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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17화


1452화

뿌연 흙먼지가 날리는 밖과 달리, 평온한 마차 안.

이드는 멍하니 창밖을 살폈다.

경치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저 멀리 산의 모습은 시시각각 바뀌고, 길가에 나무는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대략 시속 60킬로미터 정도일까.

거기에 마차 안으로 들어오는 소음과 진동도 없다. 지구의 어지간한 고급 차보다 낫다.

이 속도라면 진짜 아침 식사가 끝나기 전에 소드 팰러스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무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기사들은 문제가 아니지만, 과연 말이 잘 견딜 수 있을까?

물론 기사들의 활동에 지장이 없게끔 잘 훈련되었겠지만, 과연 이 속도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자 라미아가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비웃음을 흘렸다.

“저 쉴라 경이 무리를 한다고요?”

“음, 역시 그럴 리 없겠지?”

“절대 없죠. 누구 앞인데요.”

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검후가 없다면 몰라도, 검후를 모시는 쉴라에게 빈틈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특히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뭐, 중간중간 포션이라도 먹이겠지.’

소드 팰러스로 향하는 검후를 위해 황제가 준비한 것은 말과 마차만은 아니었으니까.

그에 다시 스쳐 가는 경치를 잠시간 감상하던 이드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겠던지 결국 검후를 돌아보았다.

마차에 오르고서 여태 한마디도 하지 않은 그녀는 현재 손에 든 책자에 모든 관심을 쏟는 중이었다.

언뜻 보기에 악필로 대충 휘갈긴 글과 엉성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양이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검후는 글자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오래도록 읽었다.

제목조차 적히지 않은 그 책을 말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다름 아닌 마르텔의 유품인데.’

책자는 마르텔의 시신을 정리하던 중 품에서 나온 것으로, 오늘 그가 사용했던 이름 없는 검법에 대해 적혀 있었다.

그저 자신이 시연한 것이 전부인 양 말했던 마르텔.

왜 이 책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드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어쩌면 검후는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굳이 그에 대해 캐묻는 눈치 없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중요한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검후의 손에 들린 책의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레센에 돌아온 후 이드는 제대로 된 무공 서적을 살펴본 적이 없었다. 소드 팰러스 수련생들을 위한 교재가 아닌, ‘진짜’ 무공비급 말이다.

그런데 호기심이 너무 과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뚫어지겠어요.”

책에서 눈을 뗀 검후의 눈길이 샐쭉하다.

이드는 조금 민망했다.

“아하하, 미안, 궁금해서 말이야. 마저 읽어. 이젠 방해하지 않을게.”

“괜찮아요. 이미 처음 한 번 읽었을 때 내용은 다 외웠으니까요.”

다 외워 놓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보았다고? 누가 봐도 처음 읽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말이다.

“그랬어? 그럼・・・・・・”

“자요. 이드도 읽어 보세요.”

부탁하는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먼저 책을 내어 주는 검후.

이드는 한 번의 사양도 없이 냉큼 책을 받아 들었다. 작은, 그야말로 수첩에 가까운 책에는 검후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드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표지를 살피다 첫 장을 넘겼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휘갈겨 놓은 한 줄의 문장.

‘밴딩 수련은 최악이다. 이 검법은 최악에서 찾은 최선이다.’

“이거 너한테 하는 말이지?”

“아니면 누구겠어요.”

“묘하네.”

이드는 턱을 쓸었다.

최악에서 찾은 최선. 어쩐지 검법뿐 아니라,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싶지만.

진실을 아는 당사자는 이미 재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을 터.

이드는 우선 호기심을 풀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첫 장의 문장을 적은 것보다 더한 악필이 가득하지만,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사르륵-

그렇게 느낀 순간, 향긋한 향기와 함께 긴 머리카락이 어깨 옆으로 흘러내렸다. 일리나였다.

그녀 역시 무공을 익힌 무인.

“같이 봐요.”

이드는 그녀 옆에 궁둥이를 붙여 앉아서는 손에 든 책을 중간에 놓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책을 읽었다. 그렇게 비급에 빠진 두 사람의 모습을 빙긋이 바라본 라미아는 검후와 스몰 토크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이십 분 정도가 흘렀다.

탁!

마지막 장을 끝으로 책을 덮은 이드는 짧은 감상을 내놓았다.

“멋지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만들어진 검법이야. 일리나가 보기에도 그렇죠?”

“네. 거친 부분도 있지만, 그래요. 이드의 표현처럼 멋진 검법인 것 같아요.”

이런 두 사람의 감상에 검후는 책을 건네받으며 피식 웃어 버렸다.

“멋지긴요. 겉멋만 들었죠. 적은 나이도 아니면서 절제할 줄 모르고 자기 감정을 다 풀어 놨는데.”

“그러니까 멋진 거지. 사람이 무언가에 솔직할 수 있다는 건 쉽지 않다고. 특히나 평생을 갈고닦은 무공을 하나의 검법에 녹여 내는 작업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지.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검법은 충분히 인정받을 가치가 있어.”

이미 죽어 버린 사람에 대한 악담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검후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 거칠고 투박한 부분이 많지만, 지금 상태로도 능히 강호의 절학이라고 불릴 만한 수준이었다.

강호에 나타나면 피바람까지는 아니라도 쟁탈전은 벌어질 만한 일파의 보물.

“이런 검법을 만들어 낸 걸 보면 마르텔도 천재였나 보네.”

