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96화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오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그렇게 수련실에서 시끌벅적하게 하루를 보낸 이드와 일행들은 빈이 다시 얼굴을 내민 이틀 후까지 수련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런던 관광이라고 이리저리 다리 품을 팔며 돌아다니기보다는 수련실에서 훨씬 더 시끄럽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들에서였다.
특히 그레센의 황궁에서 지내며 그 화려함과 웅장함을 보았던 이드와 라미아로서는 런던의 주요 관광지인 베르사유 궁전이나 국립 미술관의 아름다운 모습이 전혀 눈에 차지 않았다.
거기에 오엘도 이드의 의견에 따라 관광보다는 가디언들과의 대련을 통한 실력 향상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단지 사제의 신분을 망각한 채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는 제이나노와 본의 아니게 안내라는 명목으로 이드 일행들에 묻어 와 가디언들에게 고통을 당해야 하는 치아르만이 불만과 원망을 표할 뿐이었다.
“자네들 보기 미안하구만. 정작 손님들을 초대한 장본인이 손님 접대는 않고 이제야 얼굴을 내비치니 말이야.”
“여~ 우리 없는 사이 잘 놀았나?”
며칠 만에 피곤한 얼굴로 중앙지부 건물 뒤에 마련된 작은 공원에서 쉬고 있는 일행들 앞에 나타난 빈의 말이었다.
그의 뒤로는 하거스를 비롯한 디처의 팀원들도 보였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날을 제외하고는 얼굴도 볼 수 없었던 디처였다.
궁금한 생각에 이틀 전 숙소를 물어 직접 찾아가 봤지만 들은 말은 빈과 함께 일이 있어 나갔다는 말뿐이었다.
“뭘요. 저희도 며칠 동안 편히 쉬었는데요. 그러지 말고 여기들 앉으세요.”
이드는 일행들 앞에 불쑥 얼굴을 내민 빈들에게 일행들 반대쪽으로 자리를 권했다.
자리를 권하는 이드의 표정엔 불평과 같은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주위 가디언들의 지나가는 이야기를 통해 빈들이 어딜 다녀온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드의 말에 따라 빈들은 이드들과 같은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워낙 작은 공원이고, 일행들보다 앞서 온 가디언들 덕분에 앉을 자리가 없어 제이나노가 찾은 자리였다.
하지만 큰 나무그늘과 푹신한 잔디를 생각하면 벤치보다 더 좋은 자리이기도 했다.
“결국 미국에 다녀오셨다구요? 거긴 상황이 어때요?”
빈들이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제이나노가 빈을 바라보며 수다스럽게 물었다.
이드나 라미아, 오엘도 궁금해하고 있던 내용이기에 곧 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한 답변의 내용이 별로 좋지 못한 때문일까. 제이나노의 대답에 마주 보는 빈과 디처 팀원들의 표정이 별로 밝지 못했다.
“글쎄…. 뭐라고 답해야 할지.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곤란한 표정은 말문을 여는 빈의 모습에 더 궁금증이 커진 이드가 그의 말을 재촉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 내가 자네들에게 처음 탬버의 공격 소식을 전하고서 오늘까지 제로로부터 공격을 받은 곳은 두 곳 더 늘었지.
두 곳 모두 오스트레일리아의 도시인데, 다른 곳과는 달리 공격 하루 전에 예고장이 날아왔고, 다음 날 바로 공격이 이어졌지.”
“그래서요?”
라미아의 재촉에 빈의 옆으로 앉아 있던 하거스가 툴툴거리듯 대답했다.
“그래서는? 쪽도 못 쓰고 바로 깨졌지. 공격까지 하루 걸렸다.
그동안 가디언이 모이면 얼마나 모였겠어? 또 다른 곳보다 가디언들의 능력이 좀 떨어진다고 소문난 곳이니 오죽하겠냐?
두 패로 나눠서 공격해 들어온 제로에게 한 시간도 못 버티고 무너졌지.”
하거스에게서 제로에게 패했다는 말을 들은 이드는 한층 더 흥미 있다는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궁금해하던 점을 물었다.
