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06화
1441화
자정과 새벽 사이 그 중간 어디쯤의 깊은 밤.
소드 팰러스 외성 동쪽 성문 위에 서성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모두 셋으로, 하나같이 검은 망토를 둘러 전신을 가린 상태였다. 은밀한 움직임을 위해 행여 별빛에라도 반사광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남동쪽 하늘을 바라보기를 세 시간.
세 그림자 중 가장 왼쪽에 선 남자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온몸을 비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갸갸갹! 젠장! 지겨워 죽겠네. 출발한 지가 언제인데, 왜 아직도 시작을 안 하는 건데! 혹시 당한 거 아냐?”
“…….”
“씹냐? 뭐라고 말 좀 해 봐. 벌써 세 시간째라고.”
무시당한 남자가 불쾌하다는 듯 중간에 선 남자의 발을 툭툭 찼다.
그러자 중간에 선 남자, 칼모레가 자신을 차는 남자의 발을 내리찍었지만.
“히힛! 그럴 줄 알았지. 내가 널 모르냐?”
실패했다.
칼모레는 자신의 행동이 읽혔다는 사실과 그걸 다른 사람이 보고 있다는 사실에 일순간 넘치는 수치심을 느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애냐? 그리고 벌써가 아니라 겨우 세 시간이다. 이동에만 두 시간이고 도착 후 은밀하게 접근, 기습을 준비하는 데도 또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보다 잘 알면서 애새끼처럼 징징거리지 마라.”
“그거야 나도 알지. 아는데! 이 모든 짓거리가 병신 같단 말이야! 씨발, 죽고 싶으면 그냥 자살 돌격 앞으로! 해 버리고 끝낼 것이지, 굳이 이딴 병신 같은 연극이 왜 필요하냐고!”
“마르텔 경이 바라시는 일이다. 그 이상의 이유가 왜 필요한데?”
“……젠장.”
마르텔이 원하기 때문에 한다.
그 간단한 이유에 불만을 토하던 남자는 반박할 의지를 잃고 고개를 푹 떨어트리고 말았다.
칼모레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갑갑해할 것이었으면 차라리 마르텔 경을 따라갔어야지. 왜 남아서 지랄이야?”
“야, 이 씨! 내가 거길 왜 가? 난 죽고 싶은 생각 없다고. 그리고 간다면 코랄이 가야지, 왜 내가 가냐? 안 그래?”
남자는 가장 오른쪽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를 눈짓했다.
그에 깊은 밤 고요를 깨트리며 갑자기 시작된 말다툼에 내심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던 코랄이 화들짝 놀랐다.
빈 기사단 공식 악동이 갑자기 자신을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 저를 왜 끌어들이십니까? 놀려면 두 분이서 노십시오.”
“놀긴 누가 놀아? 그리고 넌 인마, 위대한 블러디 혼의 전속 전령 아니냐. 그것도 위대한 마르텔 경에게 냄새나는 똥 덩어리를 전달한 전령! 캬하하하하!”
현재 임무에 투입된 기사 중 코랄의 임무에 대해서 모르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가 하얀 치아가 훤히 보이도록 크게 웃어 댔다. 코랄은 당장이라도 저 입속에 똥 덩어리를 쑤셔 넣어 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이 눌렀다. 이런 코랄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칼모레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쯔쯔쯧, 지금 누가 누굴 비웃냐? 너, 네가 이번 작전 기여도에서 꼴찌라는 자각은 있는 거야?”
“흥, 그거야 내가 나설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기회만 줬으면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었다고. 그러고 보면 생각할수록 아깝단 말이야. 기여도를 높일 좋은 기회였는데.”
“뭐가 말입니까?”
이 망나니가 나설 일이 있었던가?
코랄의 물음에 남자가 지금은 텅 비어 버린 내성을 턱으로 가리켰다.
“뭐겠냐? 위대한 블러디 혼께서 위엄을 보이신 일이지. 내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네가 나서면 위엄이 아니라 위협이고 협박이 되잖아, 이 멍청한 놈아.”
“그게 뭐? 어차피 쭉정이들이 겁먹는 건 마찬가지잖아.”
위엄과 위협이 뭐가 그리 다르냐며 툴툴대는 남자.
코랄은 그의 말에 멀리 남동쪽 하늘과 내성을 번갈아 보았다.
자신이 마르텔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떠난 후, 마르텔은 쭉정이 중 일부를 죽여서 본을 보였다고 했다.
“몇 명이 죽은 겁니까?”
“스물여덟. 부상자는 없고 몽땅 죽었지. 다른 건 몰라도 역시 칼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그래.
마르텔은 쭉정이 스물여덟을 죽여 자신의 기습 작전에 따르도록 만든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쭉정이들의 반대는 당연했다. 애초에 싸울 용기가 있었다면 내성에 틀어박힐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
그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기에 마르텔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고.
그런 겁쟁이들에게 갑자기 기습을 하자니 놀랄 수밖에. 순순히 따랐다면 오히려 놀라고 의심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과감한 언사까지 보이며 마르텔의 작전 계획에 반대 의견을 표출하는 이들이 나왔고, 마르텔은 그중 가장 앞선 기사들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어떻게든 살고자 발악하던 기사들은 목적과 반대로 가장 빨리 죽게 된 것이다. 그들은 감히 마르텔의 검을 막아 내지도 못했다.
