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34화
1469화
내성의 성문을 나서는 세 기사가 깃발을 높이 들었다.
펄럭!
오 미터가 넘는 깃대에는 각각 제국와 검후, 그리고 소드 팰러스를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선명한 구두 소리.
또각또각.
종소리처럼 큰 것도 아닌데, 묘하게 광장 끝까지 들리는 그 소리에 사람들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검후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순간 숨죽인 탄성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순백을 베이스로 적색과 자색을 적절히 사용해 고귀함을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검후는 동화 속 공주님처럼 아름다웠다. 저절로 빛이 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에 감수성 예민한 젊은 남녀들이 몽롱한 눈빛으로 볼을 붉혔다.
그렇게 묘한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검후는 기사들이 만든 길을 따라 무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갔다.
그리고 테라스 위에서 이런 모습을 내려다보던 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진짜 작정하고 준비했잖아.”
“농담이 아니라 정말 장인이 한 땀 한 땀 혼을 담은 드레스 같아요.”
똑같은 감탄이지만 어쩐지 느낌이 다른 라미아의 감탄. 실제로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풀려 있었다.
“장인의 혼은 몰라도, 누가 골랐는지 몰라도 완벽하게 어울리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일리나에게도 잘 어울릴 것 같고.”
슬쩍 눈빛을 주는 이드에 은은히 미소 짓는 일리나.
그런 중에 시야 중간에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라미아.
“나는요?”
“당연히 라미아에게도 어울리지. 나중에 구입처 알아보고 두 사람이 입을 드레스도 만들어 달라고 하자.”
“꼭이에요!”
“전・・・・・・ 흰색보다는 녹색이 좋아요.”
검후의 드레스가 얼마나 마음에 든 것일까? 거절의 말은 고사하고 저 일리나가 자기 취향까지 더해 주문하다니.
하긴, 이해는 간다. 보는 눈이 있다면 탐나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장인이 검후를 위해 온 힘을 쏟았을 테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 한 벌이면 어지간한 자작 영지의 두 달 예산은 나올 것이다.
정말 부자가 아니면 엄두도 낼 수 없는 귀물.
물론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고, 거기에 레어까지 두 개나 날름 털어먹은 이드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옷도 옷이지만, 조합이 정말 뛰어나. 평소 검후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잖아.” 이드는 팔짱을 끼고는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그에 마음에 드는 선물이 예약된 것이 기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라미아가 신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주제가 배신이잖아요. 그러니 강력한 검후보다는 고아하고 가냘픈 모습을 부각해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싶었던 거겠죠.”
“보호 본능이라.”
이드는 헛웃음이 났다.
가냘픈 여인에 대한 보호 본능이라니. 그거야말로 검후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나열이 아닌가.
검후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대륙 최강의 기사가 바로 그녀다. 세상 어떤 인간도 그녀를 약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런데 그 굳어 버린 이미지를 화장과 드레스, 그리고 몇 가지 장신구를 통해 바꿔 버렸다. 가히 마법과 같은 연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당장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을 봐도 그 효과를 알 수 있다.
“그 강건하시던 분이 저렇게 여위시다니. 얼마나 고초가 심하셨으면…….”
“크흑! 개 같은 것들. 어떻게 저런 분에게…………….”
검후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난 사람들이 너도나도 연신 축축한 눈가를 찍어 댔다. 비련의 여주인공을 눈앞에 둔 것처럼.
이드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에 황당해서 한숨이 났다.
“연출자의 능력이 좋은 건지, 사람들이 단순한 건지 알 수가 없네.”
아무리 이런 분위기를 노렸다지만, 저렇게 쉽게 홀라당 넘어갈 수가 있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는 사이.
검후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순간 작은 웅성거림이 멈추고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검후의 첫마디는 무엇일까.
삼검왕에 대한 복수의 선언일까?
아니면 소드 팰러스에 대한 원망?
혹은 소드 팰러스와 스스로의 건재함에 대한 과시?
광장 한쪽에 모인 각국 사절들은 곧 이어질 검후의 말을 기다리며 파르르 펜을 떨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말은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적혀 그대로 상부로 전해질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말이 없던 검후는 곧 사람들을 둘러본 후 희미한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거, 검후님?”
그 얼굴은 소드 팰러스의 사람에게 있어 익숙한 표정이었다.
어린 수련생과 아이들을 상대할 때 항상 지어 보이던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미소.
“다시 보아 좋구나. 많이, 너희들이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단다.”
“거, 검후님!”
“저희도! 저희도 뵙고 싶었습니다!”
“흑흑! 어떡해! 어떡해! 우리들이 보고 싶으셨다!”
광장에 모인 그 어떤 사람의 예상과도 다른 첫마디에 광장은 일순간 눈물바다가 되었다. 눈가를 찍어 대던 사람들은 기어코 줄줄 눈물을 흘렸고, 닳고 닳은 노인들도 감격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반대로 검후의 첫마디를 기다리던 사절단은 허탈함에 한숨을 푹 쉬었다.
