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55화
1490화
접견을 허락하자 길은 일행들을 정중히 초대했다.
언제까지 성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일. 이드는 초대에 응했고, 그렇게 사신단은 영주성으로 향했다.
길이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영주성의 손님맞이도 완벽했다. 입구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렸고, 문 앞에는 기사들과 집사가 나와 도열해 있었다.
준비되지 않았던 이전 방문과는 그 인상부터가 달랐다.
차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성에 도착한 일행이 곧장 안내된 접객실의 모습도 달랐다. 이전의 접객실이 넓은 대신 굉장히 딱딱하고 고압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었던 것에 반해, 이번에 안내된 곳은 안락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더해 무엇보다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주님께서 중요한 분들만 초대하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길이 이드 부부에게 상석을 내어주며 말했다.
“그런 곳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사용하는 것은 자칫 실례가 아닐지?”
“그렇지 않습니다. 황궁에 계신 영주님께서 명예 후작님 부부를 꼭 제대로 대접하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그거 영광이군요.”
집주인이 허락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드는 길이 내어주는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백작의 체격이 커서인지 자리가 넉넉했지만, 전혀 어색하거나 커 보이지 않았다.
길은 그것이 이드가 받은 명예 후작이라는 작위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처음 영주성에서 대면했을 때도 이드는 늘 당당했으며, 나람 공작과 마주했을 때도 그 모습과 태도는 다르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은 이런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이런 당당한 태도를 처음부터 꿰뚫어 보았다면, 그처럼 협박과 습격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진 않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지금과 같은 자리를 허락해 주신 명예 후작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겨우 몇 마디 나누는 일입니다. 감사받을 정도의 일은 아니지요.”
거기에 라일론 황제의 명령을 받아 내려온 인물이 아닌가. 굳이 무시할 이유도 없지만, 무시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두 사람 다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길은 다시 한번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명예 후작님께 큰 실수를 했던 절 다시 보아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당시 제가 벌였던 일에 대해 정중히 사죄드립니다. 처벌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처벌받겠습니다.”
무려 백작가의 소영주가 나서서 처벌을 받겠다니.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 분명했지만, 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막말로 목을 베겠다면 목이라도 내어 줄 기세가 아닌가.
“글쎄요. 귀국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아 내려온 사람을 제가 어떻게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이드 일행의 마중을 위해 보낸 사람이 바로 길이다. 그런 그를 처벌하는 일은 자칫 황제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걱정은 거두셔도 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이미 폐하께 허락을 받아 내려온 일입니다.”
“호오…….”
솔직히 놀랐다.
길이 먼저 처벌을 받겠다고 한 부분의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이드가 원한다면 처벌을 받으라는 황제와 그 명령을 받고 내로 온 길의 결단력은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어지간한 담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
물론 마음 한편으로는 어쩌면이라는 기대를 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을 진짜 해하겠냐고. 하지만 그런 어중간한 기대로 움직이기에는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닌가.
다른 일도 아니고 고위 귀족의 목숨을 노린 사건이다. 즉, 똑같이 죽음으로 돌려받아도 전혀 과하지 않은 일이란 거다.
물론 당시의 이드는 명예 후작이 아니었지만, 그거야 이미 중요한 일도 아니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지금이니까.
“소영주가 벌였던 일이라면 당연히 그때 습격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단 말입니까? 내가 목을 취하겠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대신, 당장은 무리입니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명을 다 수행하고 궁으로 돌아간 후, 원하시는 방향으로 형이 집행될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줄 알만큼 망설임 없는 답변.
“궁에 계신다는 백작님께선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수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묻는 겁니다만, 혹시 소영주에게 다른 형제자매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참, 할 말 없게 만드는 대답이다.
하나뿐인 자식에게 죽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아비라니. 옛날이야기 속 장군의 이야기라면 대단하다 하겠는데, 이를 눈앞에서 직접 마주하자 오히려 난감했다.
그때 요리조리 눈치를 보고 있던 스폴이 더는 참지 못하고 참견하고 나섰다.
“죄의 무게에 따라 처벌하시면 되는 일입니다.”
목숨엔 목숨으로!
그렇게 소리 없이 외치며 길이 보지 못하는 틈을 타 스윽 목을 그어 보이는 스폴이다. 아무래도 길은 그녀에게 단단히 찍힌 것 같다. 아무튼, 언제까지 저렇게 둘 수는 없는 일.
