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38화
1473화
발표가 있은 다음 날의 점심나절이었다.
이드는 소파에 기대앉아 부들부들한 쿠키를 씹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검후가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요 며칠 사이 자주 반복되고 있는 그림이다.
그렇게 종이를 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중에 노크와 함께 클라인 백작이 들어섰다.
그는 우선 검후를 향해 멋들어진 인사를 올리고는 마주 앉은 이드를 보고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오늘도 함께 계셨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고생인 걸 알면 백작이 좀 말려 주세요. 하루에 몇 번씩이나 불러 대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닙니다.”
이드가 피로에 지친 얼굴로 엄살을 떨었지만, 당연히 진심은 아니다.
검후가 이러는 이유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멜팅 블러드를 공개했으니, 곧 몰려들 수련생을 지도하기 위해서라도 멜팅 블러드를 속속들이 파악해야 할 테니 말이다.
스승이 되어서 제자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수치를 당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하하. 저희 소드 팰러스는 명예 후작님의 지금 고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지 않은 클라인 백작은 구해 달라는 이드의 등을 오히려 떠밀었다.
그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드가 고생을 하면 할수록 소드 팰러스와 검후에 이득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죽으나 사나 검후 사랑이 지극한 그가 검후의 편을 들지, 누구 편을 들겠는가.
“칫, 역시 내 편은 라미아와 일리나뿐이군요.”
섭섭한 티를 내며 툴툴대는 이드였지만, 클라인 백작의 미소에는 흔들림이 없다.
그 미소가 얄미워 이드가 막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차에 메모를 마친 검후가 고개를 들었다.
“과연 라미아와 일리나가 이드의 편일까요?”
“뭐?”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눈이 동그래진 이드.
검후는 그런 이드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는 클라인 백작을 돌아보았다.
“오늘 내 일정은 비어 있을 텐데. 어쩐 일인가?”
“휴식하시는 중에 황공하옵니다.”
“괜찮네. 자네가 고생이지. 그보다, 그것 때문에 온 것인가?”
슬쩍 눈짓을 하는 검후에 클라인 백작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검후 앞에 내려놓았다.
“전날 발표에 대한 국내외 반향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예상보다 반응이 워낙 커서 따로 보고를 올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건 이미 예상한 일이 아닌가? 크면 얼마나 크기에?”
검후는 그리 말하며 탁자에 올려진 보고서를 살폈다.
그에 이드도 슬그머니 관심을 보였다. 티끌 없는 최고급 종이에 콩알보다 작은 글자들이 가득하다. 그런 서류가 백 장이 넘어간다. 읽는 데만도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드는 바로 관심을 끊어 버렸다.
“보고서의 양이 상당하군. 그만큼 반응이 크단 말인가?”
“사전에 예상했던 수치보다 두 배 이상입니다. 특히 라일론을 시작으로 각국의 반응 정도가 적극적을 넘어 저돌적인 정도입니다.”
“관심을 돌리는 것이 주목적인 만큼 나쁘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그래. 과해서 좋을 건 없지.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가?”
“그에 관해서는 보고서 46페이지에……………”
“세 줄 요약 부탁하지.”
이드는 보고서를 턱 하고 덮어서는 탁자 중앙으로 밀어 버리는 검후의 말에 동질감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과연 그녀도 저 두꺼운 보고서를 하나하나 다 살피기는 버거운 모양이다.
그에 클라인 백작은 익숙한 듯 검후의 요구에 따라 답했다.
“멜팅 블러드에 대한 소문이 직할령인 엔츠를 포함한 주요 도시와 영지까지 퍼졌다는 보고입니다.”
엔츠가 어딘가.
그런 자연스러운 의문에 이드는 한쪽 벽에 걸린 제국 전도를 살폈다. 그리고 지도에서 엔츠를 찾아낸 이드는 솔직히 놀라고 말았다.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갔단 말입니까? 일부 귀족들만 아는 것이 아니라?”
엔츠는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직할령이다.
위치는 제국 북쪽 땅끝으로 그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로, 물류의 허브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다.
또 소드 팰러스와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엔츠에까지 소문이 닿았다니. 그것도 통신구를 사용할 수 있는 고위층이 아닌, 일반 백성에까지 말이다.
“말씀하신 대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멜팅 블러드에 대한 언급이 시작된 상태입니다. 아직 일부이긴 합니다만, 제국 전역으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빨라도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워낙 흥미로운 주제니까요. 멜팅 블러드는 최고의 땔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드도 멜팅 블러드가 최고의 땔감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당장 그 땔감이 들어간 소드 팰러스도 용광로처럼 활활 타고 있지 않은가. 멜팅 블러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하루가 지났음에도 그 열기가 조금도 식지 않은 모습을 직접 보기도 했다.
또한 발표 전에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멜팅 블러드에 대해 공개하면 그 소문이 산불처럼 사방으로 퍼질 것이라고. 하지만 이건 결코 옮겨붙는 수준이 아니다. 산의 끝과 끝에서 동시에 불을 붙였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드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황제께서 만든 것입니까?”