“천재는 과해요. 수재 정도라면 몰라도. 제 밑에서 일평생을 수련했잖아요. 이 정도는 만들 줄 알아야죠.”

“뭐야? 그 말도 안 되게 높은 기준은.”

이드는 어쩐지 우쭐한 검후를 흰 눈으로 째려봤다.

뛰어난 스승 아래 꼭 뛰어난 제자가 나오라는 법은 없다. 수많은 문파에 수많은 제자가 있지만, 그중 스스로 창안한 무공을 남긴 무인은 정말이지 손에 꼽힌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은 대부분 천재로 불리며, 대부분 젊은 시절부터 크게 이름을 떨친다. 하물며 그중에도 누구나 인정할 절학이라 불릴 무공을 남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에 비춰 비록 검후라는 훌륭한 스승에게 배웠지만, 무림과 같은 체계적인 가르침이 없는 상태에서 이만한 검법을 창안한 마르텔은 충분히 천재라 불릴 만했다.

그런데 이게 기본이라니?

이게 기본이었으면 무림에서는 벌써 난화십이검이 시장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드는 검후의 말을 지독할 정도의 겸손을 담은 반어법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아무튼, 이드가 봐도 괜찮다는 거죠? 일리나도 그렇고.”

“네.”

“눈이 제대로 달렸다면 이걸 보고 다른 소리를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일리나와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검후의 얼굴에 떠오르는 곤혹스러움. 그녀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꾹꾹 눌렀다. 두통이 오는 모양이다.

“두 사람의 평이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네요.”

“뭐가 문제라는 말인데?”

“이 검법이요. 세상에 공개해도 괜찮을까요? 이 상태라면 뒤에 이어질 파장이 결코 작지 않을 거예요.”

세상에 공개한다는 검후의 말에 이드는 그제야 마르텔의 유언 아닌 유언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과 친구들이 삼검왕이라는 이름으로 소드 팰러스에 뿌린 똥의 대가를 이 검법으로 치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확한 내용은 좀 다르긴 하지만, 그게 그거지.’

마르텔은 소드 팰러스의 수련생들에게 남긴다고 말했지만, 그들을 통해 전 대륙으로 퍼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소드 팰러스의 수련생은 전 대륙에서 모여들기 때문이다. 지금 대륙에 퍼진 무공 또한 그런 식으로 퍼져 나간 것이었으니,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검법을 공개한다. 라・・・・・・ 만만치 않네.”

만만치 않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다. 시간이 걸리기야 하겠지만, 분명 세상이 뒤집힐 것이다.

이드는 가만히 상상을 해 봤다.

마르텔의 검법과 쌍둥이처럼 빼닮은 축융검법이 전 무림에 뿌려진다면 과연 어떨까.

‘모르겠다…….’

이드는 대뜸 고개를 저었다. 강호에 속한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삼재검과 같은 기본공도 아니고, 절학급의 무공을 세상에 푼다?

무인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만큼 그 후 벌어질 사태 또한 예측이 쉽지 않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몇 있다.

우선 무림에 거대한 피바람이 일어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삼류 무공도 아니고 무려 축융검법이다. 그 정도라면 고요한 무림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힘의 균형을 무너트리기 충분했다.

물론 파문이 발생하기 전, 폭풍 전의 고요가 흐를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도 몸에 익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아마 그런 예열 과정에서 지독한 신경전이 벌어지지 않을까?

어쩌면 이 과정에서 제거되는 문파나 인물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한 게 하나 있네. 형산파가 망할 거라는 거.’

문파의 근간이 되는 무공이 세상에 풀렸으니, 형산파가 가지는 허점이 드러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훤히 약점이 드러난 무공을 가지고 멀쩡히 헤쳐 나갈 만큼 무림은 만만하지 않다.

거기에 모르긴 몰라도, 자파의 무공도 관리하지 못하고 거대한 분란을 불러일으켰다고 정사마 가라지 않고 손가락질당하고 책임을 묻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정도다.

무림에서는 어떻게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일어난다면 그 최종 결과는 무공 평균의 향상이지 않을까 싶다. 아마 이류에서 삼류에 속하는 무인 층이 사라지겠지.

그러나 그레센은 이런 무림과는 다르다.

그레센에도 무림의 세가와 비슷한 귀족 가문이 있지만, 그 위에 왕이 있고, 황제가 있다. 어쨌든 관무 불가침이라는 무림과 달리, 그레센의 모든

무력은 국가에 속해 있다.

그런 세상에서 검후가 가지는 힘과 권위는 독보적이다.

당장 지금 대륙에 퍼진 무공의 근원도 그녀이지 않은가. 그런 검후가 새로운 검법을 공개하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또 누가 그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없다.

그녀를 결정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결정으로 인한 결과는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강인한 기사 전력을 자랑하는 세력이 있다면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한 기분일 것이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모든 가문의 기사들이 뛰어난 검법을 익히게 될 테니까.

물론 배움을 위한 기반이 달라 차이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무력의 차이가 급격히 좁혀질 것은 확실한 사실.

‘이런 상황을 놓고 보면 검법의 공개에 가장 반대하고 나설 사람은 따로 있었네?’

황제 말이다.

최강의 기사 전력을 보유한 대륙 최강국.

검법의 공개로 가장 타격을 크게 받을 곳은 바로 아나크렌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황제께선 무조건 반대하실 것 같은데?”

“・・・・・・ 역시 그렇겠죠?”

이드의 말에 검후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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