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1화


438화

울긋불긋. 움찔움찔.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두 연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채이나의 안색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기 좋은 두 사람의 모습에 흐뭇해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부둥켜안은 채 떨어질 생각을 않고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처음의 감동은 사라지고 이제는 홀로된 외로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외로움은 곧 질투로 변신해서 채이나의 속을 긁었다. 그리고 질투가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도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결국 채이나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만 좀 해, 이것들아. 여기가 너희들 침실이냐! 언제까지 붙어 있을 거야. 이후의 플레이는 집에 가서 하라고!” 과연 엘프라도 아줌마는 다르다. 말하는 데 거침이 없다. 옆에 서 있던 마오가 얼굴을 붉히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항상 자랑스러운 어머니지만 지금 모습은 조금 부끄러운 아들이다.

하지만 이드도 그런 말에 흔들릴 내공은 아니다. 엘프 특유의 마이페이스적인 성격을 가진 일리나는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채이나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이 자리에서 그동안의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드는 채이나를 돌아보며 픽 웃어 주고는 일리나를 놓아 주었다.

“좋은 장면에서 왜 트집이에요. 채이나가 말한 대로 했는데.”

확실히 채이나가 안아 주라고 하긴 했었다.

“……정도라는 게 있는 거야. 솔로를 괴롭히면 벌 받는다. 너.”

“아들도 있는 아줌마가 솔로는…………… 무슨.”

“어이, 그만하지?”

일리나를 만나 살짝 흥분했던 모양이다. 이드는 채이나의 눈가에 감돌기 시작하는 살기를 보고 찔끔해서는 입을 닫았다.

쿡쿡.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우스웠던지 일리나가 작게 웃었다. 엘프답게 빠르게 감정을 정리한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드를 제외하고는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채이나, 마오. 만나서 반가워요.”

“오랜만이에요, 일리나. 소식이 잘 도착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세 엘프는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채이나의 말대로 제대로 된 자리에서 하면 된다. 일행은 일리나를 선두로 결계를 넘었다. 결계는 그 거대한 넓이만큼 두께도 상당했다. 모두 결계를 넘자 일리나가 결계를 닫고 마법진을 활성화시켰다.

결계 표면에 떠올라 있던 크고 작은 문이 차례대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묘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단순한 결계는 아닌 듯 보였다.

“장로님께 안내하겠습니다. 절 따라오세요.”

일리나는 신기한 듯 결계의 문이 있던 곳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재촉하며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일리나의 손에는 어느새 이드의 손이 잡혀 있었다.

이드는 자신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일리나의 모습에 미안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자신이 먼저 손을 잡았어야 하는데, 싶었다. 하지만 선후는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이드는 가만히 일리나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걸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뜨거운 열기에 불타는 여자도 있었다.

[이글이글. 이글이글이에요.]

일리나를 만나고서 조용히 있던 라미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라미아를 향했다. 라미아의 존재를 알지 못해 잠시 주춤하던 일리나의 시선 역시 세 사람을 따라 이드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라미아를 향해 움직였다. 일리나는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견갑을 발견하곤 자신이 초대하지 않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드가 갑작스러운 소리에 반응해서 물었다.

[제가 질투에 불타고 있는 소리예요.]

“….후.”

불만을 잔뜩 머금은 대답에 이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당황스러웠다. 이글이글이라니. 질투가 타오르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최소한 이글이글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질투에 불타고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투정이었다.

채이나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일리나 씨에게 절 소개시켜 주지 않으실 수 있으세요. 이드와 저 사이에 너무해요.]

아차 싶었다. 이드는 그녀의 말에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

세 사람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라미아의 말이 맞았다. 당연히 그녀를 일리나에게 소개해야 했다. 이 자리에 없었다면 모를까, 항상 자신과 함께하는 그녀다. 그런데 그런 라미아를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일리나를 만나기 전까지 이드를 잘 다독이던 라미아가 단단히 뿔이 났다.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이드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이드, 이분은 누구신가요?”

일리나가 물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온 만큼 자신과 관계된 문제라는 판단에서 조용히 나선 것이다.

“음…….”

이드는 그녀의 물음에 막상 대답하려니 말문이 막혔다. 라미아의 존재도 일리나의 존재도 누구에게나 당당하다고 생각했던 이드였다. 하지만 일부일처제가 법으로 정해진 곳에서 한동안 살다 온 부작용인지 막상 당사자인 일리나가 묻자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이드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라미아가 먼저 나섰다.

[그건 제가 대답하죠. 저는…………]

파앗!

라미아가 말을 하는 사이 그녀에게 은은하게 어려 있던 빛이 서서히 강렬해지며 작은 빛의 구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은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칼날을 이어서 만든 새의 형상을 하고 있는 라미아가 붉은 눈으로 일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과 같은 이드의 연인이에요.]

라미아의 당당한, 하지만 그 모습 때문에 귀여운 연인 선언이었다.

순간 이드의 숨이 멎었다. 라미아의 선언과 동시에 일리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때문이었다.

이드와 라미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일리나는 어느새 이드의 손을 놓고 라미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군요. 이제 같이 살게 되겠군요. 숲의 딸 일리나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두 눈이 서로를 마주 본다.