이드가 떠올린 것은 삼검왕의 죄악을 적은 포고문이었다. 검후의 발표일과 그 내용까지 알고 있는 황제라면 발표 당일에 전국에 포고문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그에 말없이 미소를 짓는 클라인 백작.
그 정도면 대답으로는 충분하다. 포고문까진 아니라도 황제가 직접 여론을 만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삼검왕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제국의 기사들이다. 따지고 보면 검후보다 더 제국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들의 배신은 제국에도 충격적인 것. 검후 이상으로 이 추문을 빨리 덮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지금 과하게 일어나고 있는 반응은 황제가 개입한 탓이 아닌가?”
검후의 말에 클라인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영향이 없지는 않으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따로 있다?”
“예. 알아본 바에 따르면 지금의 반응은 정체된 무공의 발전 속도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발전 속도 때문이다?”
“네. 오래전 검후께서 마지막으로 무공을 공개한 이후로 많은 무공이 새로 만들어졌지만,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발전은 일어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정체기라고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지요.”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
검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낯선 이야기라는 반응이다.
“당연히 처음 들으실 것입니다. 지난 밤사이 현 상황에 대해 정리하면서 나온 개념이니까요.”
혁신적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무공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었고, 기사 전력도 점점 강력해지고 있었다. 누구도 정체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기준이 없어서였을 뿐이다.
검후가 삼검왕과 같은 경지에 닿을 수 있다고 확언하는 순간.
지금까지 세상에 나왔던 모든 무공이 벼락 퇴보해 버린 것이다. 저 뒤에 있던 기준점이 저 앞으로 옮겨져 버렸달까.
사실 이런 반응은 좀 격렬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멜팅 블러드의 공개에 대해 이드를 포함한 사람들은 단순히 각국의 무력 수준을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있는 자들의 여유였던 모양이다. 최첨단을 달리는 소드 팰러스에 속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언제나 소드 팰러스와 검후를 따라잡기를 바라는 입장에서는 천지개벽과 같이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하. 간단히 말해 똥줄이 탔군요.”
벼락 거지. 아니, 벼락 삼류가 된 기사 전력에 발등이 불이 떨어졌을 각국의 반응을 생각한 이드는 악동처럼 웃었다.
자신과 검후는 결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알아서 난리를 부리고 있으니. 그 모습이 퍽 우스운 것이다.
“정확한 표현이십니다. 그 증거로 어제 오후부터 제가 좀 고생을 했습니다. 각국의 사절단이 죄다 몰려와서 제 방이 비좁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거 볼 만했겠군요.”
클라인 백작이 일을 보는 집무실은 결코 좁지 않다. 그런 집무실이 비좁을 지경이었다니, 얼마나 아비규환이었을지.
검후도 그 말에 관심을 보였다.
“어디 사절단이 가장 눈치 빠르던가?”
“라일론 제국입니다. 발표가 끝나고 두 시간이 지나기 전에 절 찾아왔으니까요. 일리나스도 빨랐지만, 라일론보다는 조금 늦었지요.”
“마스는?”
“네 번째였습니다.”
“쯔쯧, 멍청한 데다 눈치까지 없군.”
네 번째면 충분히 빠른 상황 판단일 텐데도 검후는 혀를 찼다. 불합리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녀의 말도 틀린 건 없다.
일반적인 관계라면 네 번째도 충분히 빠르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 마스와 제국의 관계가 어디 그러한가. 첫 번째로 달려와도 잘 봐줄까 말까 한데 말이다.
“그래, 그렇게 모여서는 뭐라던가?”
“예상대로였습니다. 자국의 수련생들을 받아 달라더군요. 그래서 말했습니다. 내겐 그런 권한이 없다고. 그 판단은 오로지 검후께서 하신다고. 그래서 전날 말씀하신 대로 이틀 후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왜 오늘이나 내일이 아니고?”
검후는 분명 오늘내일 중으로 자리를 만들어 보라 말했었다.
“저들에게 궁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래도 반응이 예상했던 것보다 큰 만큼 저들이 내놓을 조건을 키울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만. 명하신다면 당장 내일로 일정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에도 그렇지만 멜팅 블러드를 공개한 현재의 검후는 절대 갑이었다. 사절단 정도는 그녀가 부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와야 했다. 약속 시간을 바꾸는 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하지만 검후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클라인 백작의 적절한 판단을 칭찬했다.
“하루를 묵혀 더욱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하루 정도 늦어지는 것이 문제일까. 이틀 동안 마스 놈들이 끙끙댈 것을 생각하니, 즐겁구나.”
그와 함께 흉흉한 웃음을 흘리는 검후.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좀 알아야 할 텐데.”
“흥, 알아도 상관없거든요?”
괜히 신경을 끓는 말에 또 한바탕 설전이 시작될까 싶을 때였다.
똑똑똑.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식사를 알리는 소리에 검후가 클라인 백작을 보며 말했다.
“자네도 함께하세나.”
“영광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