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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18화


1453화

세상 모든 일에는 출발점이 있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가.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질문에 유독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아마 ‘처음’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힘과 명예가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역사에 남을 수 있다. 이 얼마나 명예욕을 자극하는 일인가. 제국의 황제보다 더 길게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니.

따지고 보면 미완의 마탑 탑주도 이 단어의 매력에 사로잡힌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처음’과 비슷한 의미에서 종주국이라는 말도 있다. 어떤 문화적 현상의 발상지라는 개념이다.

개인이냐, 지역이냐의 차이랄까.

갑자기 종주국이 나온 이유는, 제국이 그레센 무공의 종주국이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아마 먼 훗날,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인간의 역사에 남아 인류가 멸망하는 마지막 날까지 제국의 이름을 빛낼 것이 분명했다.

지난 역사를 다 뒤져도 이처럼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이 인간에서 비롯된 경우가 흔해야 말이지.

지금 인간이 향유하고 있는 것들도 대부분 따지고 보면 인간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은 드래곤에게서 왔고.

정령술은 엘프에게 왔으며,

금속과 보석을 다루는 기술은 드워프에게서 왔다.

심지어 음악과 악기조차 호빗에게서 왔다는 설이 있다. 심지어 그건 제법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무공이라는,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의 한 축을 인간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떻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것이 온전히 그레센에서 난 인간의 힘도 아니고, 인간만의 것도 아니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을 따지고 드는 사람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무공의 종주국으로서 제국이 얻고 있는 유, 무형의 수많은 이득이었다.

이는 이전 언급한 검후와 소드 팰러스에 대한 기사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공유되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이득도 힘이 있기에 지킬 수 있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제국은 자신이 있었다. 괜히 최강국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제국이 종주국으로 있는 무공에 있어서만큼은 제국은 그 어디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선진국이었다.

이에 대해 어떤 마법사가 내놓은 논문이 있었다.

아나크렌 제국과 그 외 국가 간의 무공 수준 차이를 설명한 논문이었다.

물론 본래 목적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보기에 따라 아나크렌은 제외한 모든 국가를 깎아내리는 내용인데, 마법사가 미쳤다고 그런 걸 연구 주제로 삼았을까. 하지만 재밌고 자극적인 것에는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리기 마련. 결국 마법사의 원래 주제는 뒷전, 세상에 알려진 것은 수준 차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논란이 된 논문이 내놓은 결과가 15년이었다. 제국과 다른 국가 간의 수준 차이. 즉, 한 국가에서 15년 동안의 정성을 들여야 아나크렌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평균 수치다. 나라에 따라 더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하지만 아나크렌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나다고 언급된 라일론도 9년이었다.

국가의 역량을 집중해도 9년,

이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좁힐 수 없는 차이라는 말이다. 이를 좁히기 위해 집중 투자를 할 수는 있겠지만, 같은 기간 아나크렌이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아, 물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검후와 같은 천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준다면 9년의 시간을 단숨에 삭제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한 나라의 운영을 그런 운에 맡겨서야 정상적인 국가라 할 수 없는 일.

좌우간 이런 우위를 무기로, 아나크렌은 종주국이자 최강국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소드 팰러스를 운영할 수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소드 팰러스는 제 살을 깎아 먹는 부분이 없지 않다.

소드 팰러스에서 잘 배우고 돌아간 기사가 자국의 무공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게 될지를 생각해 보라.

하지만 15년이라는 시간이 있기에 아나크렌은 그런 부분까지 허용할 수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형의 이득이 더욱

컸으니까.

또 그러한 경쟁자가 있어야 제국이 자만심에 고여 썩어 가는 일을 피할 수 있다는 이전 황제의 결심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묘한 힘의 균형 속에 마르텔의 검법이 공개된다?

일리나가 말했다.

“나도 이드와 같은 생각이에요. 제국의 전력이 깎여 나가는 일을 황제께서 허락할 리가 없어요.”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검법을 공개하는 것이나, 소드 팰러스에서 기사를 가르치는 것이나 크게 보면 다를 것이 없지 않으냐고.

그야말로 멍청한 소리다.

물론 소드 팰러스의 가르침은 우수하다. 괜히 소드 팰러스 출신의 기사들이 유명한 게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뛰어난 스승과 체계적인 교육 과정에서 나오는 힘. 딱히 수련생들에게 엄청난 검법을 가르치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 반해 마르텔의 검법은 다르다.

이 검법이 공개되어 각국의 손에 들어간다면, 해당 국가에서는 검법을 연구하고 기존 검법에 반영, 발전시킬 것이다.

실시간으로 제국과의 수준 차이가 빠르게 좁혀지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당장 9년이라는 라일론과의 수준 차이가 5년, 3년으로 줄어들 수도 있는 거다.

소드 팰러스의 가장 큰 기능이랄 수 있는 친제국파를 양성하는 요소도 없는 제국에 있어 오로지 마이너스가 될 뿐이리라는 의미였다.

