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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58화


1493화

삼주전. 캐론 협곡에선 큰 싸움이 있었다.

기실 싸움 자체야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다양한 몬스터가 살고 있는 이 협곡에 있어 싸움이란 숨 쉬는 것처럼 흔해 빠진 일이었으니까. 먹이를 두고도 싸우고.

서열 때문에 싸우고.

심심해서도 싸운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그 규모가 꽤 컸다.

지난 이년 내 가장 크고 지독한 싸움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서로의 영역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으니 말이다.

영역을 건 싸움은 치열했다.

협곡 내 오크 부족 중 네 번째 서열에 있는 부족원 구백의 그레이트 오크와 협곡 내 켄타우로스 부족 중 세 번째 서열에 있는 부족원 사백의 켄타우로스가 영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 주간 이어진 싸움에 수백의 오크와 켄타우로스가 죽었다. 이들이 뿌린 피에 협곡의 맹수와 몬스터만 배를 불렸다. 그리고 거기서 이 주가 더 흐른 뒤에야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다.

승자는 이백의 부족원이 남은 켄타우로스였고, 패자는 똑같이 이백의 부족원을 남긴 그레이트 오크였다.

원래 구백이었던 부족원의 숫자를 생각하면 반의반도 남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켄타우로스가 강했다는 의미. 이 참혹한 결과에 족장은 남은 부족을 이끌고 도망쳤다.

그리고 뒤를 쫓는 켄타우로스를 피해 달리고 달린 끝에 결국은 협곡 밖으로까지 밀려나 버렸다.

하지만 족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이백의 부족이 남았다. 남은 이들을 이끌고 다시 협곡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아야 했다. 협곡의 외곽에서 힘없는 놈들의 영역을 빼앗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시 움직이기 전에 우선은 싸움에서 얻은 상처를 회복해야 했다.

그리고 무기가 필요했다.

자신들이 패한 이유도 켄타우로스가 뛰어난 창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들의 무기는 낡고 녹슨 쇠붙이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형편없는 무기를 만들 부족의 대장장이조차 이번 싸움에서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무기를 쓸 수 없다.

이에 족장은 명령을 내렸다.

“취익…… 인간을 찾아라.”

자신들이 사용하는 많은 무기들도 한때 인간이 사용하던 것. 인간을 죽이면 질 좋은 무기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계획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일대에서 인간의 마을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 그나마 찾은 마을은 너무 멀었고, 심지어 거대한 성 안에 있어 공격이 쉽지 않았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차였다. 원래는 셋이었지만 이제는 하나 남은 와이번 라이더가 정찰에서 돌아와 멀지 않은 곳에 인간의 무리가 나타났음을 알려왔다. 말도 서른 마리가 넘고, 커다란 마차를 끌고 온 인간.

족장은 기뻐했다.

많은 말과 마차를 가진 인간은 뭐든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마차가 클수록 반짝이는 보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보석이 있으면……

‘그것으로 칼과 도끼를 바꿀 수 있지! 취익!’

나이 많은 오크는 말했다. 보석만 주면 인간은 무슨 짓이든 한다고. 대신 조심해야 했다. 인간들 중에는 아주 강한 힘을 가진 인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전력을 다해서 빼앗아야 한다.

“싸움 준비를 해라・・・・・・ 취칙! 내일 해가 뜨면 싸운다!”

족장은 남은 이백의 부족원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켄타우로스와의 싸움의 여운이 아직 남은 그레이트 오크들이 진득한 피 냄새를 흘리며 칼과 도끼를 들어 올렸다. 

“취익! 싸움이다!”

***

그렇게 누군가 전투를 준비하는 사이 날이 밝았다.

전날 스폴이 예고한 대로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난 일행은 이른 아침을 먹고 야영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드는 중간에 서서 이런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스폴에게 손짓했다.

“스폴 경.”

“부르셨습니까. 밤사이 불편한 것은 없으셨고요?”

“한번 깨긴 했지만 잘 잤어요. 그보다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예의를 차립니까? 말만 조심하자고.”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밤사이 손님이 다녀가셨는데. 스폴 경은 모르죠?”

흠칫.

순간 친근하게 아래로 휘어 있던 스폴의 눈꼬리가 사납게 번뜩였다. 동시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불침번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밤손님의 존재를 온전히 자신의 실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드가 말을 꺼낸 것은 그녀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스폴 경의 잘못을 탓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이번 밤손님은 하늘로 온 것이라 알아차리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하늘이라면…… 몬스터였던 겁니까? 하지만 공격은 없었는데, 혹시 이드 님께서…….