“설마 첫마디가 저런 것일 줄이야.”
“역시 검후입니다. 정말이지 당할 수가 없네요. 이래서야 소드 팰러스가 흔들릴 리는 없겠습니다.”
“허허. 흔들리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단단히 결집될 겁니다. 검후의 저 한마디에는 그런 힘이 있어요.”
“에잉! 이래서야…….”
혀를 차는 사람, 감탄하는 사람 등 반응은 다양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나 소드 팰러스가 흔들려 실망하고 떠나는 인재들이 있다면 과연 그들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사절단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과연 실망해서 떠나는 인재가 나오기는 할까?
곧이어 삼검왕에 대한 발표도 있겠지만, 이미 황제의 발표가 있은 후다. 검후의 말을 통해 새삼 실망할 것이 무엇인가. 더욱이 보고 싶었다는 검후의 저 한마디로 인해 단단해진 마음에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검후의 입에서 삼검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그대들이 궁금해하는 의문을 풀어 주는 것이 우선이겠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 후에 하도록 하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제의 포고문은 모두 사실이다. 일 년 전이었다…….”
황제의 포고문에는 적히지 않는 배신의 날.
바로 그날 있었던 일이 검후의 입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물론, 각국 사절단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들도 대략적인 정황만 짐작할 뿐, 자세한 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검후의 설명은 길지 않았다.
중요한 부분만 짚어 내는 설명은 오 분가량 담담하게 이어졌다. 오 분. 검후의 고난이 오 분으로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설명을 듣는 사람들에겐 그 오 분은 오십 분과도 같았다. 그 속에서 삼검왕에 뜨겁게 분노하고, 검후의 고난에 눈물을 흘렸으며, 결국 고난을 이겨 낸 검후에게 박수를 보냈다.
결과가 해피엔드이기 때문일까.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검후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러면 되었다.’
검후가 꺼낸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밝히지 않은 일도 많았다. 이드와 혼돈의 파편은 어림도 없고, 초인파와 바벨에 대해서는 아예 쏙 빼 버렸다.
저들의 사죄를 받기도 했지만, 그에 대해 언급해 버리면 사안이 너무 복잡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다만 마스에 대한 부분에서는 언급을 흐지부지했다.
현재 제국과 마스의 상황 때문이었다. 검후가 마스의 땅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건 상황을 보아 가며 써야 할 무기였다.
그렇게 사람들을 두루 살피는 검후의 눈에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두 부류가 들어왔다. 우선은 사절단이었다.
저들의 분위기는 애매모호했다. 굳이 정하자면 살짝 실망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이해는 되었다. 저들이 기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절대 이런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검후는 저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사실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시체나 뜯어 먹는 놀 같은 괘씸한 작자들’
검후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곧이어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그러지 못했다. 사절단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들.
그들은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제법 굵어진 수련생들.
검후가 하는 말에 그저 기뻐하는 백성들이 아닌, 검후의 말 속에 감춰진 뒷면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조금은 체감한 사람들의 반응은 좋을 수만은 없었다.
검후의 첫마디가 그들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검후의 입을 통해 전해진 삼검왕의 배신과 야심은 그들에게 큰 허탈감을 안겨 준 것이다. 검후는 이런 기사들의 마음을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믿었던 만큼 마음이 아픈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자신도 그러지 않았던가. 안타까운 점은, 저와 같은 마음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더욱이 주변의 분위기와 자신이 괴리될수록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진다. 어쩌면 너무 실망이 커 저들 중 소드 팰러스를 떠나는 자도 생겨날 수 있다. 물론 검후도 그런 기사들을 하나하나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오고 감을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드 팰러스와 제국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손해다. 무엇보다 그렇게 떠나는 개인에게도 손해다. 그래서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준비한 물건이 있지 않던가.
검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를 위하는 그대들의 마음이 참으로 기쁘구나. 그러므로 나는 그 마음에 보답할 수 있는 지금 상황이 참으로 고맙다.”
검후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입을 닫았다.
그와 함께 사절단은 바짝 긴장했다.
“지금부터가 나오는 말이 검후가 언질을 주었던 일일 것이오!”
“지금부터 나오는 말은 하나도 빠트리지 마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보답이라니? 진짜 새로운 무공이라도 준비했단 말인가?”
입술을 질끈 깨무는 사절단.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검후가 잠시 말을 멈추고, 기운 빠진 모습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이에 기사들이 고개를 갸웃할 때 검후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나를 생각하는 그대들의 마음 덕분일 것이다. 나는 고난 속에서 운 좋게 검법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한 가지 결단을 내리려고 한다. 나는 이번 고난 속에서 얻은 검법을 그대들 모두와 함께 공유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 검법. 멜팅 블러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