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19화
1454화
삑- 삐익-
손가락을 입에 넣은 라미아가 요란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우와! 뭐든 다 해 준다니, 지금 발언 굉장히 박력 있었어요. 무슨 왕자님 같았어요.”
“흥, 당연하죠.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만한 몸짓과 함께 오만한 표정을 짓는 검후.
정말이지, 이드 일행과 함께할 땐 나이를 잊고 유치해지는 그녀다. 뭐, 그만큼 부담 없고 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 줄 거죠? 아니, 무조건 해 줘야 해요.”
“좋아. 대신 참고할 무공서가 필요해. 소드 팰러스에 공개된 어중간한 것들 말고, 최고의 것들로.”
“소드 팰러스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대령할게요. 다른 건요?”
“작업할 시간?”
“해를 넘겨야 하는 건 아니죠?”
염려스러운 표정이다.
앞서 제법 시간이 걸린다고 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아무렴, 걱정할 만하다. 일개 보고서 따위도 아니고 무려 무공을 수정하는 일이다.
그것도 어디 흔해 빠진 삼류 무공이 아니라, 검후와 이드가 인정한 마르텔의 유품이다.
수정 조건도 까다롭다.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참고해서 자국의 무공 수준을 높일 정도는 아니되, 검법의 형태와 가치를 크게 훼손해도 안 된다. 그야말로 새로운 무공을 만드는 것 이상의 난이도였다.
검후도 그 어려움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진 무공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럼에도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르텔의 유언을 생각하면 너무 늦어서는 곤란했다.
그에 이드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딨어? 그렇게 어려운 작업이면 말도 꺼내지 않았지.”
당장 남은 혼돈의 파편을 찾기도 바쁜 이드였다. 느긋하게 책상에 앉아 몇 년이고 무공서나 끄적일 여유는 없다.
그에 척, 하고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는 이드.
“한 달. 그보다 빨리 끝날 수는 있지만, 그 이상 걸리지는 않을 거야.”
“역시, 믿고 있었어요!”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검후의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활짝 폈다.
한 달 정도면 충분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책을 이드의 손에 턱 하고 넘겨주며 말했다.
“뭘 원해요?”
“글쎄, 괜찮으면 그 요구권을 일리나에게 주고 싶은데. 괜찮지? 라미아도?”
부부 일심동체.
요구권을 이드가 쓰나, 일리나가 쓰나 다를 것이 무엇인가. 검후가 고개를 끄덕였고, 라미아도 좋다고 말했다. “글쎄요…….”
갑자기 백지 수표의 소유권을 넘겨받은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딱히 바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이드도 돌아왔고,
“땅을 뚝 떼서 치외법권의 엘프 자치구를 만드는 건 어때요?”
“라, 라미아?”
상상도 못 한 소리에 검후가 화들짝 놀랐다.
땅을 뚝 떼서 자치구라니. 그것도 치외법권?
그녀가 아무리 황제의 윗사람이라도 제국의 땅 안에 치외법권을 만드는 것은 권한을 한참 벗어난 일이다.
그 모습에 이드가 왜 그리 놀라냐며 말했다.
“뭐든 말하라며? 안 돼?”
“그러긴 했지만, 이건 선 넘었죠. 제 권한 밖이라고요.”
“우우~ 아까의 박력은 어디 갔어요?”
분명히 선을 긋는 검후 그에 라미아가 말이 다르지 않으냐며 따지기 시작하자, 다시 왁자지껄 마차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마차는 점점 더 소드 팰러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검후의 근심이 덜어진 만큼 속도가 빨라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그저 빨라지기만 하던 황금마차의 속도가 어느 순간 급격히 줄어들더니, 쉴라가 다가와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에 창문이 열리며 검후가 열기로 발그레한 얼굴을 보였다.
“무슨 일이니?”
“소드 팰러스가 시야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검후의 얼굴을 잠시 살핀 후 문을 두드린 이유를 말하는 쉴라.
그런 그녀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다만 그러면서도 어쩐지 싫은 기색은 없었다.
과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환영 인파가 성 밖으로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또?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다른 명령은 잘 따르는 아이들이 이 명령은 도무지 지킬 생각을 않는 것 같구나.” 문제라며 말하는 검후.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도 정말 싫은 기색은 없다.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싫어했다면 누군가가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일은 벌써 없어졌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저 환영 인파는 입으로는 싫다 하면서도 은근히 기뻐하는 그녀의 심정을 살핀 결과라는 말이다.
이런 두 사람의 대화에 이드가 반대쪽 창문을 열어 상체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런 이드를 따라 라미아와 일리나도 창 너머를 살폈다. 과연 저 멀리 소드 팰러스가 보였다.
거리는 약 이 킬로미터 정도. 주변이 탁 트여 있기에 그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런 특성 덕분에 소드 팰러스만큼이나 그 앞에 모여 있는 인파가 잘 보였다.
“대충 2천? 엄청 많잖아.”
“2천도 넘을 거 같아요. 거기에 기사단도 나와 있는 거 같은데요?”
“정말이에요. 흑색 기사단의 깃발이에요.”
세 사람이 주고받는 말에 어느새 달려온 스폴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검후 님께서 복귀하실 때마다 벌어지는 일입니다. 누가 나오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항상 저런다니까요.”
