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33화
1468화
내성 앞 광장.
아침 식사를 일찍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숫자는 순식간에 수십, 수백을 넘어, 수천이 되었다. 크지 않은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그런 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와글와글ᅳ
웅성웅성-
길었던 축제에 연이은 사절단의 방문으로 인해 어제까지도 시끌벅적했던 소드 팰러스였지만, 오늘의 소란은 어쩐지 그 분위기가 달랐다. 그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소음의 크기였다.
어떤 경우든 수천의 인원이 모이게 되면 그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 군인과 같이 사전에 훈련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떤가.
웅성웅성ᅳ
분명 소음이 없지는 않다. 유심히 귀를 기울이면 언뜻언뜻 이야기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인원에 비해 소음의 강도가 너무도 작았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며 몸을 숨긴 아이들이 소곤대는 것처럼 한껏 몸을 웅크린 느낌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두려워 몸을 피하려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건 근심이었고, 누군가에 대한 분노였다. 사람들은 그 거친 감정이 터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곧 자신들 앞에 나타날 분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렇다. 오늘 여기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인 이유는 바로 오늘이 검후의 중대 발표가 예고된 바로 그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가운에 사람들 속에서 한 젊은이가 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믿기지 않아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이쿠, 이 답답아. 넌 아직도 그러고 있냐?”
“아니, 아저씨는 이 상황이 믿어지세요? 검후님을 배신하다니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삼검왕님들은! 검왕님은.. 그분들은…….”
“쯧쯧쯧. 원래 배신은 그런 놈들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아쉬울 것 없는 놈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역적들도 하나같이 권세 있는 놈들이었다. 배신도 힘 있는 놈들이 하는 거야.”
아저씨라 불린, 머리가 반쯤 벗겨진 남자가 심드렁히 답했다. 그의 말속에는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말에 틀린 점도 없었다. 대륙의 역사를 보아도 평민들이 역모를 꾸미고 성공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왕과 가깝거나,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자가 역모를 꾸며 왕을 배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젊은 남자는 그 말에 순순히 납득해 주지 않았다.
“그거야 돼지 같은 귀족들 경우나 그렇죠! 삼검왕 분들은 다르잖아요! 그분들은 기사 중의 기사라고요! 그런 분들이………… 그런 분들이 배신자라니! 말이 되냐고요!”
“깜짝이야! 이 자식이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그리고, 네가 믿지 않으면 어쩔 건데? 삼검왕이 누명을 썼다고 밝히기라도 하게? 그래서 저 황제 폐하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정말 황제 폐하도 못 믿겠어?”
“화, 황제・・・・・・ 아저씨! 제가 언제 황제 폐하가 거짓말을 했다고!!”
황제를 거론하는 말에 화들짝 놀란 젊은이가 중년의 입을 막으려다가 실패한다. 하지만 그걸 굵직한 팔로 제압한 중년의 남자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네 말이 그 말이잖아! 아무리 삼검왕을 존경했어도 그렇지. 정신 차려, 이놈아! 오죽하면 황제 폐하께서 직접 배신자라고 지목하셨겠냐. 너도 그날 붙은 포고문을 봤잖아!”
“그, 그래도요…….”
황제의 발표와 함께 제국 전역에 붙은 포고문은 당연히 소드 팰러스에도 붙었다. 더욱이 클라인 백작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그 어디보다 커다랗게 만들어 소드 팰러스 골목마다 붙여 놨다.
소드 팰러스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내용.
젊은 남자는 계속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자신을 향한 주변의 심상찮은 눈길에 소심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모습에 중년 남자가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젊은 남자가 답답하고 한심한 이유도 있었지만, 상대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삼검왕에 대한 믿음과 존경. 그게 어디 젊은 남자만의 것이었겠는가.
소드 팰러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빌어먹을 놈들! 돌로 쳐 죽일 놈들! 기사라는 것들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배신을 하다니. 그것도 다른 분도 아니고 검후님을!! 죽일 놈들! 죽일 놈들!!!”
중년 남자는 부득부득 이를 갈며 삼검왕을 저주했다.
이런 모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힘없는 어깨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장면이 광장 곳곳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삼검왕에 대한 처절한 배신감.
검후에 대한 안타까움.
그것이 한데 어우러진 욕설과 저주가 삼검왕에게 쏟아졌다.
평소 소드 팰러스에서 삼검왕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봤을 그런 광경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이 소드 팰러스에서 삼검왕은 저 검후와 함께 황제에 버금가는 혹은 황제 이상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지지가 저주가 되어 쏟아지고 있다.
삼검왕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신망과 명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지네.”
이드는 이런 대중의 모습에 작게 진저리를 쳤다.
