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35화
1470화
이틀 전, 이드는 예상보다 조금 빠르게 검법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 검후의 손에 들린 한 권의 책이 바로 그때의 결과물이었다.
그때 비급을 받고 반짝이던 검후의 눈빛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무튼, 그때만 해도 비급의 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일은 내용에 대한 수정이지, 검법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검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정했어?”
“최종 선택만 남겨 두고 있어요.”
비급의 첫 장을 넘기며 건성으로 대답하던 검후.
그땐 여러 가지 이름 중에서 고민 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때의 최종 선택은 그 뜻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멜팅 블러드.
그 증거로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던 그 이름이 책 표지 한가운데 떡하니 박혀 있지 않은가. 거기에 금박을 입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반짝임에 눈이 아파진 이드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진짜 저 이름을 그대로 쓸 줄이야. 무슨 똥고집인지.”
아니나 다를까. 자신과 함께 멜팅 블러드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의 고개가 하나같이 땅을 향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이 사달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닐까.
그러자 라미아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말했다.
“정말 고집불통도 저런 고집불통이 없어요.”
“그녀는 원래 고집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조금 더 심해진 면이 있기는 해요.”
일리나가 말했다.
검후와 특별한 인연을 가장 오랜 시간 이어 온 그녀. 하지만 검후는 이런 일리나의 의견도 듣지 않았다.
아무리 취향 차이라지만, 똥고집도 이런 똥고집이 없다.
이드는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멜팅 블러드. 도대체 저 이름 어디에 매력이 있기에 저렇게 밀어붙인 것인지.
뭐, 이제는 물릴 수도 없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 내놓은 이름이다. 낙장불입에 쏟아진 물이란 말이다.
“그나저나 걱정이네. 사람들이 이상한 이름이라고 하면 충격받지 않으려나.”
“받으라죠, 뭐. 다 자업자득인데. 누굴 탓해요.’
“그렇기는 한데.”
이드는 퉁명스러운 라미아의 반응을 뒤로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직 사람들은 조용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아 반응이 늦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좀 전까지 사람들의 머릿속엔 배신에 대한 일로 가득했으니까. 그런 중의 깜짝 발표였지 않나.
새로운 검법이라니.
뒤통수를 때려도 정도가 있지.
물론 검후 측에선 바로 지금과 같은 모습을 노렸던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놀라기는 사전에 언질을 받고 혹시나 하고 있던 사절단도 마찬가지. 예상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고는 해도 놀람의 정도가 결코 작지 않은 모습이다. 그렇게 일차 충격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하나둘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
“세상에!”
“검후님의 검법이라니.”
“기사님들이 또 구름처럼 몰려들겠구먼.”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야.”
웅성대는 소음이 폭발했다.
놀람을 감당하지 못한 혼잣말부터, 혹자는 옆 사람을 붙잡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말속에 들어 있는 것은 하나같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흥분을 감당하지 못한 누군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검후님께서 우리 소드 팰러스에 새로운 무공을 내리셨다! 듣기만 해도 피가 끓어오르는 그 이름! 멜팅! 블러드으으으으!!!!”
“피가 끓어오르는 이름!! 멜팅 블러드으으으으!!!”
“검후님 만세! 멜팅 블러드 만세!”
“세상 모든 기사들은 다시 소드 팰러스로 모여야 한다!”
“검후님과 멜팅 블러드를 찬양하라!”
와와와!!!
사전에 사람들을 깔아 둔 것도 아니었다. 정해진 구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저 미친 듯이 검후 만세를 외치고, 멜팅 블러드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에 끝난 축제가 다시 시작된 듯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삼검왕의 배신으로 인해 소드 팰러스에 찾아올 뻔했던 시린 겨울과 같은 우울을 막아 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단순히 막아 낸 수준이 아니다. 이제 멜팅 블러드를 배우기 위해 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이건 그저 짐작이 아닌 경험에 근거를 둔 사실이었다.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과 같은 경험이 있었던 상인들의 얼굴은 벌써 활짝 폈다.
“대박이다! 대박이야! 검후님 만세!”
“우하하하! 창고 가득 술과 음식 재료를 채워라! 채우고, 채우고 또 채워라!”
“오늘부터 최고의 검법은 바로 멜팅 블러드다! 우헤헤헤헤!”
“……”
테라스에서 걱정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드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런 이드를 대신해 라미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실망은커녕. 저 사람들 멜팅 블러드라는 이름을 너무 좋아하는데요?”
“알아. 나도 보고 있어.”
그런데 과연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이드는 슬슬 눈을 비볐다. 그런다고 눈앞의 광경이 바뀌지는 않았다. 멜팅 블러드 만세라는 외침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진짜 저 이름이 좋다고?”
