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12화
1447화
강기화는 검후의 검로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슈르르릅
난해한 움직임 속, 세 자릿수에 이르는 강기는 작은 충돌도 없이 하나의 형태를 쌓아 갔고.
그렇게 화령화의 백색 강기가 만들어 낸 것은 드릴이었다.
보고 있던 이드로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중심 검형을 기준으로 빠른 회전을 이어 가는 모습은 분명 부정하기 힘들 정도로 드릴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드릴의 모습과 용도를 알고 있는 이드였기에 떠올린 것.
검후와 마르텔에게 있어 이 형태는 드릴이 아니라 충차였다.
성문을 깨는 충차.
외형이 그러했고, 속에 도사린 무거운 힘의 쓰임도 충차와 목적을 같이했다.
아마 이걸 이대로 어디 성문 앞에 가져다 두면 뚫지 못하는 성문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드릴 속에 깃든 파괴력을 빠르게 알아차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전진을 멈추고 뒷걸음질 치는 마르텔이다.
그러나 애초에 겨우 그딴 어설픈 대응으로 비켜 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그르릉!
마치 어딜 도망치냐는 듯 강기 회전체 사이를 비집고 나온 무형의 기운이 마르텔을 따라붙었다.
보통의 사람에게는 공포 그 자체이리라.
저기에 붙잡히는 순간, 그대로 딸려 들어가 드릴 속에서 갈려 버릴 테니까.
그러나 마르텔은 달랐다.
그는 되레 자신을 향한 무형의 기운을 잘라 내려는 듯 하단으로 검을 향했다. 그에 따라 그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딘가 눈에 익은 검법에 그를 눈여겨보던 이드는 어쩐지 뒤에 이어질 마르텔의 검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축융부염(祝融符殮).”
“네?”
“이번 초식의 이름이요. 불타는 축융의 분노에 모든 사악은 감히 범접하지 못하노라.”
눈을 깜빡이는 일리나에게 대답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하단세에서 시작된 검막이 완성되자 마르텔을 감싸고 있던 열기가 검막으로 빨려 들어가며 불타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르!!
그렇게 일어난 화염은 강력했다.
그것은 단순한 불길이 아니었다.
검기를 넘어서는, 검염(劍焰).
검강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대신 질기고 끈끈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검염은 아무나 피워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검염의 주인이 본래부터 강력한 양강지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또는 거대한 양기를 품은 영약을 복용하거나.
그러나 마르텔은 이 두 가지 조건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무공 근간이 되는 내공은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균형을 중시한 정종의 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렴, 검후에게서 나온 무공인데 어련할까.
한데, 그럼 마르텔은 대체 어떻게 검염을 피워 낸 것일까.
혹시 삼양지체라서 타고난 양기가 강한 것일까? 성격적으로는 납득이 가는 부분이긴 하지만.
‘뭐, 지금은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다. 검염이라는 결과물이 나타난 이상, 과정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지금은 검염의 근원보다 그 검염으로 피워 내는 검법에 더 관심이 갔다.
그러는 사이, 불길의 커튼이 드릴을 휘감았다.
드릴의 강력한 힘이면 얇은 천쪼가리는 갈기갈기 찢기는 것이 맞지만, 때로는 그 천에 걸려 드릴이 멈추기도 한다. 이번 결과는 그 중간이었다.
축융부염이 드릴을 온전히 멈춰 세우진 못했지만, 대신 그 힘을 많이 소진시켜 약하게 만드는 데에는 성공한 것. 그거면 충분했다.
자신이 물러난 까닭은 더 큰 전진을 위해서라는 듯, 마르텔은 화령화가 약해진 순간을 노렸다.
꼬리에 불붙은 놀을 본 일이 있는가. 지금 마르텔의 모습이 딱 그랬다.
뿌드득!
모든 힘을 쥐어짠 마르텔의 전신에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 힘이 검 끝에 모이는 순간, 검이 요란하게 요동을 쳤다.
그렇게 마치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검신으로 마르텔은 화령화의 등을 갈랐다.
쩌러러렁!
요란한 쇳소리와 불꽃이 튀었다.
검염이 옮겨붙은 강기의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피싯.
당연히 그 범위 안에 있던 마르텔도 사방으로 튀는 파편을 피하지 못하고 얼굴과 몸에서 피를 흘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 발끝에
힘을 더해 화령화를 넘어 그 뒤에 있는 검후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공격권 안에 들어온 검후를 향해 이빨을 들이미는 검격.
검염에 물든 은빛 검신이 불길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검후를 휩쓸어 간다.
콰아앙!
산사태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의 폭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훅하고 밀려왔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폭발의 중심지에서는 검후와 마르텔이 맹렬하게 검을 나누고 있다.
대륙에서 한 손에 꼽히는 최고 기사들의 결투는 과연 굉장했다. 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다.
“아이고, 검후님. 옷이・・・・・・ 옷이!!!”
뭐, 그런 것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에만 신경 쓰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볼만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에요.”
클라인 백작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는 이제 호기심을 넘어 살짝 흥분까지 한 모습으로 두 사람의 전투에 눈을 떼지 못했다.
“설마 이 그레센 땅에서 축융검법(祝融)劍法)을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세상일이란 예측 불가투성이야.”
콕콕.