“틀려요. 애초에 공격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정찰 같더군요. 지금도 여길 보고 있네요.”

“!”

하늘을 가리킨 이드의 손가락을 따라 스폴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푸른 하늘과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뿐.

하지만 잠시 더 노려보고 있자 뭔가가 보였다.

하얀 구름 사이를 넘나드는 커다란 날개의 검은 그림자.

“와…… 이번? 하지만 왜 보고만 있는…… 설마!”

하늘의 그림자를 사납게 노려보던 스폴이 깜짝 놀란다. 본능에 충실한 몬스터가 먹이를 보고만 있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 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와이번 라이더인 걸까요?”

“맞아요. 그것도 인간이 아닌, 몬스터가 타고 있죠.”

거기에 이드는 라이더의 정체까지 공개했다. 그러자 스폴이 어이없는 얼굴로 한 번 더 하늘을 살핀다.

“이야기만 들었지,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에요. 몬스터 라이더라니. 대체 어떤 놈들이…………….”

몬스터가 와이번을 키우는 경우는 오크, 고블린, 라이칸 정도.

“이번엔 오크에요..”

“후우…… 지금 당장 경로를 변경하겠습니다.”

스폴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결정을 내렸다.

이드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스폴로선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작은 부족은 와이번을 감당하지 못한다. 당장 먹이를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일정 규모 이상의 머릿수가 필수.

오크의 경우 그 최소가 오백이었다.

다시 말해 오백의 오크가 곧 공격해 온다는 소리다.

아무리 오크라지만 겨우 기사 열셋에 병사 스물이 감당하기엔 병력 차가 너무 컸다. 물론 이드 부부가 나서준다면 큰 문제는 아니지만, 어느 호위단장이 호위 대상을 전력에 포함시킨단 말인가.

그러므로 경로 변경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드는 이런 스폴의 결정에 반대했다.

“그냥 일정대로 갑시다. 일정이 바뀌면 야영을 한 의미가 없잖아요.”

“그렇지만 이대로는・・・・・・”

“겸사겸사 라일론 제국 기사들의 실력도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엉뚱한 말이었다.

라일론 제국 기사들의 실력이야, 이미 앞서 길과 나람 공작과 얽히며 충분히 보았지 않은가. 그런데 새삼 무슨 실력을 볼 필요가 있단 말인가. 또 그게 아니라도 이드의 눈에는 저들의 바닥이 훤히 보일 텐데, 굳이 실력을 볼 이유가..

순간 스폴의 눈이 번뜩였다.

“혹시 이 일을 라일론에서 꾸몄다고 의심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은데, 마침 공교롭긴 하잖아요. 가일라와도 무척 가깝고.”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 눈에는 의심이 철철 넘치지 않는가. 스폴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라일라에서 굳이 이런 무리한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것. 무엇보다 귀인을 맞이하기 위해 마중까지 보내지 않았나.

“길 소영주도 다른 루트를 추천했습니다.”

“결국, 그쪽으로 가진 않았죠.”

제국이라면 그 정도 변수는 통신으로 바로바로 조정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스폴은 난감했다.

이드의 말에서 은근한 고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건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는다. 잠시 끙끙거리던 스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변경 없이 기존 일정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러나 현 병력으로는 와이번 라이더를 보유한 오크 무리를 감당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건 걱정 말아요. 적당한 순간에 내가 개입할 테니까.”

라일론의 기사라면 몰라도, 검후가 붙여준 기사를 단순히 호기심을 풀자고 죽음으로 몰아갈 생각은 없는 이드였다.

스폴 또한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끝까지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와이번이 사라진 하늘을 한번 살피고는 호위단을 둘러보았다. 이드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정리를 끝내고 출발 준비를 마친 일행들.

“오늘은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출발!”

스폴이 유난히 힘찬 목소리로 이동을 명령했다.

***

일반인 거주 불가 판정을 받은 협곡 주변.

하지만 사람이 지나다니는 것조차 막아 놓은 것은 아니다. 일행은 마차가 다닌 흔적이 진하게 남은 길을 따라 말을 달렸다. 길은 협곡과 이어진 숲에서 이 킬로미터 정도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외곽을 삼분의 일정도 빙 두르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경계만 잘하면 숲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거리.

