 않아도 선생일 만 해도 힘든데….. 가디언들 중에서도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니예요. 그런 사람들과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싸여 가는 스트레스 덕분에 피곤한 천화였다. 그런데 다시 사천성의 고인의 석부까지 동행하자니, 정말 움직이기 싫은 천화였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을 다 아는 것처럼 자신 옆으로 다가와 떡 하니 어깨를 걸치고 능글맞게 이야기를 꺼내는 남손영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승낙할 수밖에 없는 천화였다. 중원에서도 그렇고 그레센에서도 그렇고, 이런 때에는 정말 상대에게 끌려 다니는 자신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성격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하. 지. 만. 어차피 가기로 한 것, 최대한 자신이 챙길 것은 다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천화가 득의해 있는 남손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 가는데, 라미아도 같이 갈 수 있도록 해줘요. 그게 안 되면 나도 안 가요.”

“….. 공처가 녀석….”

한심하단 표정의 이태영의 말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