이드도 결정을 내렸다.
“당시의 일은 내겐 매우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레크널에는 좋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좋은 기억이라는 말에 숙이고 있는 길의 얼굴 위로 의문을 살짝 스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불쾌하다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요. 당시 내가 해를 입은 것은 없으니까. 소영주의 고조할아버지께 감사하세요. 소영주에게 처벌은 내리지 않겠습니다. 황제께서 마중으로 보내셨다고 하니, 그 임무에 충실해 주길 바랍니다.”
“명예 후작님의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내려주신 은혜는 언젠가 제 목숨을 걸고 보답하겠습니다.”
사실 습격을 받았을 당시 불쾌함은 있었어도 원한이랄 것은 없었다. 개미가 발을 밟고 지난다고 원한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 다른 귀족들처럼 명예와 권위를 목숨처럼 여기며, 자존심에 생긴 작은 생채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취미도 없다.
그렇기에 당시의 일에 대해 용서했다.
과거의 인연도 있기에 어렵지 않은 결정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쿵쿵!
이드의 말을 듣자마자 스폴은 붉어진 얼굴로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에게 있어서만은 길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이드의 결정을 반대할 수도 없으니, 애꿎은 가슴만 두드릴 수밖에.
이드는 이런 스폴의 모습에 이제 그만하라며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소영주도 그만 고개를 드세요. 나도 소영주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이드의 명령에 재차 깊이 고개를 숙인 길이 허리를 펴며 자리에 앉았다. 이드는 그런 길의 이마가 축축이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식은땀이었다. 목소리에는 티가 나지 않았을 뿐, 사실은 그가 매우 긴장했었다는 증거.
마침 스폴도 그 모습을 보았는지 불만이 가득하던 얼굴에 그럼 그렇지 하는 비웃음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손수건을 건넸다.
“이마에 땀이 흥건하군요. 사용하십시오.”
“배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만 받겠습니다.”
정중히 거절하고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땀을 훔치는 길이었다.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 궁금하던 점을 물었다.
“귀국의 황제께서 보내셨다고 했었지요?”
“그렇습니다. 귀한 손님을 마중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원래 이런 마중이 자주 있는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이번처럼 조용히 진행된 일에는 더더욱 없는 일입니다만.”
“그렇다면?”
대답을 재촉하는 이드의 말에 길의 얼굴에 살짝 민망한 감정이 들어찼다.
“의도치 않게 귀인의 방문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관계로, 아무래도 이런저런 불편이 생길 것 같아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제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번 방문에 대해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명예 후작님의 방문에 맞춰 폐하께서 대공작분들을 소집하셨는데,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얘기가 살짝 새어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정보 관리에 소홀했던 점도 재차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그와 함께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길을 이드가 손짓으로 막았다.
“글쎄요. 이번 방문이 철저한 비밀도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사적인 방문으로 그만한 기밀은 아니었습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정도의 일이 아니죠. 그리고 굳이 사과를 받아야 한다면 그건 제가 아닐 겁니다.”
이드는 복잡한 정치적 문제는 모조리 검후에 떠넘겼다.
사신단의 당사자이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검후를 대신한 사신일 뿐이라는 입장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할까.
“그런데 소문은 어떻게 돌고 있습니까? 혹시 사신단의 자세한 구성원까지.
“그건 아닙니다. 검후 님이 보내신 사신이라는, 딱 거기까지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지나시는 길에 자리한 영주들이 나서기엔 충분한 내용이지요.”
“그 정도라면 괜찮군요. 어차피 크든 작든 소문이 돌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소문이 퍼지는 속도나 과정은 달랐지만, 클라인 백작의 예측대로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렇게 마중을 보내주신 덕분에 귀찮은 일은 피할 수 있겠군요. 오히려 다행입니다. 마중이 없었다면 점점 초대를 거절하기 곤란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보아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아까 대공작분들이 모인다고 하셨는데.”
“네, 그렇습니다.”
“많이 오실 것 같습니까?”
“대부분 참석하실 것입니다.”
“나람 공작님도?”
“쿨럭・・・・・・ 네, 나람 공작께서도..”
갑자기 꺼내 든 나람 공작의 이름에 점점 펴지던 길의 어깨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규모가 다른 사건이 그와 이드 사이에 있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