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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28화


1463화

시리카의 급한 성질은 빈말 없는 진짜였다.

보통 사절이 오면 하루,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한다. 그러면서 현지의 분위기도 살피고, 인맥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등의 작업을 한다. 그렇게 최대한 준비한 후 알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인데.

시리카에서 온 사절들은 달랐다.

휴식도, 정보 수집도 없었다. 왕의 성격을 빼다 박은 그들은 날이 밝기 무섭게 내성으로 달려와 알현을 청해 온 것이다.

얼마나 일찍 와서 기다렸는지, 직접 응대한 클라인 백작이 당혹했을 정도라고.

이를 전해 들은 검후는 혀를 차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당일 알현을 허락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른 사절들은 몰라도 시리카는 아침저녁으로 알현을 청해 귀찮게 하지 않겠는가.”

농담처럼 꺼낸 말이지만, 가능성은 매우 컸다.

따지고 보면 이는 아랫사람들을 위한 검후의 배려이기도 했다.

정말 시리카의 사절이 아침저녁으로 알현을 청하더라도 검후가 귀찮을 일은 없다. 그저 그들을 직접 상대해야 할 아랫사람들이 고생이지. 검후는 그들의 고생을 없애 준 것이다.

일정이 잡히자 검후도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렴 외국의 사절을 만나는 일이다. 평소와 같은 거친 모습으로 그들을 만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검후는 검후인 동시에 제국의 황족이 아니던가.

당장 메이드들이 달라붙었다. 오랫동안 검후를 시중들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손이 바삐 움직임에 따라 검후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했다. 다듬어진 머리는 틀어 올려지고, 맑은 얼굴에는 화려한 색이 더해졌으며, 거친 복장은 여백의 미가 아름다운 드레스로 갈아 입혀졌다. 실로 오랜만에 기사가 아닌 황족이자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완전 무장을 마친 검후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이러니 클라인 백작이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칭송을 하지.

“정말 보기 좋습니다.”

이드는 처음 보는 검후의 모습에 손뼉을 쳤다.

“그렇습니까?”

“검보다 검후께 잘 어울리는 것은 없는 줄 알았는데. 드레스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명예 후작께서 지금 절・・・・・・ 놀리시는 건 아니겠죠?”

갑작스러운 칭찬에 방실방실 웃다가 갑자기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검후.

이드는 억울했다.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칭찬인데. 요 며칠 갑질을 조금 했다고 이런 진심을 몰라주다니.

이드는 있는 힘껏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진심이니까, 좀 믿으세요. 제가 언제 검후께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뭐, 그렇기는 하죠. 잘 어울린다니, 감사합니다.”

“칫,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내려왔습니다. 제 아내들이 너무 호들갑을 떨기에 하던 일도 멈추고 일부러 내려온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자 우리 말이 틀렸냐며 나서는 라미아와 일리나.

확실히 지금 검후의 모습은 호들갑을 떨 만했다. 이드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검후의 모습을 살폈다.

우아하고 고상한 중에 고고한 힘이 느껴졌다.

고귀한 혈통에, 스스로 올라선 위대한 기사의 칭호가 가져다준 아우라는 그야말로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이드는 문득 이런 검후를 아내로 두었던 그녀의 남편에 생각이 닿았다.

“검후님의 모습을 보니, 젊은 시절 백작께서 고생을 좀 많이 하셨겠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을 독점했으니 질투하는 사람이 어마어마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즐거웠던 추억 중 하나이지요.”

살포시 미소 짓는 검후.

“어? 정말 일이 뭔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혹시 결투 같은 거라도?”

“호호호.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젊음에서 나온 치기 정도였지요. 황제 폐하께서 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걸 바꿀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무엇보다 당시 황제의 황권은 매우 강력했다.

반역을 정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젊음과 사랑에 대한 열망에 몇몇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재밌는 추억이지만요.”

그러면서 특히 재밌었던 몇몇 사건들에 대해 말하는 검후. 동시에 그녀는 아쉽다 말했다. 이제는 당시의 추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명예 후작과 두 분 명예 후작 부인들이 제겐 참 소중하답니다.”

“크흠.”

갑작스러운 고백에 뻘쭘해진 이드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한다.

아무튼,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부지런히 움직인 메이드들 덕분에 검후의 치장이 끝이 났다. 마침 사절들도 내성에 들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에 대전으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검후가 갑자기 이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왕 내려오셨는데. 함께 가시겠어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전 다시 올라가 하던 일을 마저 해야지요.”

“아쉽네요. 명예 후작이 있으면 참 재밌을 것 같은데.”

“사절을 만나는 일에 재미를 찾으셔도 되는 겁니까?”

이드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검후가 어깨를 툭 떨구며 힘없이 대꾸했다.

“모르셔서 그러는데. 이게 보기와 달리 상당히 지루한 일이랍니다.”

“…….”

