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36화
1471화
검후의 발표는 짧게 마무리되었다.
원래 준비한 것은 훨씬 많았다. 당장 멜팅 블러드의 수련에 관련한 사항도 제법 있었지만, 그에 대해 말하기엔 사람들이 너무 흥분한 상태였다. 검후가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 가도 제대로 듣는 사람이 없었다.
감히 제국 황녀인 검후께서 옥음을 내리시는 중에 딴짓을 한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사나운 얼굴을 한 기사들이 달려 나가려 했다.
그들이 나섰다면 뜨거운 열기에 찬물을 붓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힘없는 평민들이 수백 기사들의 살기와 위압감을 감당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검후의 제지에 기사들이 나서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검후로서는 현 상황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애초에 이런 반응을 원한 멜팅 블러드의 발표였으니까. 다만 기분 좋은 오산은 있었다.
‘놀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반응이 뜨거울 줄이야.’
반응이 뜨거워도 너무 뜨거웠다. 이 또한 기쁜 일이었다.
이 열기가 자신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준비한 것을 다 풀어내지 못해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필요한 것들은 나중에 다양한 형태로 전달하면 될 일이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일이었고, 그것은 이미 넘치도록 성공한 상태였다.
와글와글!!
자신의 말이 끝이 났음에도 그도 모르고 떠들기 바쁜 사람들.
지금의 흥분이 가라앉으면 저들의 입을 통해 곧 대륙 곳곳으로 소문이 퍼져 나갈 것이다. 소드 팰러스와 멜팅 블러드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생각하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검후.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향해 열렬한 환호를 쏟아 냈다.
검후가 발표를 이어 갈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한 사람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검후를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뜨겁게
주시하고 있었더랬다.
검후님! 소드 팰러스를 지켜 주소서!!
신이여, 우리 검후님을 수호하소서!!
마침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소리에 검후는 가볍게 손을 들어 답했다. 그 기쁨에 기절하는 사람들을 본 후 검후가 기사들에게 명했다.
“돌아가겠다.”
“길을 열겠습니다.”
검후의 말에 기사들은 즉시 길을 넓혔다.
“물러서라! 검후께서 지나시는 길이다!”
검후는 그렇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내성으로 향하며, 한데 모인 사절단을 살폈다. 사람들과 놀람을 함께하던 그들은 현재 굉장히 바빠 보였다. 사절단의 단장들은 사방으로 무어라 명령을 내리는 듯했고, 그 보좌들은 마치 휘갈기듯 상황을 정리하는 중이다.
그와 동시에 좀 전까지 사절단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은 사람들을 헤치고 길을 만들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사절단은 이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본국에 전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선 통신이 가능한 숙소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비켜라!”
“일리나스 왕국 사절단이 지나는 길이다!”
“잠시 지나가겠소!”
그런데 쉽지 않다.
소리를 지르고, 위엄을 보이고, 사정을 해 봐도 몇 사람이 비켜설 뿐 주변의 소음에 다 묻혀 버린다.
“이 천박한 것들이 감히!!”
몇몇 기사들은 분노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평민들에게 기사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두려운 존재니까. 감히 그 앞을 막아서는 평민은 없었으니까.
당장 손이 검으로 향했다. 당장 몇 놈만 베어 놓으면 기겁해서 흩어질 테니까. 하지만 생각은 끝내 실천되지는 않았다.
“행여 괜한 생각으로 사고 치지 말게.”
다른 기사들의 충고도 충고지만, 지금 자신들이 선 땅이 소드 팰러스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드 팰러스는 제국의 땅이며, 여기 길을 막은 놈들은 검후의 영지민들이었다. 개도 주인을 보고 잡으랬다고, 이들을 베었다가는. “크아아! 길을 비키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것들아!”
결국 검에서 손을 뗀 기사는 검 대신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소리치기 시작했다. 뭐, 그래 봐야 큰 효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단숨에 눈에 담은 검후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고를 쳤다면 본보기로 삼으려 했는데. 그래도 사절단에 포함될 최소한의 자격은 있는 놈이었구나.”
“아, 사절단 말씀이시군요.”
검후의 시선이 향한 곳을 살핀 클라인 백작이 신경 쓰실 것 없다며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 기사들을 미리 보내 놓았으니, 영지민들이 상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았네. 잘해 주었어.”
“당연히 살펴야 할 일입니다.”
당연하다면서 입은 싱글벙글한 클라인 백작이다.
검후는 그와 함께 열심히 인파를 헤치며 나아가는 사절단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앞서 수련생의 배분에 대해 말했던 일이 있었지? 그 자리를 하루나 이틀 뒤로 잡아 보게.”
“그렇게나 빨리 말입니까?”
“그 정도면 상황 파악은 끝냈을 것 같은데, 빠른가?”
“아닙니다. 검후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그 시간이면 이미 누굴 수련생으로 밀어 넣을지 리스트를 꾸미고도 남습니다.”