이드는 진심으로 납득하기 어려웠다. 왜 저 이름에 환호하는 걸까? 저 이름이 진짜 멋지다고 생각하는 걸까?
“혹시 군중 심리 같은 건가? 다른 사람들이 좋다니까 일단은 따라서 손을 드는 그런 거 있잖아.”
“명명백백 진심인 거 같은데요. 일리나가 보기에도 그렇죠?”
“맞아요.”
군중 심리라는 단어로 현실 도피를 시도하는 이드의 발목을 라미아와 일리나가 잡아끌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은 여자가 더 뛰어나다는 말이 사실인지. 두 사람도 멜팅 블러드에 반대하긴 마찬가지였음에도 사람들의 반응에 덤덤하다.
오히려 빠르게 상황에 대한 분석까지 내놓았다.
“결국 이름 따윈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던 거예요. 그저 검후의 무공이라는 것. 저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그 하나뿐이라는 거죠. 검후의 무공이라면 그 이름이 프리티 캣이라도 상관이 없었을 거예요.”
프리티 캣이라니.
아무리 검후의 열성 지지자라고 해도 그건 납득해 주지 않을 것 같지만, 아무튼 사람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납득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기뻐 반긴다면 그것으로 목적은 충분히 이룬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 증거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지 않은가. 물론 제일 당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검후다.
마침 사람들을 살피던 이드의 눈이 검후와 마주친 순간.
‘봐요! 제 결정이 옳았잖아요!’
분명 전음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검후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고막을 후벼 파는 것처럼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드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과연 발표가 끝나고 돌아온 검후가 얼마나 우쭐해서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지.
“끄응. 이래서 사람들이 일단 유명해지고 보라고 했던가.”
그러고 보면 무림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같은 말을 해도 저잣거리 광대가 하면 우스갯소리가 되지만, 고승이 하면 깊은 지혜가 담긴 선문답이 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래도 조금 부럽네.”
이드는 목이 터지게 검후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과 기꺼운 얼굴로 그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검후의 모습에 조금 부럽고 질투가 났다. 과연 자신이 검후와 같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일이 있을까?
길고 긴 무림 역사에도 저만한 지지를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쁨과 흥분이 흘러넘치는 중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드의 눈길이 그들의 무리를 향했다.
“저쪽 반응은 어쩐지 애매하네.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계획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제길. 끝났습니다. 사람들 반응을 보십시오. 텄어요, 텄어!”
이드의 말처럼 사절단의 반응은 애매했다. 전체적으로 실망한 모습이기는 했다. 그들의 목적은 인재의 확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계획은 이미 실패한 것 같았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도 모른다면 그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수련생과 기사들도 똑같이 흥분해서 소리치는 모습을 보라지.
그렇다고 꼭 실망만 가득한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새로운 검법을 내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흥, 정말 몰랐습니까?”
“혹시나 했지요, 혹시나 가능성이 적었지 않습니까. 검후께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든 무공을 내놓은 지가 벌써…………….”
“대략 40년 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래요. 40년 만입니다. 검후의 무공이 나오는 일은 다시는 없을 줄 알았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었다.
거의 반백 년간 검후는 새로운 무공을 발표하지 않았다.
물론 그사이 새로운 무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검왕을 필두로 소드 팰러스에서 오랫동안 갈고닦으며 깨달음을 얻은 기사들이 자신들의 무공을 발표했고, 각국에서도 재원을 쏟아 무공을 만들었으며, 능력 있는 귀족 가문은 물론 마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은 자신들의 무력을 높이기 위해 공개되지 않았지만, 일부 자신들의 권세를 높이고,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해 기초적인 무공을 공개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발표되는 무공이 일 년에 적어도 다섯 권 이상이다.
아쉬운 점은 대부분이 기초적인 레벨로, 평생을 익혀 볼 정도로 깊이 있는 무공은 없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사실 그만한 무공을 공짜로 공개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기는 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소드 팰러스와 검후의 존재가 칭송받는 것이었고 말이다.
평생을 갈고닦을 정도의 무공을 온전한 형태로 큰 제약 없이 공개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니까.
하지만 그런 검후 조차 40년 간 새로운 무공을 발표하는 일이 없었다.
워낙 긴 시간이었기에, 이제 새로운 무공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40년 만에.
그것도 배신이라는 위기를 이겨 내고, 검후가 새로운 검법을 내놓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역시・・・・・・ 노린 것이겠지요?”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반되는 두 가지 일을 같은 날 발표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깝게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아깝게 되었어요.”
“그래도・・・・・・ 궁금하네요. 멜팅 블러드.’
“멜팅 블러드라, 이름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