이건 황제가 아니라, 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검후는 누구보다 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할 사람도 아닌 그녀가 이런 문제를 두고 끙끙거릴 이유는 결국 하나뿐이다.

“이 검법. 공개하고 싶은 거구나?”

황실의 일원으로서, 제국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선택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한때 제자의 마지막 유언이었으니까요. 가능하다면 들어주고 싶어요. 누굴 죽여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당장은 아니지만, 결국 그로 인해 많이 죽을 거 같은데?”

마르텔의 검법을 얻어 기사 전력을 강화한 국가에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시기가 다를 뿐, 결국은 전쟁이다.

힘을 가지면 쓰고 싶은 것이 인간이고, 권력자라는 존재이니까.

“상관없어요. 반대로 이 검법이 없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요? 당장 제국와 으르렁대고 있는 마스도 그렇고.”

“그건 인정.”

검후가 하는 말을 보면 제국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질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이드는 그야말로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가 영원히 제국을 수호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당장 전쟁이 벌어진다면 나서서 승리로 이끌 수는 있어도, 전쟁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자신의 한계를 현실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 검후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무차별적인 공개가 아니잖아요. 소드 팰러스 출신들에 대한 공개였지. 사실 그게 아니었다면 저도 고민하지 않았을 거예요.

“후배들에 대한 사랑이 훈훈해서?”

풋! 지금 그 말, 웃겼어요. 수련생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마르텔이라니. 상상도 안 되네요.’

피식피식 웃으며 눈물을 찔끔거리는 검후.

고인에 대한 존중은 어디다 팔아먹었냐고 묻고 싶은 걸 참았다.

“뭐, 어차피 위대한 검후가 마음먹으면 하지 못할 일은 없잖아. 잘 생각해 봐.”

“어? 설마 삐졌어요?”

“진심이거든!”

자신을 어떻게 보고 저런 말을!

이드가 눈을 부릅뜨자 검후가 실실 웃으며 책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일리나와 눈이 마주쳤다.

“만약 일리나가 저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장로회에 안건으로 올리겠어요.”

망설임 없는 즉답에 허탈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검후다. 그에 이드와 라미아가 대놓고 키득거렸다.

“어, 옳은 대답이긴 한데. 내가 바란 답은 아니에요.’

“알아요. 하지만 정답이죠. 대신, 저 개인적인 감정을 묻는 거라면 공개할 거예요. 단! 이건 인간 일리나가 아닌, 엘프 일리나의 기준에서 하는 말이에요. 이게 가장 중요해요. 인간은 불확실한 점이 너무 많아요.”

“그러네요. 그게 가장 중요하죠.”

인간과 엘프라는 종족으로의 차이점.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간이 엘프와 같았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 개인적으로 익히고 그 외에는 공개하지 말 것을 약속받으면 끝이다. 한번 한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키는 존재가 엘프이니까.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에 검후의 눈이 이번에는 이드를 향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드는 질문을 듣지도 않고 대답을 내놓았다.

“나라면 공개하지 않아. 공개했을 때 발생할 문제들이 너무 많거든. 수련생들에 대한 배상이 저승 노잣돈이 될 가능성도 크고.”

농담이 아니다.

검후는 일어날 전쟁은 어떻게도 일어난다고 말했지만, 마르텔의 검법이 전쟁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

그리고 이에 관련된 기사들이 전쟁에 동원된다는 점 역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 결과, 많은 기사들이 죽음을 맞이하겠지.

“어쩐지 이드는 그렇게 답할 것 같았어요.”

검후가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가령 공개될 검법을 개조해서 내놓을 수도 있겠지. 전쟁을 촉발하지 않는 형태로.”

“그래서야 의미가 없잖아요.”

검후가 인상을 썼다.

전쟁을 촉발하지 않는 형태. 다시 말해 참고할 가치가 없는 검법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야 수련생들에게 대해 공개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참고할 가치가 없는 검법이란 실전에서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런 걸 익혀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

이드는 이런 부정적인 검후의 반응에 푹신한 쿠션에 등을 깊이 묻으며 거만을 떨었다.

“정말 의미가 없을까?”

“혹시 방법이 있는 거예요? 개인에겐 유용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의 개조가?”

“완벽히 막을 수는 없지만, 만족할 수준은 될걸? 내 고향에도 나라가 있고, 군대가 있었다고.”

“역시! 믿고 있었어요!”

검후는 ‘고민 해결’을 외치며 이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드는 그런 검후의 손을 쓱 피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제법 시간이 걸려. 너무 좋은 검법이라 어중간한 개조는 오히려 독이 될 거라서. 무엇보다 공짜는 아냐.” “말만해요. 이드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다 해 줄 테니까.”

제국 최고 어른의 장담이다.

정말 원하는 건 뭐든지 가능할 것 같다. 그에 이드는 옆에 앉은 일리나를 향해 눈을 돌렸다.

뭘 해달라고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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