애초에 그런 용기와 실력을 가진 기사라면 쭉정이로 분류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빈 기사단이 사전에 빼돌렸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마르텔의 위엄에 반대는 쏙 들어갔다.
쭉정이들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검과 갑옷을 챙기며 전투를 준비했다. 웃긴 건 그런 와중에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는 정신 나간 놈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굳게 먹고 감각을 날카롭게 갈아 내도 모자랄 판에, 술이라니.
아마 다른 때였다면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 맞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을 바랐는지도 모르고.
그러나 마르텔은 이런 행동에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고, 그 모습에 무언가를 예감한 일부는 내심 절망했다.
이에 대해 칼모레는 말했다.
그 시점에 도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떤 면에서 마르텔의 대단함에 대한 증명이라고.
그렇게 억지로 준비를 마친 마르텔과 반역의 기사들은 밤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정이 되는 순간, 누구의 배웅도 없이 성문을 열고 소드 팰러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여기 세 사람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에 동정이 일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저들의 전투에 맞춰 움직이기 위함이었다.
문제라면 불만에 입이 툭 튀어나온 남자의 말대로, 너무나 반응이 없어 답답함이 머리끝까지 찼다는 점일까.
“설마 쭉정이들을 제물로 그냥 항복해 버린 건 아니겠지?”
“제발 부탁이다. 개소리도 좀 가려서 해라.”
칼모레의 말에 코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답신을 바라보던 마르텔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 선명했다.
그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런 남자가 돌연 살고자 발악한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정찰을 위해 은밀히 뒤를 따라나선 동료도 있지 않은가.
남자의 말은 그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럼 왜 이렇게 소식이 없는 거냐고!”
“말 했잖・・・・・・ 왔다.”
같은 말을 또 해야 하냐며 부득 이를 갈던 칼모레. 막 목소리를 높이려던 그는 움찔하며 행동을 멈췄다.
그와 함께, 슬쩍 벌어진 망토 사이로 파란색의 손톱만 한 화염이 나타났다. 신호용으로 제작된 한 쌍의 스크롤이 타오르며 나타난 불꽃 신호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히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내용이었다. 전투 시작.
그것의 의미에 툴툴대던 남자도 무겁게 입을 닫았다. 세 남자가 일제히 남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검은 하늘에는 아무런 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분 탓일까. 희미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오래 끌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이미 저쪽의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다만 숫자에서는 이쪽이 두 배 이상이기 때문에 혹여나 하는 바람에 기대해 볼 뿐이다.
“어쨌든 우린 계획대로 움직인다. 코랄, 신호를 보내라.”
찌익!
칼모레의 말에 신호용 스크롤을 찢는 코랄.
찢어진 스크롤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같은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남쪽 성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직후 수백 마리의 말을 나눠 탄 인물들이 조용히 성문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주변을 살핀 후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고 잠시 후, 일단의 기사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 역시 주변을 살핀 후 앞서 떠난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사들이 떠나간 자리에 두 마리의 말과 두 사람이 남았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조용히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였다.
“쯧쯧.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그렇게 두렵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함께 섬뜩한 검기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차분하게 쏟아지는 검기를 막아 냈다.
검기와 검기의 충돌이지만 별다른 폭음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번쩍이는 검기 사이로 서로의 얼굴이 잠깐씩 비칠 뿐. 순식간에 공격과 방어가 끝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멈춰 서로를 바라본다.
“막지 않을 건가?”
“막으려 했다면 이 문이 열리기 전에 막았겠지.”
“막을 생각이 없다면서 방금 그건 뭐지?”
“글쎄. 작별 인사?”
“싱거운 놈. 그래도 마지막일지 모르는 순간에 겨우?”
“흐흐. 바란다면 당장이라도 네놈 목을 잘라 줄 수도 있다만? 그러길 바란다면 말해. 당장 내려갈 테니까.”
“거절하지. 오늘은 좀 바쁘다.”
“・・・・・・ 다시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가볍지만 뼈가 있는 말을 나누던 어느 순간이었다. 외성 위에 올라 있던 남자가 진한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아래쪽에 있던 덩치 큰 남자도 잠시 말이 없었다.
“검후의 뜻이냐.”
“그분이 아니면 누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겠나. 마지막으로 감사해라.”
“그분은…… 후~ 언젠가 지금 결정을 후회하실 거라고 전해 드리면 좋겠군.”
“미친놈.”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과연 검후가 후회할 일이 또 생길까? 한 번 당한 일을 그녀가 또 당할까?
그녀가 배신자의 존재를 잊는 순간이 있기나 할까.
그런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검후가 후회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실은 두 사람 다 알았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남기는 것은 다른 의미를 담은 것이기도 하다.
“부디 전장에서 다시 보자.”
“……전장에서.”
마지막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그들은 이후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한참을 바라본 남자는 작은 한숨과 함께 저 멀리 검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후~ 드디어 인가.”
순간 가린 구름 사이로 나온 달빛에 드러난 얼굴.
흑색 기사단장 카일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