하지만 이런 길도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딱 한 곳. 산줄기가 겹치며 길이 좁아지는 길목이 있었는데. 이때 길과 숲의 거리는 절반 이하로 가까워진다. 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미리 알고 있는 위험은 진짜 위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길목을 이용할 정도로 머리 좋은 몬스터는 이 밖으로까지 잘 나오지 않는 이유도 있었기 때문. 그렇기에 일행들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크고 검은 그림자가 머리 위를 스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쿠콰콰콰!

“꾸와와와!”

시끄럽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그런 바람 소리를 묻어버리는 더 큰 울음소리가 벼락처럼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가장 먼저 그림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이드 부부, 그리고 스폴이었지만, 제일 먼저 소리친 건 길 소영주였다.

“모두 고갤 숙여! 와이번이다!”

“야생의 와이번이 아니라, 놈을 길들은 라이더가 타고 있소!”

와이번의 등에 엎드린 작은 그림자를.

순간 기사들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와이번 라이더를 이용한 적이라면 결코 개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건 겨우 시작이다. 본격적인 공격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의심이 들끓었다.

누구냐! 누가 검후의 사신을 공격하는 것이냐?

답은 너무나 가깝다.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 바로 라일론이다. 설마 저 와이번이 한 마리가 국경을 넘어 여기까지 왔겠는가.

그러한 의심은 길과 그를 호위하기 위해 남은 기사들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혹시 자신들은 미끼인 것이었나? 그러나 다행히도 이런 의심은 금방 사라졌다.

“우측 전방에 적 출현!!”

길목을 향해 나아가던 병사의 찢어지는 경고성에 와이번을 경계하던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우측 전방을 향했다.

“아니, 잠깐만……”

“갑자기 오크라고?”

“미친 거 아냐?”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숲속 그림자에서 달려 나오고 있는 이백 마리의 오크들이었다. 수백 미터는 더 떨어져 있었지만, 저 못생긴 낯짝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벌써부터 익숙한 오크의 악취가 풍겨오는 것만 같다.

기사와 병사들은 다 같이 당혹해했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딱 봐도 이 삼백은 되어 보일 것 같은 오크이지 않은가. 거기에 하나같이 덩치도 컸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오크로는 보이지 않는다.

기사들이 있으니 오크 수십 마리는 어렵지 않지만, 수백은 아무래도 힘들다. 무엇보다 적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 저놈들은 상대가 항복한다고 살려주지도 않는다. 더구나 와이번 라이더까지 있는 몬스터 무리라니.

위험하다.

모두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원래 이곳이 저만한 규모의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습니까? 그랬다면 미리 말씀을 해주셨다면, 피해 갔을 텐데요.” 

다른 사람과 달리 스폴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인데 당황할 이유가 없지 않나.

대신 옆에 선 길 소영주를 압박했다.

개인적으로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드의 말대로 완전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렴 고작 저런 오크 무리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를 정도로 라일론이 멍청할 리도 없고.

하지만 이런 스폴의 속내를 알 리 없는 길 소영주는 평소답지 않게 당황해 버렸다.

“아니, 아닙니다. 평소엔 이런 일이 없는데………… 도대체 왜 지금…….”

아무리 봐도 연기 같지 않은 반응. 만약 이게 연기라면 연극계는 하늘이 내린 재능을 놓친 것이 될 테니까.

“이유를 찾는 건 나중입니다. 일단 소영주의 호위 기사들과 함께 기사들을 전면 배치하겠습니다.”

“잠시만. 기사들로 상대하기에는 병력차가…………….”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는 일입니다. 거리도 가깝고, 와이번 라이더가 뒤를 막고 있지요.”

“……뿌득!”

길 소영주는 이를 갈았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늘을 원망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이드와의 관계도 풀었는데, 겨우 오크 따위로 기껏 다시 쌓을 수 있는 관계를 망치게 생겼지 않나.

“물론 명예 후작님이 나서 주신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만.”

“・・・・・・ 그런 면목 없는 일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가까운 곳에 도움받을 병력이 없겠습니까?”

“적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말입니까?”

이드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그렇지만, 겨우 수백 미터 앞으로 다가온 오크를 두고 언제 지원을 받는단 말인가. 지원을 받을 때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이 끝나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백이면 백.

명예 후작이 나서는 형태이겠지만,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길 소영주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겨우 사신단의 마중일 하나 완수하지 못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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