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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31화


1466화

알현을 마친 포름 훈 백작은 도망치듯 내성을 나오며 참았던 숨을 토했다.

“푸하아! 이제 좀 살겠다. 무시무시한 압박감이야.”

“그 정도였습니까? 여기.”

그에 백작을 따르는 일행 중 백작의 보좌를 맡은 젊은 남자가 손수건을 건넸다. 백작은 목덜미로 흐른 식은땀을 닦으며 말도 말라는 양 고개를 저었다.

“노골적인 위협은 없었네. 하지만 타고난 위엄이랄지, 기도랄지. 아무튼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네. 자존심이 좀 상하는 것 같지만, 어쩌겠나. 상대가 검후인데.”

사절단 단장으로 임명된 자신이다.

거친 마스에서도 강단 있다는 평가를 받았었는데, 검후 앞에서는 숙어지는 머리를 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솔직히 쪽팔리는 경험이지만, 그래도 수치스럽진 않았다. 상대가 다름 아닌 검후였으니까.

검후.

그 이름이면 누구라도 자신의 심정에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동시에 저런 검후를 상대로 배신을 꿈꾼 삼검왕에 대한 실망감이 솟았다. 

‘도대체 무슨 똥배짱이었던 것인지. 어쩌다 운 좋게 기회를 잡았으면 확실하게 끝을 보기라도 하든가.’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따지고 보면 현재 마스와 제국이 전쟁을 코앞에 둔 상황도 시작은 삼검왕에 있었으니까. 아니, 제압한 검후를 왜 하필 마스 땅에 가둬 두냔 말이다. 

“빌어먹을 작자들!”

“예? 누굴…….”

“아아,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말게.”

별것 아니라며 손을 젓는 포름 훈 백작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검후가 ‘그것’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까?”

“유감스럽지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네.”

포름 훈 백작은 복잡한 심정으로 자신이 빠져나온 내성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 보좌관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졌다.

“역시 본국과 제국의 껄끄러운 분위기가 원인인 걸까요?”

“그 말고 이유가 없어. 다른 사절들에게는 다 언질을 줬다는데. 우리에게만 아무런 언급이 없으니까.”

소드 팰러스는 출신으로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다.

설령 적국 출신의 수련생이라고 해도 가르침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는 오랜 시간 검증된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검후도 사람이다.

그녀는 위대한 검사이자 기사이지, 성자가 아니다. 그녀에게도 싫은 사람이 없을 수가 없다.

이번에 그 대상이 마스가 된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그녀가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던 땅이 마스의 것이었으니까. 그녀가 탈출한 후에 일어난 사건도 그랬다. 제국이 토벌을 명령한 미완의 마탑과 손을 잡았고, 저 삼검왕과도 자신이 알 수 없는 형태로 거래를 주고받은 정황이 보였다. 이 정도가 되면 ‘교류’라는 말에 검후가 터트린 비웃음은 차라리 관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답답한 일이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현 상황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원래 마스는 사절단을 파견할 계획이 없었다. 제국과의 전쟁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아무리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검후라지만 축하 사절을 보내는 것에는 비판적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며칠간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에 급하게 바뀌게 되었다.

조만간 검후가 충격적인 발표를 하리라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삼검왕의 죄상을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대해서는 그 어떤 나라보다 자세히 알고 있는 마스였으니까.

그런데 이후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삼검왕의 문제와 함께 발표하게 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또 검후는 그 무언가가 각국에 제법 영향을 미치리라고 직접 언질까지 주었단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마스는 곧 난감해져 버렸다.

각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검후의 중대 발표란 곧 무공이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른 것이다.

그녀에겐 이미 전적이 있었다.

대륙에 무공을 알리고 보급한 것이 바로 검후였으니까.

혹시 이번에도 그때처럼 새로운 무공이나 이론을 발표한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 마스만 빠져 있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마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해서 왕과 대신들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긴급히 사절단을 구성, 포름 훈 백작을 사절단장으로 두고서 파견한 것이다.

포름 훈 백작은 사절단장으로 임명된 후 조금 불안했다. 혹시 냉대를 받으면 어쩌나 하고. 다행히 냉대를 당하진 않았지만,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했다. 다른 사절들에게는 내렸던 언질을 받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고 말고 할 것이 있나. 계획대로 다른 사절들을 직접 만나서 캐 봐야지.”

“미리 약속은 잡아 두었습니다만 쉽게 알려 줄까요?”

“어렵지는 않을 것이네. 여럿이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니까.”

