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10화
1445화
이러한 변화를 이드 혼자만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전과는 기질이 변한 것 같아요.”
일리나가 말했다.
기억 속에 담아 뒀던 감각을 떠올리는 듯 말랑말랑한 입술을 만지는 모습에 이드는 귀엽다고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이 정도 변화라니. 운 좋게 대오각성의 계기라도 있었나 보죠.’
말이 거창해서 대오각성이지, 결국은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 형태가 무엇이든 마르텔의 변화는 진짜였다. 특히 기질이 변했다.
기질이란 단순한 느낌의 표현이 아니다. 기질이란 인간의 내면과 무공의 성질이 투영되어 나타나는 성질이었다.
그런 만큼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쉽게 변하지 않는 것임에도.
마르텔은 변해서 나타났다.
“마치 폭포가 강물이 된 것 같아요.”
“그거 정말…….. 완벽한 비유네요.”
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하자, 일리나가 민망하다며 어깨를 툭 하고 친다.
하지만 이드는 진심이었다.
거친 계곡의 끝에서 사납게 쏟아지는 폭포.
그 모습이 꼭 블러디 혼이라는 별명과 닮아 있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어떤가. 거친 물살 같던 기운은 잔잔하고, 사납게 쏟아지기만 하던 기세는 조용히 고여 멈춰 있었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의 변화였다.
아무리 사별삼일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이 정도의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근간이 되는 내공이라도 바꾸지 않는 이상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마르텔이 뿜어내는 내력을 보면 결코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지금처럼 상황이 좋지 않은 때에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큰 깨달음으로 인해 기질까지 변했다는 말인데.
“이거 생각보다 기대해 볼 만할지도 모르겠어요.”
용감한 죽음을 내려 달라는 전언을 받을 때는 시시하게 끝날 거라고 예상했었다.
마르텔과 검후 둘 다와 검을 나눠 본 이드가 보기에 저 둘의 실력 차는 좁힐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지금 나타난 변화를 보자면 아무래도 그런 생각에 변화가 필요한 것 같지 않은가.
이런 이드의 감상에 일리나 역시 한 명의 무인으로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반대로 불안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설마 지금 그 말씀은.. 검후께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까?”
클라인 백작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드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드의 말이기에 감히 그에 대해 쉽게 부정하지도 못하고 있는 혼란한 상태랄까. 그에 대해 이드는 당연하지 않느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목숨을 건 싸움이잖습니까. 위험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죠. 하지만 검후가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큰 위험은 없을 겁니다. 작은 상처는 몰라도…….”
“검후님 옥체에 상처라니요! 그건 아무리 작아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럴 게 아니라 명예 후작께서 당장 나서 주셔야.
“정말・・・・・・ 그러길 바라요?”
아직 전투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걱정한 클라인 백작의 호들갑에 그의 말을 끊고 질문을 던진 이드.
뻔한 일이지만 당연히 검후가 원하지 않을 일이다.
애초에 다치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녀가 지금처럼 검후로 불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고.”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는 클라인 백작은 진퇴양난에 빠져 울상이 되었다.
“그래도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기 마르텔의 실력이 늘어난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검후의 실력도 늘었으니까 말입니다.”
감금된 시간 동안 놀고 있지만은 않은 검후다.
그리고 구출된 이후로도 틈만 나면 이드와 일리나를 잡고 검을 휘둘렀던 검후다. 그녀의 무공은 느리지만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럼…… 믿겠습니다.”
물론 이미 걱정이 태산인 클라인 백작을 완전히 안심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말이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한편, 클라인 백작의 이런 걱정을 알지 못하는 검후는 마주한 마르텔이 보여 주는 변화에만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마르텔을 가르친 당사자인 만큼 그녀가 느끼는 놀라움은 컸다.
“지금・・・・・・ 검을 버린 거니?”
“보신대로입니다.”
“정말, 정말로 블러디 혼을 버렸다고?”
“막상 버리고 보니 편하더군요. 그리고 사실 저는 그 별명이 싫었습니다.”
편하다는 것은 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르텔은 개운한 얼굴로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그 모습 어디에도 아직 손에 남은 장검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방어는 생각도 않고 활짝 펼친 두 팔은 마치 새의 날개처럼 보였다.
검후는 이런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놀랍구나. 그렇게 버리라고 잔소리를 해도 버리지 않던 블러디 혼을 너 스스로 버리는 날이 오다니.”
“하하하. 저 스스로도 놀라고 있습니다.”
“그래. 그나저나, 정말이지 지독하게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내가 버리랄 땐 그렇게 싫다더니 말이다.”
뭐든 말과 반대로 하는 아이를 돌본 적이 있는가.
그때의 심정을 다시 떠올린 검후의 눈꼬리에 짜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마주한 마르텔이 흐흐흐 하고 능글맞게 웃기 시작했다.