[라미아라고 부르면 돼요, 일리나. 저도 잘 부탁해요.]

“그래요. 라미아.”

서로를 마주 보는 눈에 살그머니 감정이 흐른다.

인간이라면 난데없는 연인 선언에 이렇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특히 그 상대가 피가 흐르는 생물이 아니라 강철의 새라면 농담으로 웃어넘겨도 모자란 일이다. 일리나가 엘프라는 사실이 고마운 지금이었다. 덕분에 복잡할 수도 있는 일이 간단히 해결되는 듯했다.

일리나에게 사랑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준 상대가 인간인 시점에서 평범한 엘프 가정의 모습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들은 이종족 간의 결합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저 상대와 자신의 마음이 확실히 오고 갔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더구나 연인 선언을 한 상대가 당신과 같다는 말로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면, 자신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일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라미아가 존재한다고 해서 자신이 이드와 마음을 주고받는 일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걸 라미아가 방해한다면? 글쎄, 그때는 충분히 심각한 문제가 되어 엘프가 얼마나 폭력적인 종족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드,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제게 소개하지 않은 건 큰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엘프인 일리나라도 이 일의 원흉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다행히 별일 없이 잘 풀렸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이드는 갑작스러운 일리나의 추궁에 내쉬던 한숨이 턱하고 걸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동거 생활 8년차다. 이런 상황의 대처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다. 이드는 바로 잘못을 인정하고 말을 돌렸다. 이쪽으로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하다.

“그런데 라미아,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변한 거야?”

“그녀의 본래 모습은 다른가요?”

말을 돌리려는 모습이 너무 뻔하게 보였지만 일리나는 그 말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허둥대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제대로 이야기를 해 둘 필요가 있다고 다짐하는 일리나였다. 특히 자신과 헤어진 후 무심히 흘러 버린 시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이다.

“일리나도 기억할 거예요. 제가 처음 당신과 만났을 때 저와 함께 있던 라미아.”

기억력이 좋은 그녀의 머릿속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한 자루의 검이 떠올랐다.

“네.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그 라미아가…?”

“맞아요. 그녀예요. 그녀가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가면서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녀는 특별한 존재로군요.”

일리나는 농담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연인 선언을 하는 라미아를 단순히 지금 보이는 대로의 금속 생명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연인 선언 후 아무리 봐도 생명체로 보이지 않는 라미아를 한 번도 그것이라고 칭하지 않고 그녀라는 존재로 인식해 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배려가 고맙고, 안심이 되는 라미아였다.

“그레센으로 돌아왔을 때 라미아는 다시 검의 형태가 되었죠.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일단 다른 모습으로도 변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게 쉽지 않아서 모양과 구조가 단순한 견갑이나 작은 귀걸이의 모습 이외는 힘들더군요. 혼자 움직이도록 변신하게 만드는 건 아직 무리였는데, 지금 라미아가 생물은 아니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형태로 변한 거죠. 제가 딱히 힘을 쓴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대답을 재촉하듯 모두의 시선이 라미아에게 모였다.

[강력한 질투의 강대한 힘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드도 조심해요.]

사실은 아니다.

이드의 힘이다. 매 순간 라미아의 본래의 형태가 아닌 형상으로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이드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것을 유지하는 힘의 부족과 운용미숙으로 라미아의 형상이 단순한 모양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그레센으로 오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머리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일리나에 대한 문제가 해소되면서 정신적인 안정을 가져왔고, 그 순간 라미아의 형상을 결정하는 힘에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그 여유를 이드보다 먼저 캐치하고는 형태를 바꾼 것이다. 물론 이런 힘의 운영은 이드가 그 권한을 평소부터 라미아에게 내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하지만 두 사람에게서 죄인이라고 판결받은 이드로서는 유구무언이다. 아닌 건 확실한데 말을 할 수가 없다. 옆에서 채이나가 껄껄거리며 커다랗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나 얄미웠다.


일행은 일리나의 안내로 다시 마을을 향해 걸었다.

어느새 라미아가 일리나의 어깨 위로 옮겨 가 있다. 이번엔 이드가 일리나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은 가볍게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보기 좋구나. 그렇지? 마오.”

“네.”

좀 전까지 깔깔거리던 채이나가 평온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오는 채이나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자신에 대한 바람을 알았지만 별다른 반응 없이 덤덤히 대답했다. 앞서가는 세 사람의 모습은 보기 좋았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그는 인간과도 엘프와도 사는 시간이 다르다. 결국 누군가 혼자 남게 되리라. 그 아픔은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물론 아버지와 가정을 이룬 어머니는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마오는 이드와 일리나의 용기가 부러웠다. 그들의 모습에서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라 오랜만에 아버지를 추억하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어머니와 함께 걸어가던 아버지의 등과 닮은 것 같았다. 특히 일리나와 라미아에게 쩔쩔매는 저 모습이, 아버지가 어머니께 야단맞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크크큭.”

“음? 갑자기 왜 웃는 거니?”

“아니요. 오랜만에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요.”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