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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13화


1448화

검강과 검염을 휘감은 두 자루 검이 교차하며 허공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수놓는다.

이와는 반대로 검 아래 선 두 검주의 눈빛은 깊었고, 발걸음은 고요했다.

휘익-

휘리릭-

물론 그런 중에도 검은 멈추지 않는다.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도 수백 번의 공방이 이뤄졌다. 다만 신기한 것은 그 많은 공방 속에서도 쇳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검과 검이 충돌하는 물리적인 접촉이 수백 번의 칼질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의미.

허초를 극한으로 이용한 초식 운용의 결과였다.

크게 어긋났던 옛 사제의 마음이 미묘하게 맞물린 순간이라고나 할까. 보기에 따라서는 잘 짜인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모습.

이런 기묘한 공방 속에서 검후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나름 지긋지긋한 관계인 마르텔의 새로운 면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분을 느끼는 중심에는 마르텔의 축융검법이 있었다.

화르르르륵-

이글거리는 검염을 휘감고 허공을 지나는 검.

제공권 밖에 있음에도 세상을 태워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기에 피부가 따끔거리고, 주르륵 땀이 흐른다.

이전까지의 마르텔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매우 낯선 현상이었다. 도대체 언제 이런 검법을 익힌 것일까.

누가 이런 검법을 만들었을까.

혹시 자신이 감금된 사이 삼검왕이 새롭게 만든 것일까. 존 워스라는 가면을 쓰고 있던 혼돈의 파편이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된다. 하지만

아니다.

존 워스로서의 그는 방관자에 가까웠다.

직접 검법을 만들어 내는 이런 수고를 할 거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페시딘일까?’

가장 능력이 좋지만, 동시에 가장 괘씸한 인물.

하지만 검후는 곧장 부정했다. 능력은 충분하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검법을 만들었다면 선뜻 내어놓을 그릇은 아니다.

오히려 비장의 수로 꼭꼭 숨겨 둔다면 몰라도.

무엇보다 그런 외부의 도움이 없었다는 가장 큰 증거가 있었다. 바로 이 검법에 짙게 배어 있는 마르텔의 자취였다.

새롭지만 어딘가 익숙한 검식의 흐름.

사납게 보이는 중에 독사처럼 은밀하고 집요한 검의.

그리고 무엇보다 거침없는 기질까지.

이러한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자 이 훌륭한 검법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마르텔 겔로이드가 바로 내 아버지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 마르텔이 검법을 만드는 복잡하고 섬세한 일을 해내다니 말이다. 그것도 이처럼 훌륭한 검법을.

“다만 아쉽구나. 검로가 거칠다.”

새롭고 신선하며 뛰어난 검법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닌 듯 검로가 매끄럽지 못하다. 마치 길들지 않은 야생마를 보는 기분이랄까.

자신과 같은 상대에게 이는 매우 큰 결점이다.

지금도 보라.

하나의 초식을 끝내고 다음 초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작은 틈이 발생한다. 초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초식 이전에 검로가 매끄럽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허점이었다.

검후는 이렇게 드러난 허점을 매섭게 두드렸다.

그건 마치 모난 쇳덩이를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망치질 같았다.

쩌어엉!

“쿠윽!”

이 참격을 받아 내는 순간, 쪼그라든 마르텔의 폐가 기침을 쏟아 낸다. 당연하다. 이 단순한 망치질에 담긴 힘은 거대한 바위를 가루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으니까.

물론 그 정도로 마르텔은 쓰러지지 않았다.

뒤로 튕겨 나며 두 줄의 깊은 족적을 남긴 그는 몸에 남은 충격을 뜨거운 호흡에 담아 뱉어 냈다.

“흐흐흐. 저도 압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제 역량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걸. 무엇보다 더 다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개시 전에는 그래도 모자람이 보였는데, 막상 써 보니 야생성이 살아 있는 지금이 제 입맛에 맞는 거 같습니다. 사실 완전히 길든 놈보다 나름 반항하는 맛이 있는 지금이 저와 더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래 보이기도 하는구나.”

검후는 솔직히 인정했다.

이건 이 검법이 마르텔의 손에서 태어났기에 오직 그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대답에 흥건히 흘러내린 땀을 닦아 내던 마르텔이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큰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역시 검후님이라면 인정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페시딘과 존 워스의 대답을 듣지 못해 아쉬웠는데, 검후님의 대답을 들으니 그 아쉬움이 싹 가시는 것 같습니다. 나쁜 놈들. 나만 혼자 놔두고 말입니다.”

“외로우냐? 차라리 같이 떠나지 그랬느냐.”

“에이, 전 그런 겁쟁이는 싫습니다. 차라리 용감히 죽는 것이 낫지, 쥐새끼처럼 그림자에 숨어 다닐 자신은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페시딘을 향한 마르텔의 진심인 것일까.

