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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16화


1451화

붉은 해가 열심히 마른하늘을 달린 결과, 새벽이 가고 아침이 왔다.

짧지 않은 시간.

은색 기사단도 바삐 움직였다.

전투와 용권풍으로 엉망이 된 야영지를 정리하고, 수백 구에 이르는 적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드도 보고만 있지 않고 나서서 손을 보탰다.

그렇다고 직접 손을 움직인 것은 아니고, 정령을 통해 힘을 썼다. 이런 일에 정령만큼 유용한 존재들도 없기 때문이다.

바람의 정령은 사방에 널브러진 시신을 모아 오고, 불의 정령은 망가진 쓰레기를 태우고, 대지의 정령은 지진이라도 난 듯 뒤집어진 야영지 일대를 손봤다.

이내 언제 전투가 일어났었냐는 양 멀끔해진 야영지.

청소의 보람을 느끼며 손을 탁탁 털고 돌아온 이드는 검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작게 혀를 찼다.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거야?”

“복잡한 기분일 테니까요.”

마차의 문턱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채 라미아가 답했다.

그런 그녀의 눈은 검후를 향해 있었다. 마르텔의 시신을 앞에 두고 그대로 멈춰 버린 검후 말이다.

“좀 달래 보지 그랬어?”

“단순한 감정이 아니잖아요. 이런 건 아무도 뭐라 못 해요.”

어림도 없는 소리 말라는 라미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그 제자를 자기 손으로 직접 죽여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감히 검후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사람이 건네는 말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하아. 우리 검후님. 불쌍해서 어쩌나…………….”

이드와 함께 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스폴이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러더니 간절한 눈길로이드를 돌아본다.

“그러지 말고, 이드 님께서 위로해 주시면 어떨까요?”

“어, 자신 없는데……………”

위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할 수는 있지만, 효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위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말재주인데, 이드는 그 부분에서 영 자신이 없었다.

난처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젓는 이드.

다행히 그의 곤혹스러움은 금방 해결되었다.

“저도 딱히 이드 님의 위로는 필요 없습니다. 미안하구나, 많이 걱정했니?”

이쪽의 목소리가 들린 것인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르텔의 머리에 마지막으로 손을 올린 검후가 황금마차 앞에 모여 있는 일행들 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마음은 괜찮으십니까?”

“새삼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을 따를 수 없다는 걸 실감했다오. 오래전부터 각오한 일인데, 막상 당하고 보니 마음 추스르기가 영 어렵구려.” 

“누구라도 그러할 것입니다.”

대비하는 것만으로 만사가 다 해결된다면 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으리라. 그러한 의미였다.

동의하는 클라인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검후는 곧 야영지 한쪽에 쌓인 시신들과 은색 기사단을 거쳐 쉴라에게 시선을 멈췄다.

“수고했다, 단장, 인상 깊은 지휘였고, 훌륭한 전투였다.”

마르텔과의 전투 중에도 은색 기사단을 살핀 것일까.

검후의 격려에 쉴라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저희의 모든 영광은 검후님의 것입니다.”

“고맙구나. 부상자는 없니?”

“중상자는 없고, 경상자만 마흔여덟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상’은 최소 근육이 보일 정도의 부상을 말한다. 피부가 한 뼘 베인 것 정도는 그 축에 끼지도 못한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 포션과 라미아 명예 후작 부인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부상은 모두 회복한 상태입니다. 언제든 전투에 나설 수 있습니다.”

“역시 단장이다. 마무리까지 완벽하구나.”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말해 보거라.”

“적의 시신에 대한 처리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백이 넘는 시체를 쌓아 두고 그냥 갈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하물며 무려 반역자들이다.

“일일이 옮기기에는 수가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 검후님의 소드 팰러스 복귀에 불경하게 시신 따위를 달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단장의 말이 백번 옳습니다. 저런 재수 없는 것들을 달고 갔다가는 두고두고 재수가 없을 겁니다.”

클라인 백작이 쉴라의 말이 옳다며 끼어들었다.

“…….”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차마 버려둘 수 없는 시체가 하나 있었다. 바로 마르텔이었다. 그의 눈이 머리가 분리된 마르텔에게서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마르텔의 시신은 꼭 챙겨 가야 합니다.”

물론 이용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본보기를 위해서였다.

감히 검후를 배신한 자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아무리 명성 높고 실력이 뛰어난 삼검왕이라도 배신의 대가를 피할 수 없음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런 작업에 있어 마르텔의 머리는 최고의 도구였다.

문제라면 이것이 어디까지나 클라인 백작의 계획일 뿐, 정작 검후의 생각은 달랐다는 점이다.

“백작에겐 미안하지만, 마르텔은 함께 돌아가지 않는다.”

“검후님?”

“마르텔의 시체는 이 자리에서 태워 없앨 것이다.”

결심을 굳힌 듯한 검후의 모습에 클라인 백작이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손해가 큰 결정이었다.

