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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11화


1446화

옛날로 돌아간 듯 편히 말을 주고받던 검후와 마르텔.

그러나 이런 겉모습과 달리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가슴에 담아 둔 검을 단 한순간도 온전히 내려 둔 적이 없었다.

마르텔이 야영지에 발을 들인 바로 그 순간부터.

그랬기에 마르텔의 공격에 대해 비겁하다고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스스로의 모자람에 대한 고백이나 다름이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검후는 결코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비겁하다!”

검후만 관련되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클라인 백작 말이다.

그는 마르텔을 손가락질하며 버럭버럭 화를 냈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드 역시 마찬가지다.

마르텔을 눈여겨보고 있던 이드는 그의 축이 되는 발이 땅속으로 한 뼘이나 파고드는 순간부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직후 응축된 힘을 터트리며 공간을 삭제시켜 버리는 듯한 이동을 보고 궁신탄영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온 마르텔의 첫수는 의외로 단순하고 정직한 것이었다.

검후의 머리를 향해 달려 나가는 힘을 담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직도황룡의 수직 베기.

물론 초식 자체가 단순하다 해서 쉬운 일 수는 아니었다.

삼류 무공도 고수가 사용하면 신공절학이라고 했듯, 마르텔의 직도황룡은 정말 하늘에서 누런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은 힘과 기세를 품고 있었다. 

콰우우우!

검이 정점에서 출발하는 순간, 검후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기묘한 력도가 발생하는 것을 보면 더욱더 그 신묘함을 감탄할 수밖에 없다.

다만 검후에 있어서는 그러한 신묘한 력도도 크게 대단할 일은 아니었다.

“……”

그녀는 지극히 무심한 표정으로 가볍게 발을 굴러 력도를 파훼하고, 아지랑이 같은 가벼운 검형으로 마르텔의 직도황룡을 끊어 냈다. 전형적인 유능제강이었다.

그리고 아지랑이를 따라 피어나는 현란한 검식.

난화십이식의 일식 난화였다.

이드와 일리나가 익히고 있으며, 쉴라와 두 신입에까지 전수되고 있는 난화십이식. 그러나 검후의 난화십이식은 그 누구와도 달랐다. 보기에 따라 이들 중 난화십이식을 가장 깊이 궁리하고 연구한 사람이 바로 검후였기 때문이다. 이드가 전수한 무공이기는 하지만 지구와 그레센의 시차로 인해 실제 수련에 투자한 시간은 검후가 압도적으로 길었다.

이 부분에서 일리나도 같은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엘프와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징이랄까.

그것도 아니면 인간이 가지는 힘에 대한 탐욕이랄까. 특히 검후의 경우는 국가가 힘을 쏟아 연구에 동참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시간의 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런 검후의 손에서 펼쳐지는 난화는 고고하고 유려했다.

마치 춤을 추는 듯 실제 속도와 달리 느릿하게 느껴지는 검기의 꽃잎들이 마르텔의 요혈 요혈을 파고들었다. 언뜻 힘없이 하늘거리는 드레스의 옷자락 같은 검기였으나, 실제 어느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저 중 하나라도 허용하는 순간 마르텔의 전투력은 삼 할 이상 감소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렇게 당하면 너무 쉽지.’

검 한번 휘두르고 죽을 것 같았으면 용감한 죽음을 바란다는 오만한 전령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요청은 능력이 되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

아니나 다를까. 마르텔은 어렵지 않게 검후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화르르륵!

난화의 꽃잎을 불태우는 그의 검기는 마치 맹렬한 불길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나 그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언뜻언뜻 비치는 익숙함이었다. 충분히 납득가는 모습이기는 했다.

한때 스승과 제자였던 두 사람이었다. 검의 가르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 바로 검을 이용한 대련이다. 마르텔이 삼검왕이 되기까지 과연 검후와 얼마나 많은 대련을 가졌을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당연히 다 셀 수도 없을 정도일 테니까.

이러한 사실만 보자면, 이 전투는 쉽게 결판이 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마르텔이 검후의 무공에 대해 익숙한 것처럼 검후 또한 마르텔의 무공에 익숙할 테니 말이다.

다만 이런 정보가 꼭 통하는 것은 아니다.

고수의 손에서 사용되는 삼류 무공이 어째서 신공절학이 되는가. 어차피 삼류 무공의 초식이야 동네 꼬마도 대충 아는 것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알고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호흡과 검로와 변식의 무쌍함이 해당 무공의 한계를 깨어 주기 때문이다.

즉, 흔히 말하는 알아도 막을 수 없는 수법이 되는 것이다.

검후가 펼치는 난화십이식도 그러했다. 난화십이식을 대성한 검후는 매초, 매 순간 난화십이식을 새롭게 조합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난화와 오늘의 난화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어쩌면 지금 마르텔은 비슷한 옷을 입은 전혀 다른 여자를 보는 느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경험이라는 정보의 이점이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아도 경지가 높은 검후가 더 유리해진 것일까.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떠르르르릉!

검과 검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소음이라기에는 그렇게 귀에 거슬리지 않는 소음.