이건 검후가 나머지 사절 모두에게 동일하게 언질한 일이었다. 밖에서 떠들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철저히 감출 일도 아니었다.

물론 공짜로 내어 주진 않겠지만 말이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사절들도 아직 검후가 언질한 것의 정체를 알아내진 못한 눈치였습니다. 저희가 그렇게 많이 뒤처지진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낙관적인 보좌관의 말이었지만, 포름 훈 백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뒤처지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된다. 국제관계에 있어 선두는 아니라도 중간에는 있어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마스는 이미 손해를 보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마음 놓을 일이 아니네. 현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지 잊지 말게. 자칫 잘못하면 우리 마스가 시류에 뒤처지는 후진국이 될 수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행동하세. 나는 사절들은 만나 볼 테니. 자네는 준비한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알아보게. 단! 그 과정에서 명심할 것은, 절대 그들을 압박해선 안 된다는 것이네. 성공의 여부와 관계없이 자칫 검후의 심기를 거슬릴 수 있는 일은 피해야 하네.”

다른 때라면 몰라도 현재 칼자루를 쥔 사람은 검후다.

그렇지 않아도 미운털이 박힌 마스인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가는 정말 노골적인 차별을 당할 수 있었다. 최소한 그런 경우만은 피해야 했다.

“맡겨 주십시오. 절대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나뉜 후 밤에 숙소에서 다시 보세.”

포름 훈 백작의 말에 사절단에 속한 사람들은 각자 만나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들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포름 훈 백작은 그런 사절단의 뒷모습을 확인 후 자신을 따르는 호위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도 가세. 우선은 드레인부터.”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절단의 모습을 커다란 창 너머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검후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꼭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를 보는 것 같군. 그렇지 않나?”

“전 그런 끔찍한 장난을 해 보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잖나. 나도 그런 장난은 해본 적 없어!”

장난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치는 클라인 백작에 검후는 새초롬히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이전까진 볼 수 없었던 지금과 같은 모습에 클라인 백작이 그렇게 대답했다는 사실을.

“그나저나, 역시 저치들이 허겁지겁 달려온 이유는 내가 준 언질 때문이겠지?”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 흐른 것은…….”

“아닙니다. 이미 확인해 봤습니다. 이미 도착해 있는 사절로부터 흘러나온 게 확실합니다.”

“어리석은 것들. 그것 하나 단속하지 못하고.”

검후는 혀를 찼다.

비밀을 지키는 것만으로 마스를 따돌릴 기회인데, 그 쉬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물론 자신이 발표할 검법이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그것을 모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할 일이 아니냔 말이다. 그럼에도 비밀을 흘려서 냄새를 맡은 마스가 달려오게 만들다니.

“그 말씀도 맞지만, 반대로 모두 알게 될 일이기에 굳이 단속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떤 것이든 단시간에 격차를 만들어 낼 것이 나오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지요.”

검후가 발표한다면 당연히 무공 관련일 텐데, 무공은 하루아침에 결과를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긴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인 만큼, 당장 마스를 따돌리더라도 그렇게 오랫동안 비밀을 지킬 수는 없을 거라 여겼을지 모른다. 뭐, 그렇게 깊게 생각했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과연 납득이 가는 말이었기에 검후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허겁지겁 달려온 마스 사절단의 꼴이 나름 우습기도 했다.

“덕분에 지루한 줄 몰랐지.”

다른 사절단에 비교해 마스 사절단의 알현 시간은 배 이상 길었지만, 당사자인 검후에겐 가장 쉽고, 재밌는 시간이었다.

물론 또 다른 당사자인 포름 훈 백작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혹시 이후에 마스 사절단에서 알현을 청하거든 바로 알려 주게. 꼭 다시 보고 싶으니까.”

“그러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응? 어째서 그런가?”

“잊으셨습니까? 곧 안티로스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 삼검왕의 반역에 대한 발표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다음엔 검후님께서 발표를 하셔야 하고요.” 

“아, 그랬지. 하루하루 시간이 훅훅 지나가서 잠시 잊고 있었네.”

그런 충격적인 중대 발표가 이어지다 보면 알현을 청할 정신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발표와 함께 공개할 검법.

모르긴 몰라도 사절단은 그것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검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검후의 손에 있는 검법을 얻으려면 검후에게 부탁해야 가장 빠른데. 어째서 검후에게 눈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느냐고.

하지만 그건 검후의 위상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누가 있어 검후에게 대놓고 당신이 만든 검법을 내어놓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축하 사절로 온 사절단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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