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30화
1465화
이드는 수정이 완료된 비급의 초반부를 검후에게 건넸다.
알현이 끝났으면 쉴 법도 한데,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곧장 달려온 이유는 이것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같은 무인으로서 이러한 검후의 궁금증에는 충분히 공감하는 바였다.
검후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비급을 살폈고.
결과는 만족이었다.
겨우 초반부를 정리했으니만큼 아직 완전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완성된 형태를 유추하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검후였으니까.
거기에 검법이 수정되기 전의 원형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지 않던가. 그렇기에 완성된 형태를 정확히 짐작한 검후는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그런 한편으로는 자신이 알지 못하던 방법에 대해 굉장히 놀라는 동시에 즐거워했다.
“이런 수법이 있었다니! 전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스스로의 모자람에 대해 한탄하는 검후.
그리고 이드는 이런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 네 손에 들린 건 무림의 역사야. 사람 하나가 파헤칠 수 있는 깊이가 아니라고.”
지겹게 말하지만 그레센 무공의 역사는 백 년이다.
중원에는 없는 마법과 신성력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발전했다지만, 그래 봤자 겨우 백 년이다. 수많은 무인들이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무림의 역사에 비비기엔 초라해도 많이 초라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무림이란 곳이 이드의 고향이죠?”
“비슷하지.”
“언젠가 이드가 고향에 돌아간다면 저도 같이 가 보고 싶네요.”
“엉?”
“무림에 가고 싶다고요. 이 비급처럼 제가 모르는 것이 많은 곳이잖아요. 새로운 걸 많이 보고 배우고 싶어요.”
생각지 못한 깜짝 발언에 이드는 순수하게 놀랐다.
검후가 무림에 온다? 농담인가 싶어 바라본 검후의 눈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호기심 뒤에 비치는 은근한 승부욕까지.
그걸 본 이드는 납득했다.
‘그래. 검후도 무인이지.’
검후는 존귀한 황녀인 동시에 무공을 익힌 무인이다. 아직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공에 대한 수많은 가르침이 있는 무림이 궁금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검후의 무림 출도라니, 재밌겠는걸?’
어딜 어떻게 봐도 중원인과는 다른 외모의 여인이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무림에 나타났을 때 과연 무림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잘 상상이 가질 않는다.
보통 외국인이라 하면 새외 세력을 말한다. 그들의 등장은 중원 진출을 의미하기에 중원 무림은 힘을 모아 이들을 막아 왔다. 하지만 세력이 아닌
개인이라면? 그것도 외모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대단한 평지풍파에 무림이 한바탕 뒤집어질 것이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기에 이드는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그래. 기회가 된다면 꼭! 같이 무림으로 가자.”
무림에 있어 난데없는 폭탄 투하였지만, 이드는 큰 변화가 없는 무림에 검후와 같은 외부의 자극이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진짜 속마음은 그런 거창한 명분보다 그저 재밌겠다는 마음이 더 컸지만 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단단히 동행을 약속했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럼 남은 비급도 잘 부탁할게요.”
“맡겨 두라고.”
굳이 검후의 부탁이 아니라도 이처럼 좋은 검법을 망치고 싶지 않은 이드다.
“그리고 작업이 끝난 이 초반부는 괜찮다면 잠시 빌려 가고 싶어요. 좀 더 천천히 살펴보려고요.”
“추가로 손댈 부분은 없으니까 괜찮아. 가져가.”
“고마워요!”
최근 쉬지 않고 찾아드는 사절들에 고생이 많았던 검후이지 않은가. 이것으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면 내어 주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런 마음에서 나온 허락에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검후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그녀는 빨리 방으로 돌아가 비급을 살피려는 듯 짧은 인사를 남기고 사뿐사뿐 방을 나섰다.
과연 이 그레센에 비급을 받고 저처럼 기뻐하는 여인이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에 키득거리며 다시 펜을 들던 이드는 문득 잊고 있었던 일 하나가 떠올랐다.
“그런데, 검법 이름은 정해 놓고 저러는 거겠지?”
내용보다 더 급한 것이 검법의 이름이지 않던가.
발표 당일 검법의 내용은 없어도 괜찮지만, 이름이 없어서는 곤란했다.
그런 의미에서 검후가 검법에 붙인 멜팅 블러드라는 이름은.
절레절레.
“어떻게 들어도 안티로스에 있는 유명 디저트 가게의 인기 메뉴 이름으로밖엔 들리지 않는단 말이지. 최악이야.”
그래서 모두가 반대했더니, 삐치기라도 한 걸까. 그 이후 지금까지 새로운 이름이 나오질 않는다. 그런 상황에 이제 발표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과연 그 시간 안에 적당한 이름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뭐,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대충 가져다 붙여도 멜팅 블러드보단 나을 테니까.”
그리고 정말 급하면 다른 사람의 머리를 빌리면 된다. 황제를 비롯해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그저 검후가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염없이 흐르는 생각을 잘라 버린 이드는 다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펜이 종이를 긁어내는 중독성 있는 소리. 그러나 얼마 이어지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분명 나하곤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을 잘랐던 이드가 어느새 검후가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다.