“인간은 죽어 가죽 대신 이름을 남긴댔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지는 이름이면 무슨 소용이야.”
“확실히 굉장한 모습이긴 해요. 이렇게 일순간에 반전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테라스 난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라미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금 이드 일가 세 사람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미리 나와 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있을 검후의 발표를 보기 위해서.
두 사람의 옆에서 일리나가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고, 라미아는 그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신 이번 경우가 워낙 특별하잖아요. 귀족이 아닌 기사로서 명성을 쌓은 삼검왕에게 배신이란 죄목은 치명적이죠. 더욱이 상대가 검후잖아요. 주군인 동시에 스승을 배신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해요.”
도덕적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삼검왕의 배신은 최악이라는 말이었다.
거기에 따지고 보면 삼검왕의 명성도 검후라는 튼튼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기도 했다.
제국 황녀의 기사로, 또 무공의 선구자인 검후의 제자로 삼검왕은 얼마나 많은 양보와 배려를 받았을까.
어찌 보면 그렇게 쌓인 빚이 지금 한꺼번에 돌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그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빚 갚기를 포기하고 도망쳐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두 사람. 차 마셔요.”
일리나가 잘 우려진 두 잔의 차를 내밀었다.
은은한 황금색 찻물은 절로 은은한 미소가 솟아나는 맛이었다. 이드는 차가 맛있다고 말하고는 내성 앞에 높이 세워진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슬슬 나올 시간이지 않아요?”
“맞아요. 찻물을 가져오며 봤는데. 준비는 끝난 것 같았거든요.”
“전 못 봤는데. 어땠어요?”
수많은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다. 옷은 물론이고 작은 보석 하나, 머리 스타일 하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사절단을 만날 때 이상으로 꼼꼼하게 준비를 해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특히 오늘의 발표 내용을 생각하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설지도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일리나는 잠시 자신이 본 검후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듯하더니, 살포시 볼을 붉혔다.
“고고한 백합 같았어요. 빛이 나는 것 같은 아름다움이랄까? 그런데 막 화려하기보다는 은은한 백합 향을 닮은 고아한 아름다움? 그런 모습이었어요.”
굉장히 추상적인 설명이었지만,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는 몰라도, 일리나의 말을 들으면 철저하고 완벽하게 준비한 것 같다는 느낌은 충분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드는 그런 기대와 함께 일리나가 앉은 의자 팔걸이에 살짝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에 대고 속삭였다.
“다음엔 일리나도 그런 모습으로 입어 볼래요?”
“네?”
갑작스러운 권유에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는 일리나
이드는 아기 고양이 같은 그녀의 모습에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일리나도 그렇게 입어 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난 그렇게 들었는데.”
“아이 참, 내가 언제요?”
“아니었어요? 내 귀엔 그렇게 들리던데. 어쨌든 다음에 입어 봐요. 분명 어울릴 테니까.”
그냥 막 밀어붙이는 이드의 모습에 살짝 부끄러워하던 일리나는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검후의 모습을 보지도 않고 어떻게 어울릴지 알아요?”
“상관없어요. 뭐든 어울릴 테니까.”
이드는 당연한 것 아니냐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검후에게 어울리는 옷이라면 일리나에 어울리지 않을 리가 없다.
설령 검후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도 일리나가 소화 시키지 못할 리가 없다. 하이엘프인 그녀에게라면 거지의 누더기도 그림처럼 아름다울 것이 분명하니까.
‘거기에 오늘같이 수많은 대중 앞에 나서는 검후를 위한 준비를 허술하게 했을 리가 없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클라인 백작과 쉴라 단장, 거기에 스폴까지 있는데.’
다른 사람. 심지어 검후 본인이 나서서 이상한 의상을 고르더라도 저 세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고 바꿀 것이 분명했다. 이드는 그 세 사람의 검후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믿었다.
“아하하하.”
그리고 이런 이드의 모습에 일리나는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드의 반응이 재밌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붉어진 볼과 촉촉한 눈동자를 보면 분명 싫어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라미아는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해했다.
“음, 음! 다시 봐도 완벽해. 내가 참 잘 가르쳤단 말이야.”
지금 이드가 보이는 사랑의 속삭임.
그 교육자가 바로 라미아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혼란이 가득한 테라스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 가정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쿠구궁!
웅성!
닫혀 있던 내성의 성문이 열리며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소음이 완전히 멎어 버렸다.
뒤이어 오색 기사단 중 남은 삼색 기사단이 성문 앞에서 무대까지의 길을 만들었고, 그 뒤에 나타난 클라인 백작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주목하시오! 곧 이 소드 팰러스의 주인이신 검후께서 나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