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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21화


1456화

검후의 당부 아닌 당부에 기사단장들은 크게 감격한 얼굴이다.

이 모습을 본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한 일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후 본인이 저렇게 단단히 못 박아 놓으면 최소한 병신같은 헛소리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

곧 삼검왕의 진실이 밝혀진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그에 따른 의혹과 말도 안 되는 억측이 난무할 것이 분명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헛소리 중에는 남은 오색 기사단에 대해 책임을 묻고, 의심을 더하는 말도 빠지지 않을 터였다.

은색 기사단이야 그 특이성으로 인해서 의혹에서 벗어날 수는 있어도, 나머지 기사단은 그렇지 않았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오색 기사단 안에서도 배신자가 나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수의 기사가 아니라 두 개 기사단이 통째로 돌아섰으니, 남은 기사단 입장에서도 유구무언이다.

그런데 검후가 이런 문제를 말 한마디로 사전에 차단해 버린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한 공식적인 발언은 아니다. 그러나 삼검왕의 진실이 밝혀지면 지금 검후의 발언도 자연스럽게 전달될 게 분명하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기사단장들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하고 송구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동력 삼아 검후에 대한 충성을 다시금 가슴에 새겨 넣었다. 혈기 넘치는 기사들에겐 그야말로 콧등이 시큰해질 그런 모습.

한 걸음 물러선 입장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는 갑자기 주스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빨대를 잔에 꽂아 일리나의 입에 물려 주었다. 묘한 분위기 가운데서 어느새 케이크 한 접시를 다 비운 일리나였다. 그녀는 이드가 물려 주는 빨대를 쪽쪽 빨았다.

쪼로로로록-

순식간에 비어 버린 잔에서 귀여운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엄숙하던 분위기가 파삭 깨어지고 검후의 얼굴에서도 힘이 빠졌다.

“주스, 더 줄까요?”

“네. 이 주스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일리나에 잔을 든 이드의 손이 움직였다. 손수 과일 주스를 따라 주던 검후는 이런 이드의 모습에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양 피식

웃었다.

“이드를 보면 먼저 간 우리 남편이 생각나요. 그 사람도 이드만큼 애처가였는데.”

“……”

애처가가 아니라 공처가는 아니었을까?

무조건 반사와 같은 반문이 떠올랐지만, 이드는 있는 힘을 다해 목 안으로 그 질문을 밀어 넣었다.

덕담을 악담으로 받아칠 정도로 삐뚤어지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일리나의 뜻하지 않은 역할로 분위기가 정돈되자 검후가 조금 편해진 모습으로 이런저런 질문들을 꺼냈다.

탈주한 배신자의 대략적인 현황이라거나 도주를 주도했던 주요 인물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소드 팰러스에서 떠났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하나같이 우울하고 중대한 사안이었지만, 앞선 일 때문일까.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는 일 없이 대화는 담담하게 이어졌다.

“……그렇게 모두 합해 875명이 아침이 오기 전까지 소드 팰러스를 빠져나갔습니다. 이것이 그 명단입니다.”

어느새 준비했는지 수십 장의 명단을 검후에게 내미는 카일란.

검후는 명단 최상단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차분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875명인가.”

사실 왕국을 꿈꿨던 검왕의 야망에 비하면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규모가 작았다.

고작 천 명도 되지 않는 이들만이 검왕을 따랐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는 숫자의 이면을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마르텔을 따라 화려하게 불탄 쭉정이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검왕은 크게 쓸모없는 자들은 버렸다.

대신 확실한 전력이자, 능력자들의 확보와 설득에만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검후의 손에 들린 명단이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어느 한 방면으로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인재들.

그래서 어디에 가져다 놔도 제 몫을 하고도 남는 능력자들.

그런 인물만 꾹꾹 눌러 담아 875명인 것이다. 아마 이 인원을 전투에 투입한다면 최소 다섯 배 이상의 전력 차까지도 어려움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구나.”

“인재들이 아니라, 썩은 가지였을 뿐입니다. 감히 검후께 충성하지 않고, 반기를 든 배신자들.”

“그러지 마라. 이들 모두가 내게 충성해야 할 의무는 없다. 여기 도른 폴컨만 보아도 그렇지 않으냐. 그는 시리카의 남자다. 나와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일이 없지.”

소드 팰러스는 기사의 요람이며, 배움의 터전이다.

수련생으로, 깨달음을 찾아 소드 팰러스로 달려온 기사들이 꼭 제국과 검후에게 충성을 맹세할 이유는 없다.

당연히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랬다면 애초에 기사의 성지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잊은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저들은 검후와 소드 팰러스에 가르침을 얻은 주제에 그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았는가.