이런 이드의 혼잣말에 결국 참지 못한 일리나가 옆구리를 찔렀다.
“혼자만 알지 말고 저도 알려 주면 좋겠어요. 축융부염이라고 했던가요? 마르텔 경의 초식에 든 검의를 어떻게 미리 아신 건가요?”
설명을 바라는 일리나의 질문에 이드는 잠시 전투에서 눈을 뗐다.
그런 김에 은색 기사단의 전장도 함께 살폈다.
과연 수에서는 적들이 압도적이지만, 기세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은 전투의 초반이기 때문일까.
은색 기사단들이 전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작은 부상은 있어도 중한 부상자는 없고, 위험에 빠진 기사도 없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조금 더 이쪽에 관심을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이드는 설명을 기다리는 일리나를 보며 말했다.
“제 고향에는 형산파라는 곳이 있어요. 불의 신인 축융을 모시는 꼰대들이 모인 문파랄까. 아무튼, 이 문파는 특히 검법으로 제법 유명해요. 세간에는 오악검파라고, 검술로 유명한 문파를 꼽으면 빠지지 않는 곳이죠. 축융검법은 그 문파의 대표 검법 중 하나예요.”
형산파의 진짜 비전은 원공검법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도가 문파라는 근간 때문일까, 아니면 도가 의식에 축융검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일까.
세간에 형산파의 검법으로 유명하기로는 축융검법이 가장 유명했다.
그렇다고 축융검법이 원공검법에 비해 많이 처지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양강계열의 검법으로서는 수위로 꼽히는 검법임은 확실하다.
이드도 직접 상대해 본 경험은 없지만, 우연한 기회에 축융검법을 견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본 축융검법의 모습이.
“지금 마르텔이 펼치고 있는 검법과 꼭 닮아 있었어요. 아니, 마르텔의 검법이 축융검법을 닮은 건가? 아무튼, 정말 신기할 정도로 비슷해요. 마치 한배에서 나온 형제를 보는 것 같을 정도로 말이죠.”
“그럼 아까부터 이드가 말하던 초식의 이름이?”
“전부 축융검법에 있는 초식들이에요.”
어때요. 신기하죠?
그런 감정을 담은 이드의 표정을 마주한 일리나가 놀란 듯 큰 눈을 깜빡거렸다.
“그렇게 비슷한 검법이 나오는 것이・・・・・・ 가능한가요?”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제법 많이 닮아 있는 무공이 무림에도 존재했었으니까요.”
십인십색이라고 했다.
같은 꽃을 보고도 막상 종이에 옮겨 그리면 그 모양이 다른 것처럼, 같은 주제 의식을 가지고 무공을 만들어도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태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꼭 그럴까.
십인십색과는 반대로 가까워질수록 서로 닮는다는 말도 있다.
불길에 깊이 빠지면 그 속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이 과연 크게 다를 수 있을까?
사실 이건 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상황과 인물에 따라 그 결과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문제다.
그렇기에 무림에도 이에 대한 답이 둘 다 존재한다.
똑같이 버드나무를 보고 무공을 창안했는데, 한쪽은 권법이 나오고 다른 쪽은 검법이 나오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구름을 보고 무공을 창안했는데, 그 성질이 매우 비슷한 도법이 나오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지금 마르텔의 검법이 형산파의 축융검법과 비슷한 것이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절대 흔한 일도 아니었지만.
특히 검법의 근간이 되는 무의는 물론, 그 초식의 형태까지 비슷한 경우는 더더욱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드도 눈앞의 전투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좀 더 정확히는 마르텔이 펼쳐 내는 검법에서 말이다.
이런 이드의 유난 때문일까. 일리나의 얼굴에 살짝 걱정이 떠올랐다.
“혹시 축융검법이 검후의 난화십이식보다 뛰어난가요? 아니면 상극 관계에 있다거나.”
“전혀요.”
이드는 푸근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과한 관심이 일리나의 걱정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현재 서로 치열하게 오가는 공방은 일견 백중세로 보이기도 한다.
어느 한쪽이 확실한 우세를 잡았다고 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할까? 물론 힘에서는 검후가 우위에 선 모습이 분명하지만, 마르텔은 그런 위험을 잘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겉모습이 아닌 좀 더 깊은 무리를 들여다보면, 전투의 양상은 분명할 정도로 검후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처음 120초까지는 그래도 비등하다고 해 줄 만했지만, 어느 순간 마르텔의 초식이 반복되기 시작하자 그런 위태로운 비등함도 사라져 버렸다. 지금 전투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확실하게 검후였다.
만약 그녀가 조금 손해 볼 것을 감수만 하고 독하게 손을 쓴다면.
‘언제라도 이 전투를 끝낼 수 있지.’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드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아마 일리나도 전혀 모르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이드의 유별난 관심에 걱정이 된 것이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두 무공 간의 상성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축융검법이 훌륭한 검법이기는 하지만, 난화십이식에 비하면 반딧불과 달만큼 차이가 나죠. 난화십이식은 신공절학인걸요. 거기에 더해 사용자의 무위도 저렇게 차이가 나면…….”
지고 싶어도 지기 힘들다.
아마 저렇게 비등한 전투가 이어지는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검후 역시 이드와 같은 호기심이 일어난 까닭.
거기에 더해, 과거 제자였던 마르텔이 온전히 그의 검법을 완성하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