결국 클라인 백작이 어렵게 반대의 말을 꺼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마르텔에 대한 처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르텔이 이대로 죽어 사라진다면, 곧 진실을 알게 될 소드 팰러스의 정의로운 기사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힘이 모자라 삼검왕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무엄한 말까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마르텔의 머리를 가져가 성문에 매달자는 것인가?”

제국과 황가에 반기를 든 반역자들은 죽어서도 편히 묻힐 수 없다.

목을 잘라 성문에 걸고 살이 썩어 문드러져 걸어 놓은 목이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걸어 두는 것이 제국의 법이지만.

클라인 백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검후의 명예와 위엄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기에 검후를 설득해야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검후가 말을 이었다.

“날 위한 백작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 다만, 나는 내키지 않는다. 기사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 그럼 묻겠다. 내 소식을 들은 반역자들이 두려움에 겁쟁이처럼 꽁무니를 뺐고, 도망을 포기한 마르텔을 내가 베었다고 말한다면, 과연 그래도 납득하지 못할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답하는 클라인 백작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사실 검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소드 팰러스의 기사들에 있어 검후의 말은 절대적이니까.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소드 팰러스 밖의 세상은 어떨지. 클라인 백작은 그 부분이 조금 우려스러웠다.

“그럼 마르텔은 이대로 태워 보내겠다. 반대는 없는 것이겠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클라인 백작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검후는 라미아를 찾았다. 나무를 잘라 태우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소요되기에 마법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검후의 부탁에 라미아는 선뜻 나서 주었다.

잠시 후

화르르르르-

짧은 주문과 함께, 마르텔의 시체가 주변 땅과 함께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의 기세는 마르텔이 보여 준 검염만큼이나 강렬했다.

아마 모두 타고 나면 불길에 날려서 재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던 클라인 백작이 뒤늦게 깜빡한 문제 하나를 떠올리고는 다시 검후의 의견을 구했다.

“그런데 남은 자들의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저들도 태웁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검후의 대답은 매우 건조했다.

마르텔을 대할 때와 달리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에 클라인 백작이 눈을 끔뻑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대충 묻어 두게. 어차피 반역에 가담한 자들, 죄를 물어야지 않겠나.”

“…….”

차별도 이렇게 노골적이면 할 말이 없다.

이드는 이 모습을 보고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대지의 정령을 소환했다. 저 많은 시체를 하나하나 손으로 묻으려 했다가는 여기서 하루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탁할게. 노르캄.”

쿠르릉.

소환된 대지의 중급 정령은 수백의 시체를 단숨에 땅에 묻어 버리고 그 자리에 작은 동산 같은 무덤을 만들었다.

어차피 다시 파낼 것, 당장 짐승들이 손대지 못할 정도면 충분했다.

“정령이 만들어 주는 무덤이라니. 반역자들 주제에 호사를 누리네요.”

스폴은 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매장이 끝난 야영지에는 마르텔을 태우는 맹렬한 불길 소리만이 들렸다. 쉴라는 그 속에서 조용히 또 차분하게 은색 기사단을 정비했다. 마르텔의 죽음으로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기 전 처리해야 할 일이 모두 끝났기 때문이다.

이제 곧, 검후가 소드 팰러스로 복귀한다.

그런 뜻깊은 날인 만큼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은색 기사단이었다. 누구보다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는 기사들은 전투로 지쳤음에도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한 시간이 지났다.

마르텔은 뼛조각 하나 남긴 없이 온전히 재가 되어 불길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이드는 사그라드는 불길을 보며 말했다.

“끝났네. 이제 좀 만족해?”

“네.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요. 라미아도 고마워요.”

빈말이 아닌지 감사를 전하는 검후의 얼굴에 빛이 났다. 마치 무거운 짐을 덜어 낸 듯한 느낌이랄까.

어찌 보면 인연의 무상함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 보여 이드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우화등선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지?”

“우화등선이 뭔데요?”

물론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검후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대신 누구보다 그 뜻을 잘 이해하는 라미아로부터 웬 헛소리냐며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그사이 준비를 마친 쉴라가 다가왔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좋구나, 그럼 바로 가자꾸나. 아침은 소드 팰러스에서 먹겠다.”

말을 마친 검후가 마차에 올랐다.

그 뒤를 따라 이드 일가까지 탑승하자,

클라인 백작이 스스로 마부석에 올라 고삐를 잡았다.

그와 함께 쉴라가 선두로 나서며 외쳤다.

“오늘 목표는 아침 식사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소드 팰러스에 도착하는 것이다. 자신 있나?”

“자신 있습니다!”

“좋다. 그럼 있는 힘껏 말을 달려라!”

이랴!

두두두두두

황금마차를 중심으로, 은색 기사단이 전력으로 말을 달렸다.

목적지는 소드 팰러스. 바로 그들의 집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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