사절단의 입장에선 아마 오늘이 가장 바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늦은 밤까지 수정구 앞에서 자리를 비울 수도 없을 터였다. 마치 범인처럼 취조를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짜 수완이 좋은 작자라면 보고를 올린 후 해가 지기 전에 날 찾아오겠지.’
선착순은 아니지만, 가장 먼저 약속을 잡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게 될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과연 누가 가장 먼저 달려오려나.’
그야말로 치열한 눈치 싸움.
그래도 다행인 점은 선착순과 상관없이 이미 꼴찌는 마스로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저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사절단의 움직임은 클라인 백작의 예상대로였다.
겨우 인파를 헤치고 나와 엉망이 된 사절단은 복장을 정돈할 여유도 없이 긴급히 수정구 앞에 모여 마법사들을 닦달했다.
“긴급이다! 당장 본국과 연결하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둘러 주게. 그리고 자네들은 검후의 발표에 대해 서면으로 정리하고, 그에 따른 영향을 분석해 오게.”
“저, 저희가 말입니까?”
“무립니다! 그걸 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사절단장의 명령에 보좌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질겁을 했다. 하나의 현상에 따른 그 여파를 분석하라니. 단순 계산만으로도 무시무시할 정도의 작업량이 예상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에 관한 자료는 본국에 있을 테니, 그쪽에서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분석 자료를 꾸미기엔 저희들이 가진 자료가 압도적으로 부실합니다.”
보좌진 중 그래도 젊은 관료가 차분히 앞뒤 상황을 따져 말했다. 옳은 말이었다. 그들은 사절단이지, 조사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분석하기에는 기반이 될 자료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보좌진에 사절단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그걸 모르겠나. 자네 말이 옳아. 하지만 본국의 자료는 최소 40년 전의 것이야. 그간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나. 더욱이 자네들도 보지 않았나. 검후의 발표에 흥분하던 사람들을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본국에선 자칫 기존에 있었던 일이라고 가볍게 볼 수도 있어. 그러니 오판하지 않도록 우리도 분석 자료를 내야 하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소드 팰러스의 분위기가 좀 특별하긴 하지 않습니까.”
반박이 바로 나왔다.
검후의 땅에서 검후에 대해 환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말이다. 일견 옳은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네. 무엇이든 타이밍이 가장 중요한 법이지. 검후의 발표도 같아. 평온한 중에 발표된 것이라면 그 반응이 미지근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이 평온한 상황인가?”
“아니지요. 제국의 입장에서도, 검후의 입장에서도.”
납득한 듯 고개를 숙이는 보좌진.
“이해가 빨라서 좋군. 그럼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건가?”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절단장의 재촉에 보좌진은 벌써 반쯤 죽은 얼굴로 회의실로 달려들었다. 장담하는데, 한번 회의실로 들어선 저들은 다음 날까지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수정구를 앞에 둔 마법사가 통신 채널을 확보했음을 알려 왔다.
“수고했네. 그럼 자리를 비켜 주게. 그리고 미리 준비를 해 두게. 어쩌면 오늘은 하루 종일 통신이 끊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마법사였다.
사절단장은 그런 마법사를 방에서 내보낸 후 수정구 반대편에 나타난 익숙한 얼굴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긴급 상황입니다. 전하께 직접 고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전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단장님의 연락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늘이 검후의 발표날임은 각국에서도 잘 알고 있는 일.
황제의 발표문에 이어 과연 검후는 어떤 충격적인 발언을 내놓을지 각국에서는 이미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갑자기 캄캄하게 어두워진 수정구는 잠시 후 밝아지며 주변 배경과 함께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그에 사절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표했다.
“위대한 드레인의 수호자를 뵈옵니다.”
-쓸데없는 절차는 생략하지. 긴급 상황이라지 않았나. 그래, 무슨 일인가? 검후가 어떤 충격적인 발표를 했기에 자네가 긴급 상황이라 말한 것인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왕에 대한 직보는 없다.
그 자체로 이미 사태가 긴급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삼검왕에 대한 발표 내용은 본국에서 이미 예측하고 있던 대로였습니다. 황제가 발표한 내용에 살을 덧댄 정도입니다. 하지만 제가 긴급이라 말한 이유는 그 발표 뒤에 붙은 내용 때문이옵니다.”
-무엇인가.
“멜팅 블러드, 검후가 새로운 검법을 공개했습니다.”
사절단장의 말에 왕은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수정구 너머 비치는 눈빛은 깊어졌다.
-그도 이미 예상 시나리오 가운데 포함된 일이 아니었나? 자네도 그걸 모르지 않을 것이고. 그런데 긴급이라?
그렇다면 이유를 말해 보라는 무언의 재촉에 사절단장은 검후의 발표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내용을 꺼내 들었다.
“다른 세세한 부분은 차치하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제가 되는 검법인 멜팅 블러드는 수련 정도에 따라 삼검왕과 같은 경지까지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