“검왕을 따른 것 역시 그 인간으로의 도리를 따라서였을지도 모르지.”

생각해 보라.

과연 검후에게 가르침 받을 기회가 많을까, 아니면 삼검왕에게 가르침 받을 기회가 많을까.

3:1이라는 단순한 숫자만 놓고 봐도 답이 나온다.

그에 대한 현실을 말하는 검후였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기사들은 그 말만은 쉽게 인정할 수 없는 모습이다.

결국 검후가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뭐, 좋다. 이들이 떠날 때 따로 충돌은 없었고?”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염려하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굳이 언급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도 없고, 다친 사람도 없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만 있었을 뿐. 하지만 기사단장들은 그 일에 대해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 검후도 그 일을 두고 탓하지 않았다.

배신자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놓아주어야 하는 불합리에 대한 기사들의 복잡한 심경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드가 그런 검후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남은 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은 놈들은 전부 감옥에 있습니다.”

떠나야 할 놈들이 모두 떠난 후.

적색과 흑색 기사단은 아침이 밝기 전까지 소드 팰러스를 뛰어다니면서 남은 죄인들을 쓸어 담았다. 행여나 검후가 돌아오시는 길이 지저분하지 않도록 말이다.

“전부, 다?”

“네, 배신자들과 연결이 확인된 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잡아넣었습니다.”

“・・・・・・ 감옥에 자리가 있던가요?”

“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만, 자리는 만들기 나름이었습니다. 밀어 넣으니 결국은 어떻게든 들어가더군요.”

답하는 라발 단장의 웃음이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이드는 그 모습에서 감옥의 아비규환이 충분히 짐작이 갔다. 이드가 알기로 소드 팰러스의 감옥은 결코 크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여타의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은 용도를 변경당하고 말았다.

사용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소드 팰러스의 특이성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소드 팰러스는 누가 뭐래도 기사의 성지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의 대부분이 기사 아니면 기사를 목표로 수련 중인 수련생이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라.

어떤 멍청한 도둑놈이 기사와 수련생을 상대로 도둑질을 하겠는가. 도둑질도 똑똑해야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소매치기 같은 좀도둑은 자치를 감췄다. 같은 이유로 강도와 사기꾼도 사라졌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기사와 수련생이라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기사와 수련생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연스럽게 그들과 인연이 깊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렇지 않을지언정 명색이 기사가 그런 사건을 보고 그냥 지나치겠는가.

사기 한번 잘못 쳤다가는 바로 기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소드 팰러스는 자연스럽게 범죄 청정 구역이 되었다. 감옥이 제 역할을 할 일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소드 팰러스에 아무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범죄와 사건의 발생 빈도가 극도로 적어졌을 뿐, 범죄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드물게 발생하는 범죄는 대부분 강력 범죄였다. 이 또한 소드 팰러스라는 특이성 때문에 발생하게 된 일이다.

그야말로 중간이 없는 소드 팰러스였다.

그런데 이렇게 감옥의 숫자가 부족한 소드 팰러스에 오랜만에 대량의 죄인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도 소드 팰러스의 특성에 맞는 중죄인으로.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이면 좁은 감옥 안에 죄인들이 앉을 자리도 없이 촘촘하게 서 있지 않을까 싶었다.

‘딱 죄인에게 어울리는 대접이긴 하지.’

이드는 죄인을 걱정해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신 검후는 다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잘했다. 다만 그런 과정에서 혹시나 억울한 자가….. 아니다, 내 괜한 말을 했구나.”

노파심에서 말을 꺼내던 검후는 곧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

아무렴 저들의 목에 걸린 죄목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기사단장이 실수를 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배신으로 실추된 소드 팰러스와 검후의 명예다.

그런데 여기에 억울하게 잡혀 들어간 사람까지 나왔다가는……………

모르긴 몰라도 두 번 세 번 확인했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의심은 가나 증거가 없다면 그냥 놓아두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닙니다. 검후님의 걱정은 지당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기에 현재 잡아들인 죄인들에 대해 추가 확인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믿고 있겠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하면 되겠구나.”

“하문하십시오.”

“떠나는 자들에 대한 추적은 하고 있느냐?”

검후는 떠나는 자들에 대한 추적을 명령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해서 잡을 수 있는 어리숙한 자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단장들의 생각도 그럴까?

검후가 알고 있는 단장들이라면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흑색과 적색 두 기사단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확실히 검왕에 닿을 인물들에 한해 은밀히 추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 기사단은……”

감히 이름조차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하는 두 기사단.

흑색과 적색 기사단장은 주요 인물이라 말했지만, 그들이 가장 노리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는 뻔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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