“어쩌겠습니까. 제 성격이 그런 것을. 그렇지 않아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잔소리하실 때 진작에 버렸으면 더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좋았을 것이다.
마르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반성했다.
그것은 비단 무공 실력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훌훌 털어 버린 마르텔이 이내 불퉁한 얼굴로 불만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데는 검후님의 탓도 있습니다.”
“이놈이! 그게 왜 내 탓이란 말이냐?”
난데없는 책임 전가에 검후 또한 진심으로 발끈했다.
그에 마르텔이 들고 있던 검을 느릿하게 그어 내리며 답했다.
“이거 말입니다. 밴딩! 블러디 혼은 이 지겨운 수련에 대한 최고의 반발이었습니다. 전 이 블러디 혼을 통해 밴딩의 무의미함을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 멍청한 것아. 네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고 그게 무의미한 수련이 되는 것이냐?”
검후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과거 제자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둔함에 숨이 턱 막힌 것이다. 동시에 과거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세 제자 중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놈이 바로 마르텔이었다.
밴딩의 궁극적인 목적은 흐름에 대한 관조에 있었다. 다른 말로는 맥을 읽어 내고, 적을 살피는 방법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었다. 그에 있어 밴딩은 최고의 수련 방법이었다.
무공을 깊이 수련하는 과정에서 이를 깨달은 검후는 밴딩 수련을 체계화했다.
과거에도 밴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밴딩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역사와 전통이 있는 수련법이었다.
무엇보다 이 밴딩을 통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올라선 기사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중에는 큰 공을 쌓아 역사에 기록된 기사가 부지기수였고, 이들의 일대기에 빠지지 않는 수련법 중 하나가 밴딩이기도 했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봐도 밴딩의 효과는 확실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검왕 페시딘도 이 밴딩의 효과를 톡톡히 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로 인해 한때 소드 팰러스에서 밴딩에 대한 열풍이 일었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증명된 수련법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효과 없음을 증명하겠다니.
이게 태양이 뜨겁지 않음을 증명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한때 그의 스승이었던 검후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못할 짓을 했어도, 한때 내 제자였던 놈이 이렇게 바보였다니.
“쓰읍.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저도 압니다. 제 말이 틀렸다는 거. 무의미하지 않은 수련법이라는 거.”
“그걸 이제 알았다는 점이 문제다.”
“다릅니다. 제 말은, 무의미하지 않은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그걸 명예 후작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밴딩 수련법은 제가 배운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드의…… 밴딩이라면…….”
여기서 갑자기 이드가 언급될 줄이야.
검후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 이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드 팰러스에서 만검에 대한 수련법을 알린 것은 사실이니까.
거기에 더해 그것이 문제가 되어 마르텔과 다투기도 했었다.
“각성의 계기가 이드였나 본데요?”
“그러게요. 이거 참.”
이드는 멋쩍은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힐끔힐끔 자신을 향한 클라인 백작의 눈초리도 아프다.
그러나 마르텔의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의 변화에 만검이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니, 이에 대해 부정하기도 어렵다.
정말이지 어린아이의 말간 웃음 속에도 있는 것이 깨달음이라더니 말이다.
이런 기분은 검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드라면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밴딩이라면 내가 정립한 밴딩보다 뛰어날 가능성이 충분하지.”
자신의 무공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가. 검후는 그에 대해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문득 궁금하구나. 네가 보았다는 명예 후작의 밴딩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궁금하면 알려 달라 하십시오. 검후님의 요청인데, 설마 명예 후작이 싫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야겠다. 하지만 지금은 명예 후작의 밴딩보다, 그로 인해 네가 어떻게 변했을지가 더 궁금하구나. 어디, 네가 해석한 밴딩을 보여 주겠느냐?” “
그 말씀 기다리던 차였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람이 찬 듯 둥실둥실하던 마르텔의 기세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 모습은 앞서 일리나가 언급한 대로 흐르는 강물 같았다. 그에 검후도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에 든 검을 본 마르텔이 순간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그래. 네가 전령을 통해 내게 돌려보낸 것이지.”
“…..”
“원래는 내 검을 쓰려 했는데. 이걸 받으니, 생각이 달라지더구나.”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검후님은 성격이 나쁜 것 같다고 말입니다.”
“좋은 사람에겐 좋고, 나쁜 사람에겐 나쁜 것일 뿐이다.”
“그럼 전 나쁜 놈이겠군요.”
“어떻게 기억될지는 이 싸움이 끝나 보면 알게 되지 않겠느냐.”
결국 끝에 남게 될 것은 자신이라는 검후의 말.
마르텔은 그 말에 별다른 반박 없이 검과 함께 달려들었다.
아무런 사전 준비 동작도 없는, 기습과 같은 공격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