“그럼…. 그 후에 제로는 어떻게 했는데요? 녀석들 처음 봤을 때, 자유가 어쩌니 저쩌니 했었잖아요.”
“하하… 그랬지. 근데 그게 정말인 모양이야.”
가만히 하거스의 대답을 기다리던 이드들은 그가 갑자기 웃어버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이드들을 위해 빈이 다시 입을 열어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제로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더군.”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구요?”
“그래, 단지 제로에게 넘어간 두 지역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 그러니까 경찰이나, 가디언들 같은 국가 공권력에 해당하는 기관이나 사람들만 그 도시에서 내보냈을 뿐이지. 그리고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로 제로의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들어왔더군. 보고된 바로는 도시에 들어선 그도 비어버린 시청에 머물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했거든. 어떻게 보면 시민들을 강제하지 않으니 잘됐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긴 하지만,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속을 알 수가 없는 놈들이야.”
“그럼…. 아까 빈 씨가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하고 말했던 게 이 상황을 보고….”
“뭐…. 그렇지. 비록 우리나라가 아니더라도 도시가 두 개나 놈들 손에 넘어갔으니 좋을 것 없는 상황인데… 그런 가운데서도 놈들이 도시에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다니… 다행이기도 하니 말이야.”
그때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오엘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반격은 하지 않았나요?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오스트레일리아로서는 자국 영토에서 벌어진 일이니 보고만 있진 않을 텐데….”
그녀의 말에 하거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이야. 뭔가 긴장감이 있어야 급하게 서두르지. 제로 놈들이 정복한 도시에 뭔 짓을 하면 또 몰라. 그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상하다 싶을 만치 조용하니… 이쪽에서도 서두를 이유가 없잖아. 거기다 그렇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다는 게 신경 쓰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한 시간 만에 깨진 놈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반격을 하겠냐?”
하거스는 그렇게 말하며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국제적인 지원을 기다릴 수밖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런 하거스의 말까지 들은 이드는 가만히 앉아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바닥의 잔디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하나둘 다른 이야기를 꺼낼 때쯤 고개를 들어 빈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부터는 꽤나 바빠지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 몬스터만 해도 문젠데, 거기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제로란 단체가 나타났으니까. 아마 제로에 대해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할 거야.”
이드는 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빈과 디처의 팀원들 그리고 자신의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그러면 더 이상 관광하긴 틀린 일이고… 저희들도 원래 목적지를 찾아 출발했으면 하는데… 너희도 괜찮지?”
“전 언제나 이드님 편이죠.”
“뭐, 저도 볼만한 건 다 구경했으니까요.”
이드의 말에 라미아와 제이나노가 한 마디씩 했고, 오엘은 잠시 디처의 팀원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드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이드들로서는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바빠지기 시작할 가디언들 사이에서 빈둥대는 것도 어딘가 어색한 일이지만, 목적지가 있는 그들이 — 정확히는 이드와 라미아 — 언제까지 할 일 없이 중앙지부에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원치 않게 관계를 맺은 제로가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어디로 튈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계속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하지만 이드들의 생각과는 달리 빈은 섭섭하고 미안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확실히 초대한 장본인이 한 일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좀 더 지내다 가지. 이제 미국에서도 돌아왔으니, 자네들을 대접할 시간도 있고. 내일모레면 외부로 일을 나가 있던 트레니얼의 팀원들도 돌아올 텐데.”
하지만 그의 말에도 이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방금 전 대답한 빈의 말대로 제로로 인해 바빠질 가디언들에게 밖으로 나다닐 여유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계속해서 고개를 저어대는 이드의 모습에 남기를 권하던 빈은 결국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언제 출발할 생각인가?”
“내일 낮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이것저것 챙길 것도 있고…. 몇 가지 준비할 것도 있어서요.”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지 이드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미소를 이해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감정을 공유해 느낄 수 있는 라미아뿐. 다른 사람들은 멀뚱히 그런 이드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 준비할 것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