“밖에서 저럴 정도면 안에도 볼만하겠는데?”
“장담하는데, 상상하시는 것 이상일 겁니다.”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스폴의 모습에 이드는 인파의 무리를 살피고는 물었다.
“그런데, 다른 기사단은 왜 보이지 않지?”
“성안에 있을 겁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두 개 기사단은 성 밖에서, 나머지 기사단은 성안에서 검후 님을 기다리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거죠. 뭐, 이젠 안에 하나 밖에 하나가 되었지만요.”
씁쓸한 눈빛의 스폴,
허전한 것이다. 도망자들과 함께 소드 팰러스를 떠나 버렸을 두 개 기사단으로 인해 오색 기사단의 이름이 무색해진 현실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스폴의 마음은 머지않아 소드 팰러스의 다른 사람들도 느끼게 될 것이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숨어 있던 놈은?”
“사살했습니다.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반항해서요. 뭐, 맡은 임무는 끝내게 해 주었으니 여한은 없을 겁니다.”
피식.
이드의 입가에 웃음이 샜다.
원인이 무엇이든, 죽음에 어떻게 한이 없을까.
그저 하는 말이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천천히 움직여 이윽고 환영 인파 앞에 멈춰 섰다.
“검후께서 돌아오셨다!”
“만세!”
“검후님! 제발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보여 주십시오!”
“절 제자로.
“이 새낀 뭐야! 꺼져!”
순간 폭발하듯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성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뉜 인파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기사들이 단속을 잘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 스스로 조심을 하는 것인지 마차가 지날 길을 침범하는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길 가운데 서서 제국, 황실, 검후, 그리고 흑색 기사단을 상징하는 네 개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있던 흑색 기사단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며 황금마차를 향해 기사의 예를 취했다.
“제국의 영광이며, 모든 검 위에 오직 하나로서 오롯이 선 우리 주군께 흑색 기사단이 인사 올립니다. 그 찬란한 빛이여 영원하소서!”
“영원하소서!”
“크~~~ 이거지! 영원하소서!”
“멋져! 짜릿해! 최고야!”
“이 장관을 드디어 보는구나!”
사람들은 흑색 기사단의 구호를 따라 외치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중엔 감격해서 울음을 터트리는 이도 있었다.
소드 팰러스가 검후의 복귀를 축하하는 행사는 유명했다. 마침 검후의 행적이 소문으로 퍼지고 있었기에, 소문의 행사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충분히 만족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그들의 부지런함을 더욱 축하하는 일이 일어났다.
찰칵.
멈춰 선 황금마차의 문이 열리고, 쉴라 단장의 안내를 받으며 검후가 마차에서 내려선 것이다.
고귀한 검후가 실로 오랜만에 대중들 앞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설마 검후가 직접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던 사람들은 숨이 멈출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곧 더더욱 열렬한 환호를 터트리며 고개를 숙이거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흐흐흑! 검후님!”
“고귀하신 분의 옥안을 뵈었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다!”
그런 환호가 쏟아지는 가운데, 검후가 흑색 기사단 앞으로 움직였다. 그에 흑색 기사단의 고개가 더욱 깊이 떨어졌다.
충성과 사죄와 반성의 의미가 담긴 자연스러운 반응.
이런 모습에 검후는 가장 선두에 선 흑색 기사단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래 기다렸는가?”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주군을 지키지 못한 이 어리석은 자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겠나이다.”
흑색 기사단장의 끓어오르는 목소리는, 환호성에 묻혀 검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심지어 나조차도. 그리고 다행히 잘 해결된 일. 그대는 더 이상 이에 대해 언급하지 마라.”
“주군!”
마치 자식을 대하듯 따뜻한 손길로 흑색 기사단장을 위로한 검후가 고개를 들어 주변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닫았고, 금세 환호가 멈췄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검후가 말했다.
“그대들의 환호는 잘 들었다. 그 어떤 음악보다 듣기 좋구나. 벌써 몇 번째 듣고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으나,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나를 향한 그대들의 환호를 듣고서야 비로소 내가 소드 팰러스에 돌아왔음을 실감한다는 것.”
이어 검후는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외쳤다.
“소드 팰러스여! 내가 돌아왔다!”
“우어어어! 검후께서 돌아오셨다!”
“축제다!”
“크하하하하. 죽도록 마셔 보자!!!!”
“저거, 저거 설마 매번 저랬던 거야? 저래 놓고 환영 인파를 모으지 말라고 하면, 그걸 듣겠냐고! 안 그래?”
밖의 상황을 바라본 이드가 어이가 없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드의 질문을 받은 스폴이 대답을 피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같이 나가 보시죠?”
“그러잖아도 충분히 시끄러운데, 여기서 더 난리가 나면 누가 감당하라고?”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모르면 몰라도, 이드도 충분히 유명인사였다.
이미 상당 기간 소드 팰러스에 머무른 이드, 그리고 라미아와 일리나까지. 그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한데 하필 검후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함께하고 있다?
절레절레.
검후의 존재만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이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충분히 사람들의 환호를 즐긴 검후가 마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차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문을 넘어 소드 팰러스로 들어섰다. 검후의 완전한 복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