당연히 알 수 없는 일이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대답이 없는 이드에 검후는 혼자서 대전으로 향했다. 이드는 그런 검후의 뒷모습을 보다, 문득 두 아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사절이 올 때마다 저러는 건 아니겠지?”

“글쎄요.”


검후가 지루하다고 말할 만큼, 알현 시간은 꽤 길었다.

무엇보다 내심을 감추고 그저 화려하기만 한 언변은 듣고 있는 검후에겐 상당한 고역이었다.

그래도 황제보다는 나았다.

실체적인 권한이 없는 검후는 사절의 한마디 한마디에 든 속뜻을 머리 아프게 살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사이 시간은 알아서 흘러 알현의 끝이 다가왔다.

“그러함으로 위대한 검후의 영광이 세세토록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무언가 마침표를 찍는 것 같은 사절의 발언이 끝이 나자 검후의 눈이 반짝였다.

“시리카의 마음은 내 감사히 받겠소. 또한 시리카의 왕께서 보내 주신 선물은 오래도록 간직하겠소.”

말과 함께 검후의 눈이 향한 곳에는 크고 작은 선물 상자가 수십 개. 전부 시리카 사절이 바친 선물이었다.

“저희 왕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럼 사절들의 이후 일정은 어찌 되오? 내 듣기로 황제는 아직 뵙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아무렴 검후가 중요해도 제국 땅에 와서 황제에게 인사도 없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며칠 소드 팰러스에 머문 후 황제 폐하께 알현을 청할 계획입니다.”

“그렇군. 그럼 시간 여유가 있는 듯하니, 조금 더 머무시오. 조만간 내가 중요한 일을 밝힐 테니. 모르긴 몰라도 시리카에서도 꽤 관심을 가질 것이오.”

검후의 권유에 사절의 눈이 반짝였다.

검후가 말하는 중대 발표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공개할 생각인가?’

이 자리에 사절로 온 시점에서 그도 검후와 소드 팰러스에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사건의 진실에 대한 공개도 예상한 일. 동시에 의문도 따랐다.

‘그 일에 관련해 우리 시리카가 크게 관심을 가질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하는 생각과 함께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곧 부정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삼검왕의 배신에 시리카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물론 삼검왕을 따른 자 중에 시리카 출신이 있는지는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 부분은 어차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무엇보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

그 책임을 각국에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어디 그런 나라가 한둘일까. 순식간에 이런저런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사절이 내어놓을 수 있는 답은 결국 정해져 있었다.

“……그러하겠사옵니다.”

한 박자 늦은 대답.

“좋소.”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에 든다는 것 같은 검후의 모습에 사절은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고 검후를 붙잡고 사정을 물어볼 수는 없는 일.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사절은 끝까지 정중한 예에 따라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저들이 있으니, 축제가 끝나도 당분간은 시끌벅적하겠구나.”

텅 빈 대전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검후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사절이 가져온 선물 상자 앞에 섰다. 하나같이 귀한 천과 나무, 보석으로 치장되었다. 당연히 그 안에 든 내용물도 여간 귀한 게 아닐 것이다.

이전이라면 클라인 백작이 나서 확인하고 정리했을 일. 하지만 오늘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나와 라미아를 불러서 함께 풀어 봐야겠다. 밖에 있느냐?”

“예!”

“가서 두 분 명예 후작 부인들을 모셔 오너라. 내가 같이 선물을 풀어 보잔다고 하면 오실 것이다.”

“예? 아, 예!”

밖에 대기 중이던 하인은 생각지 못한 명령에 당혹해하다 황급히 자리를 떴다. 검후는 그러거나 말거나 선물 상자를 살피다 유독 눈에 띄는 제일 작은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선 내가 먼저 풀고 있을까.”

검후는 거침없이 상자를 묶고 있는 끈을 당겼다.


그렇게 검후가 잠시 후 도착한 라미아, 일리나와 함께 선물 상자 언박싱에 푹 빠진 사이.

사절은 내성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꺼내 놓았다.

“도대체 검후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지?”

급 골치가 아팠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되는 일이 없었다.

제자이자 기사들에게 배신당했다.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굳이 사절들을 잡아서 듣게 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말고 다른 일도 있다는 것인데.

“자네들은 혹 들은 바가 없는가?”

“없습니다.”

“아직 확인된 건 없습니다.”

“알아볼까요?”

사절을 보좌하기 위해 함께 따라나섰던 자들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절이 모르는 일을 그들이라고 알까.

“그래야겠네. 검후가 빈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분명 무언가 있는 것이 틀림이 없어. 자네들은 속히 무슨 일이 있는지 소식을 알아보게 전하의 성격이 어떤지는 자네들도 잘 알 테니 두말 않겠네. 다른 나라에서 알기 전에 꼭 알아야 하네!”

“맡겨 주십시오!”

사절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다른 나라에 지고는 못 사는 그들의 왕.

사람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인맥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른 사절들과는 일하는 순서가 거꾸로 된 시리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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