“설마 진심으로 멜팅 블러드를. 에이, 아니지?”
갑자기 덮쳐드는 묘한 불안감에 막힘없이 풀려 가던 수정 작업이 한나절이나 막혀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저 이름만으로 이드를 불안에 떨게 만든 검법. 실로 두려운 위력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이드를 불안에 떨게 만든 날 이후에도 사절단의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
다음 날엔 바다 건너 하르카에서 사절단이 도착했고, 또 이틀 후에는 라일론에서 대규모 사절단이 도착했다.
마치 이 때문에 늦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라일론은 검후에게 바칠 많은 선물을 가져왔다. 양만 많은 것이 아닌, 어느 하나 질이 떨어지지 않는 선물은 어지간한 영지를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 엄청난 양에, 앞서 꽤 즐겁게 선물 개봉에 함께 나섰던 라미아와 일리나마저 기겁했을 정도.
아무튼, 이렇게 검후를 만난 사절단은 전부 소드 팰러스에 주저앉아 버렸다. 앞서 시리카와 마찬가지로 검후는 그들에게도 곧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친절히 예고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뭐, 그것이 진짜 친절인지는 당사자의 생각을 들어 볼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크루레인을 끝으로 모든 사절단이 도착하자, 검후는 지긋지긋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 어지간히도 지겹고, 지루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이드가 수정한 비급을 직접 익혀 보고 싶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드레스를 벗어 던진 검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검과 비급을 챙겨 연무장으로 향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검후는 연무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라인 백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사절단 알현도 다 끝나지 않았나. 발표 전까지는 나도 쉬고 싶다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사절단을 모두 본 후에 말입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절단이 있던가?”
“조금 전 마스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마스에서? 아니, 그들이 왜?”
당연히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스의 등장에 검후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클라인 백작은 그런 검후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에서 사절단이 도착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역시 지금 검후와 같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저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축하 사절로 온 자들을 쫓아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기는 한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굳이 먼 길을 찾아온 축하 사절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한숨을 푹 하고 내쉰 검후는 들고 있던 검과 비급을 클라인 백작에게 넘겨 버리고는 돌아섰다.
그나마 화장은 아직 지우지 않아서 다행이다.
“한 시간 후 대전에서 마스의 사절을 보겠다.”
“예?”
“사절로 왔으면 어차피 알현을 청할 것이 아닌가.”
“그・・・・・・ 렇지요.”
“그럼 굳이 내일까지 기다릴 것 없이 빨리 보고 끝내고 싶군. 무엇보다 놈들의 속내도 궁금하고, 자네도 궁금하지 않은가? 서로 검을 뽑은 상황에서 축하 사절이라니. 흥.”
콧방귀를 날리는 검후의 표정이 어쩐지 사납다.
마스에 대한 적의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어쩐지 그것만은 아닌 듯도 하다. 클라인 백작은 잡음처럼 기어 나온 불경한 생각을 털어 버리고는 허리를 숙였다.
“바로 통지 후 알현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서로 멀어지는 두 사람.
두 사람은 마스의 사절단이 이제 막 도착했음에도 저들이 알현을 미룰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저들은 검후의 복귀를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고, 그들을 만나고 말고는 순전히 검후의 마음에 달린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검후는 대전에서 마스의 사절이라는 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마스에서 왔다고?”
“마스의 포름 훈이 검후께 인사 올립니다. 저희 왕께서는 검후님의 복귀를 축하하기 위하여…….”
“아아. 더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고 있네. 이미 앞서 도착한 사절들에게도 질리도록 들었으니까. 그러니 괜한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대신 내가 하나 궁금한 것이 있어 그대에게 묻겠네.”
“……하문하십시오.”
아무리 검후라지만 사절의 말을 중간이 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으로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대의 왕은 무슨 이유로 사절을 보낸 것인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연히 검후님의……”
“그만, 그만, 하나 마나 한 소리는 그만하자고 하지 않았나. 현재 양국이 서로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좋은 사이는 아니잖은가. 그런데 난데없이 사절단이라니. 거기에 선물까지 준비해? 자넨 정녕 이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나?”
기가 막힌다는 듯 검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다른 사절들보다는 작지만, 분명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전혀 아닙니다. 저희 왕께선 평소 검후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사절을 파견한 것입니다.”
“좋네. 그럼 왕의 말도 전했고, 선물도 받았으니. 이제 돌아갈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재 소드 팰러스에 각국의 사절이 모였기에 교류를 가지며 잠시 머무르려 합니다.”
“하하하! 마스가 교류란 말이지?”
검후는 세상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말보다 주먹이 먼저고, 주변 인접국과는 충돌이 끊이지 않는 마스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 바로 교류였기 때문이다.
“……..”
사절도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아는 것인지. 그저 말없이 얼굴만 붉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