이드가 지켜보는 사이 벌써 12번의 공격을 주고받았고, 그사이 사용된 초식은 모두 52개.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검후는 익숙하게 마르텔의 허점을 찌르지 못했다. 오히려 가끔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뿐만 아니다. 기본적으로 전투를 이어 가는 검후의 눈빛은 신선함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이미 마르텔에 대한 깊은 분노는 뒷전이 된 것 같았다. 그야말로 무인의 본능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지금 마르텔이 보여 주는 모습이 전에 없이 신선하고 새롭다는 의미였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드도 조용히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마르텔의 블러디 혼은 이드 역시 상대한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검을 버린 시점에서 예고된 일이긴 했지만, 그때의 경험에 비교했을 때 지금의 마르텔의 검법은 많은 곳에서 달라져 있었다.

‘저걸 단순히 달라졌다 정도로 취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다.

현재 마르텔이 보여 주는 검법은 달라졌다는 말로 취급할 수 있는 수준을 넘고 있었다. 달라졌다기보다는 진화했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 정도로 마르텔의 무공은 한 차원 높아져 있었던 거다.

어쩌면 지금의 마르텔이라면 세상이 알고 있는 삼검왕의 순위를 바꿔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상황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무인의 본능이 튀어나왔다고 해도, 오늘이야말로 마르텔이 숨을 쉬는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확실히 흥미롭네. 도대체 만검에서 무엇을 얻었기에 저렇게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 거지?’

이드는 지난 경험 속 마르텔과 눈앞의 마르텔을 비교했지만, 쉽게 답을 얻기가 힘들었다.

마르텔이 직접 만검이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하기는 했지만, 그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이란 같은 산을 보고도 서로 다른 감상을 내놓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대목이라면 바로 화(和)였다.

마르텔은 만검에서 화를 얻었음은 확실했다. 넘치다 못해 폭발하던 힘이 이제는 조용하지만 힘찬 불길로 변모한 저 모습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콰르르릉!

회전하는 마르텔을 따라 불의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검후의 비혼화에 대한 방어로 내어놓은 수법이었다.

한번 출몰한 불의 바퀴는 방어에만 그치지 않고, 맹렬한 회전을 더해 갔다.

휘오오오오!!

회전으로 발생한 흡입력이 검후를 빨아들이며 용오름을 만들어 냈다. 불길을 머금은 바람의 용.

쫘자자작!

그에 검후의 검에서 일어난 붉은색 번개가 용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용이 세상을 태우는 불길을 뿜어내지 못하도록 말이다. 긁적긁적.

이드는 이런 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러한 모습에 일리나가 물었다.

“아니, 묘한 기시감이 들어서요. 어쩐지 마르텔의 검법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그레센에서 말인가요?”

“아뇨. 벽 너머에서요.”

“그건 이상하네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일리나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드의 표정을 통해 그가 말하는 벽 너머가 중원 또는 현대 지구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린 까닭이다.

차원의 인이 아니라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가로막힌 세상. 그런 세상의 검법을 마르텔이 어떻게 익히고 있단 말인가.

“그러게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비슷하네요.”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저기서 검후를 상대로 마르텔이 보여 주고 있는 무공은 이전 자신이 보았던 어느 문파의 무공과 형제처럼 닮아

있었다.

당장 지금의 수법도 그렇다.

거리를 좁힌 마르텔이 검후에게 달려들며 화룡의 불길과 같은 뜨거운 검풍의 파도를 밀어냈다.

처음 직도황룡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무려 검후를 상대로 우직하게 접근전을 고집하고 있는 마르텔이다. 어느 면으로는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의 모습이랄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마르텔의 태도가 아니었다.

마르텔의 검 끝에서 뿜어진 불그스름한 검풍이 지나는 자리에 불길이 일어났다. 땅에 붙어 있던 잡초가 순식간에 말라 불이 붙어 버린 것이다. 이드는 그 모습을 담은 하나의 초식 명을 꺼내 놓았다.

“축융화후(祝融火朽).”

“네?”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일리나.

그때, 마르텔의 검식이 변함에 따라 이드의 입이 다시 달싹거렸다.

“화룡등천.”

그와 함께 저 앞에서는 땅을 가로지른 불길에 검후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에 그 맥을 잘라 내고 날아드는 검후.

그러자 목이 잘린 화룡이 몸부림을 치듯 폭염이 치솟아 올랐다.

“토염.”

화산처럼 치솟아 오른 불길은 순식간에 검후를 먹어 치웠다.

“거, 검후님!!”

그에 놀라 엉덩이를 들썩이는 클라인 백작.

하지만 그가 참지 못하고 나서기도 전에 검후는 불길을 뚫고 나왔다. 강렬한 불길을 뚫고 나왔다기엔 어디 하나 그을린 구석도 없는 깔끔한 모습. 그런 검후의 주변으로 백색의 강기가 회전 중이다.

검후는 그대로 검을 들어 마르텔을 가리켰고, 그녀를 지키던 화령화는 명령을 받은 말벌처럼 무리를 이뤄 쏟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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