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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56화


1491화

이후로도 길은 한동안 식은땀을 줄줄 흘려야 했다.

이어지는 질문들이 하나같이 답하기 난감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복심이 누구냐.

라일론의 대외 정책에 있어 핵심은 누구냐.

삼검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느냐 등등.

하나같이 제국의 내부 기밀을 들추는 거나, 그도 아니면 대답하기 곤란한 엉뚱한 질문들이었다.

특히.

“나라는 사람에 대해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이나 조직은 어딥니까?”

이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인기를 실감하고 싶은 자의식 과잉?

길은 멍하니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아나크렌과 마찬가지로 저희 라일론에서도 명예 후작님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입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죠. 백 년 만에 다시 나타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에 대한 소식. 과연 관심 없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길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런 질문의 요지가 뭐냐고!’

아무리 애써봐도 짐작이 가질 않았다. 질문이 너무 중구난방이었다. 그나마 겹치는 부분이 있다면 현 권력의 향방이지만, 이마저도 정확한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길의 답답함은 당연했다.

그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드가 이런 질문을 통해 혼돈의 파편에 대한 흔적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핵심을 알지 못하니, 올바른 대답이 나올 수가 없다.

결국 몇 가지 빼고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 진땀 흐르는 시간이 끝나고.

“쯧…….”

이드는 짧게 혀를 찼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길은 가슴이 철렁한 얼굴이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를 무시한 이드는 하는 김에 저녁으로 준비된 만찬까지 사양하며, 길의 기를 팍 죽였다.

그렇게 만찬에 참여하지 않기로 한 이들에게는 바로 방이 배분되었다.

이드 부부도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라미아가 넓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마중이 생긴 덕분에 오늘 잠자리는 편하겠어요.”

매일 숙소를 잡으려 애쓴 사람들이 들었으면 퍽 섭섭해할 말이다. 그들은 항상 최고의 숙소를 잡아 왔었으니 말이다. 일리나가 라미아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겉옷을 벗기며 말했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저 문제의 소영주를 마중으로 보내다니. 라일론의 황제는 매우 과감한 사람인 것 같아요.”

“내가 볼 땐 상당히 약은 인물 같았는데. 이드는 어때요?”

겉옷을 벗은 라미아가 이리저리 뒹굴며 침대의 푹신함을 즐겼다. 이드는 그 모습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며, 일리나에게서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이어 자신도 겉옷을 한번 털어 걸었다.

마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흙먼지를 먹진 않았지만, 그대로 침대에 누울 순 없었다.

“내 생각엔 상당히 계획적인 성격 같아. 자신이 보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깔려있고, 직접 마주하기 전에 이전에 있었던 불편한 사건을 제대로 마무리 지으려는 의도도 보이니까.”

아직 나람 공작과의 일이 남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와의 일은 길과 있었던 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 길을 용서했다면 나람 공작과의 일도 이미 풀린 것이라고 봐도 좋다. 그나마 남은 것이라면 형식적인 사과와 용서.

그리고 사죄에 따른 형식적인 대가를 치르는 정도일까.

그러니까 황제는 길 하나를 움직여 세 가지 일을 한 번에 단숨에 처리해버린 것이다.

“뭐, 나도 이렇게 해결되는 쪽이 편하기도 하고.”

이드도 굳이 길과 나람 공작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압박용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사용하기 이전에 라일론의 황제가 압박을 받기나 하겠는가. 이드는 이미 아나크렌의 명예 후작이 되어 다시 포섭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아무튼 라일론의 협력을 바라는 입장으로서 굳이 상대를 압박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이드였다.

“으차, 그나저나 길 소영주의 대답은 어떻게 생각해?”

이드는 방 중앙에 있는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러자 뒹굴거리던 라미아가 발딱 일어나 앉았다.

“어쩌나 마나, 제대로 된 대답도 별로 없었잖아요.”

“대신 분위기라는 것이 있잖아.”

길은 자국의 내밀한 사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 대신 느껴지는 분위기와 그 외 옳게 내놓은 대답을 통해 약간의 추리는 해볼 수 있었고, 그에 따른다면.

“라일론에는 손이 닿지 않은 것 같아요. 일단은요.”

“라미아는 그렇다는데. 일리나는 어때요?”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일리나. 라미아가 그녀의 어깨 위로 턱을 쑥 들이밀며 장난을 친다.

일리나는 익숙한 손짓으로 라미아의 귓가를 매만지며 잠시 말을 골랐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소영주의 대답에 거짓은 없었지만, 잘 모르겠어요. 아직 인간의 분위기를 제대로 읽는 게 많이 어려워요. 현재 소영주의 대답만으로는 답을 낼 수 없어요.”