마르텔은 전투 중에 베이고 부스러진 옷자락을 툭툭 털어 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야영지를 살폈다.

검후가 앞에 있음에도 거침없이 눈을 돌린 것이다.

마치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듯.

물론 검후는 그 틈을 노리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의 목을 노렸다면 앞서 네 번의 완벽한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마르텔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때 이미 목을 베었을 것이다.

대신 검후 또한 은색 기사단과 쭉정이들이 어울린 전장을 살폈다.

전황은 그녀의 예측에서 살짝 틀어진 상태였다. 물론 좋은 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검후는 수적 열세에 대비해 이드와 일리나 일행에게 은색 기사단의 지원을 부탁해 둔 상태였다.

그랬기에 은색 기사단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드러난 결과는 애초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전투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은색 기사단은 적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렇다. 압도다. 기백으로나, 실력으로나 은색 기사단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물론 그런 중에도 부상자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가벼운 정도였다. 일리나와 이드가 나서야 할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은색 기사단의 힘만으로 쭉정이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 순간.

퍼석!

막 결정적 허점을 발견해 은색 기사의 등을 노리던 쭉정이의 머리가 갑자기 터져 버린 상황이 발생했다.

무음, 무형의 은밀하고 정밀한 일격.

사방의 적을 상대함에 정신이 없는 기사는 자신이 위기를 넘겼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까딱까딱.

그와 반대로 머리를 날려 버린 당사자인 이드는 마치 자기가 했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이런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검후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드의 조력을 알아차린 마르텔에게 말했다.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것들이구나. 실력으로도 기사로서도 평소의 너라면 저런 자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을 텐데.”

어디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으로 끝나다 뿐인가.

다른 사람들이 말리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어디 하나는 부숴 놓고 작전에서 빼 버렸을 것이다.

차라리 오만하고 건방을 떠는 것은 웃어넘겨도, 실력도 없이 비겁한 자는 견디지 못하는 성품의 주인이 바로 그였으니까.

“어차피 죽을 놈들인데 아무렴 어떻습니까. 저도 버림받은 불쌍한 놈들을 닦달할 정도로 모질지는 않습니다.”

“흥,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네게 맞아 다리가 부러진 기사만 모아도 분과 하나는 만들 수 있을 것인데.”

“그거야 다 옛날이야기지요. 저도 달라졌습니다. 특히 그런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무슨?”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속담 말입니다. 제가 오늘 죽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정도 변덕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처럼 확신을 가지고, 또 이처럼 가볍게 언급할 수 있는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리 그의 성품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과연 삼검왕으로 불릴 정도의 인물이기는 하구나 싶은 순간이다.

사실 죽음 앞에 서 보지 않은 이상 끝까지 담담할 수 있는 인물이 얼마나 될까. 그건 감금되어 있으면서 몇 번이나 죽음을 각오했던 검후 역시 마찬가지.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문득 묻고 말았다.

“이대로 끝나도 괜찮겠느냐?”

짧지만 많은 의미를 포함한 물음이었다.

그에 물은 검후도 놀라고 마르텔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르텔은 은은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후님께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라서 좀 놀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물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퇴장할 사람은 퇴장을 해야지요. 사라질 때 사라지지 못한 인간의 인생은 추접할 뿐입니다. 전 오늘이 퇴장하는 날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화려하게 준비를 많이 했던데? 그건 미련이 아니니?”

꼬아 듣지 않는 마르텔의 모습에 검후가 다시 물었다.

“전혀 아닙니다. 이건 절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은 후배들에 대한 위자료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유무형의 여러 가지 면에서요. 사고를 친 당사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선배 된 입장에서 어떻게 손해만 안기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손해에 대한 위자료로 준비한 겁니다.”

위자료를 운운하긴 했지만, 그의 말을 풀어내면 속뜻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신이 만든 검법을 소드 팰러스의 후배들을 위해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검후는 순수하게 놀라움을 표했다.

“진심・・・・・・ 이로구나?”

“흐흐흐. 어차피 죽을 놈입니다. 아껴서 뭐 하겠습니까. 이렇게라도 써야죠.”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냐?”

오우거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마르텔이 이대로 죽으면 그의 이름은 추하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검법을 남긴다면? 어쩌면 후대에는 그에 대한 평가가 조금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마르텔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얍삽한 수작은 아닙니다. 어차피 이 검법은 아직 이름도 없습니다. 완성된 것도 아니죠. 끝까지 완성한 사람이 썩 괜찮은 이름을 붙여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르텔은 말과 함께 검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검법에 이름을 붙여 줄’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길. 그것을 마주한 검후의 눈빛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마르텔이 그런 검후를 보며 다시 검을 들었다.

“이제 한 초식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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