“그럴 수 있죠.”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은 하이엘프의 권능. 그야말로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엘프에게 있어 인간의 감정과 분위기를 살피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경험에서 나오는 직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법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그 무리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야 하는데, 일단 일리나는 종족부터 다르니, 알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다만 단편적인 정보를 기준으로 했을 때, 혼돈의 파편은 최소한 황궁에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우리 세 사람의 의견은 모두 같네요.”

“이드도 없다고 생각하는군요?”

“그렇죠. 카논에 비해서도 너무 조용하잖아요. 최소한 정비 작업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조차 없는 것 같으니까.”

카논에서 죽어 나가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라일론은 그런 일도 없이 평온한 것 같았다. 솔직히 조금 의외인 부분이기도 했다. 어쨌든 라일론은 대륙의 한 축을 담당하는 제국인데, 이렇게나 관심 밖에 있다니 말이다. 혼돈의 파편에 있어 인간의 국가란 결국 이 정도의 취급인 것일까.

사실 그렇게 따지면 존 워스도 소드 팰러스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일 뿐, 아나크렌에 대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물론, 소드 팰러스가 독립할 경우, 그 자체로 아나크렌에 커다란 충격이긴 하지만 말이다.

“뭐, 어때요. 없으면 다행이지. 만약 존 워스 같은 놈이 라일론에도 있었다면 골치만 아팠을 일이잖아요.

“글쎄. 딱히?”

이드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번 속았으면 충분했다. 존 워스가 어떤 형태로 기운을 감추고 있었는지 이제는 알았기 때문에 또 속을 일은 없었다.

지금이라면 존 워스의 모습을 한 혼돈의 파편이 나타나면 바로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알아보는 즉시.

‘슥삭이지.’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베어버릴 것이다.

상대가 삼검왕이든, 백작이나, 공작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베어버릴 것이다.

나머지 일은 그 후에 해결하면 될 일이지만, 과연 따지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당장 목을 벤다고 쉽게 죽어줄 혼돈의 파편이 아니지 않은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알게 될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가 그간 자신이 알던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또 아쉽네, 눈치 없는 놈 하나가 얼쩡거리고 있었으면 참 편했을 텐데.”

“푸하하. 그 정도로 눈치가 없으면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지도 않았죠.”

“그렇긴 해.”

이드는 배를 잡고 쓰러지는 라미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의 파편은 어느 하나 만만하고 쉬운 상대가 없다. 그렇게 도란도란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저녁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만찬 대신 부탁한 저녁 식사가 방으로 배달됐다.

“밥 먹자.”

이드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살짝 놀란 표정의 집사 뒤로 은쟁반을 든 열 명의 하녀들이 서 있었다. 아마도 취소된 만찬의 음식을 그대로 각 방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제법 푸짐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보다 조용한 하루가 지났다.

전날 만찬을 사양했기 때문에 다음 날의 아침 역시 간단히 하고 넘어갔다.

“괜히 거창한 자리는 사양입니다. 어차피 황제께서 마중을 보내신 것도, 그와 같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이드의 말에 길은 두말없이 수긍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 황제가 마중을 보낸 이유도 사신의 귀찮음을 덜어주기 위함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호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소한으로 하지요. 우리가 준비한 호위만으로 병력은 충분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 병력은 최소한으로 준비해서 합류하는 형태로 진행하겠습니다.”

“나머지 상세한 조율은 스폴 경에게 이야기하면 될 겁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다시 출발하기 위해 서로의 일정과 일행을 조율했다. 그 결과 마중으로 나온 길의 일행이 사신단에 합류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필요 인원은 최소화되어, 추가된 인원은 길과 그를 호위하는 기사 다섯 정도가 끝이었다.

대단한 인원 변동은 아니었다.

길이 말을 타면서 마차가 늘어난 것도 아니고, 겨우 여섯 명의 인원이 새로 추가되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새롭게 추가된 인원으로 인해 여행길은 매우 윤택해졌다.

일단 도착지마다 일일이 숙소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길이 어떤 방법을 사용한 것인지 도착하는 영지와 마을마다 최고의 숙소가 통째로 예약되어 있어 휴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슬슬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에 비해 주변이 조용하고 쾌적했다. 길과 함께한 것과 별개로 따로 황궁에서 경고라도 한 것인지, 함부로 주변을 기웃거리는 인물도 없었다. 가끔 멋모르고 다가온 놈들도 길이 나서서 짧게 이야기를 하고 나면 크게 실망한 얼굴이 되어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수일이 지났을 때였다.

마차의 안으로 얼굴을 쑥 들이민 스폴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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