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59화
1494화
길 소영주의 힘찬 외침은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다.
쿠콰콰콰!
일행을 덮친, 고막이 먹먹할 정도의 소음과 폭풍보다 강력한 바람 때문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병사들이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고, 겁에 질린 말이 날뛰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날뛰는 말에 밟힌 사람이 없다는 정도.
곧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한 병사들이 겁에 질려 소리쳤다.
“와, 와이번이다!”
“말에서 내려! 어서 말에서 내려!”
“와이번의 발톱에 걸리면 끝장이야!”
병사들은 일순 혼란에 빠졌다. 창칼이 닿지 않는 창공의 와이번은 병사들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화살을 쏘아도 가죽을 뚫지 못하니, 그들로서는 대응할 방법이 없다.
때마침 내공을 담은 스폴의 목소리가 병사들의 정신을 깨웠다.
“말을 중앙으로 모으고, 병사들은 창을 들어라. 기사들은 외곽에서 방비하라!”
“말을 모아라!”
“창 들어!창!”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고슴도치처럼 창을 높이 세워 들었다. 기사들이 이런 병사들과 마차를 둘러싸고, 검기를 쏘아낼 준비를 했다. 병사들의 창칼은 닿지 않아도 검기라면 와이번의 가죽을 벨 수 있다.
그렇게 방진을 짜는 사이, 병사들의 머리 위로 공포를 흩뿌린 와이번은 호위단의 상공을 유유히 날고 있었다.
그 모습을 살핀 길 소영주가 말했다.
“길목 쪽으로 이동해서 와이번의 공격 범위를 줄여야 합니다.”
옳은 의견이다.
저놈이 먹이를 노리고 있다면 자신도 우선 그렇게 조치했을 터. 하지만 저놈은 먹이를 노리는 놈이 아니라, 라이더를 태운 와이번이다. 스폴은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놈이 다시 내려온다!”
“창을 높이 세워라!”
그러는 사이 상공을 날던 와이번이 호위단의 후방을 노리고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놈! 날개를 잘라주마.”
“공격 준비!”
방어진을 짠 기사들의 검에서 검기가 뿜어졌다. 온몸에 불끈 힘을 준 모습이 믿음직하다. 날개까진 몰라도 칼자국 몇 개는 낼 것 같은 모습. 이런 모습에 와이번도 본능적인 위기를 감지한 모양이다. 놈은 아까처럼 일직선으로 내려오지 않고, 머리 위 십여 미터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거센 돌풍이 일어났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다.
동시에 스폴은 그러한 모습에서 확신을 얻었다.
‘우리를 길목으로 몰고 있어.’
아무리 위험을 감지했다지만 방금 공격은 너무 얕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곧 이드의 말을 떠올리고는 명령했다.
“호위단은 지금 진형을 유지한 채 길목으로 위치를 옮긴다. 이동!”
“이동! 신속히 움직여!”
병사들이 중심이 되어 마차와 말을 길목으로 몰아갔다.
동시에 기사들은 수상한 정황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두 번째 있었던 얕은 활공이었다. 거리만 나오면 검기를 쏘아낼 작정으로 눈을 부릅뜬 그들이었기에 하나도 빠짐없이 볼 수 있었다.
“놈의 등에 누군가 타고 있습니다!”
“야생의 와이번이 아니라, 놈을 길들은 라이더가 타고 있소!”
와이번의 등에 엎드린 작은 그림자를
순간 기사들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와이번 라이더를 이용한 적이라면 결코 개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건 겨우 시작이다. 본격적인 공격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의심이 들끓었다.
누구냐! 누가 검후의 사신을 공격하는 것이냐?
답은 너무나 가깝다.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 바로 라일론이다. 설마 저 와이번이 한 마리가 국경을 넘어 여기까지 왔겠는가.
그러한 의심은 길과 그를 호위하기 위해 남은 기사들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혹시 자신들은 미끼인 것이었나? 그러나 다행히도 이런 의심은 금방 사라졌다.
“우측 전방에 적 출현!!”
길목을 향해 나아가던 병사의 찢어지는 경고성에 와이번을 경계하던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우측 전방을 향했다.
“아니, 잠깐만……”
“갑자기 오크라고?”
“미친 거 아냐?”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숲속 그림자에서 달려 나오고 있는 이백 마리의 오크들이었다. 수백 미터는 더 떨어져 있었지만, 저 못생긴 낯짝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벌써부터 익숙한 오크의 악취가 풍겨오는 것만 같다.
기사와 병사들은 다 같이 당혹해했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딱 봐도 이 삼백은 되어 보일 것 같은 오크이지 않은가. 거기에 하나같이 덩치도 컸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오크로는 보이지 않는다.
기사들이 있으니 오크 수십 마리는 어렵지 않지만, 수백은 아무래도 힘들다. 무엇보다 적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 저놈들은 상대가 항복한다고 살려주지도 않는다. 더구나 와이번 라이더까지 있는 몬스터 무리라니.
위험하다.
모두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원래 이곳이 저만한 규모의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습니까? 그랬다면 미리 말씀을 해주셨다면, 피해 갔을 텐데요.” 다른 사람과 달리 스폴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인데 당황할 이유가 없지 않나.
대신 옆에 선 길 소영주를 압박했다.
개인적으로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드의 말대로 완전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렴 고작 저런 오크 무리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를 정도로 라일론이 멍청할 리도 없고.’
하지만 이런 스폴의 속내를 알 리 없는 길 소영주는 평소답지 않게 당황해 버렸다.
“아니, 아닙니다. 평소엔 이런 일이 없는데…… 도대체 왜 지금…….”
아무리 봐도 연기 같지 않은 반응. 만약 이게 연기라면 연극계는 하늘이 내린 재능을 놓친 것이 될 테니까.
“이유를 찾는 건 나중입니다. 일단 소영주의 호위 기사들과 함께 기사들을 전면 배치하겠습니다.”
“잠시만. 기사들로 상대하기에는 병력차가…….”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는 일입니다. 거리도 가깝고, 와이번 라이더가 뒤를 막고 있지요.”
“…….뿌득!”
길 소영주는 이를 갈았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늘을 원망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이드와의 관계도 풀었는데, 겨우 오크 따위로 기껏 다시 쌓을 수 있는 관계를 망치게 생겼지 않나.
“물론 명예 후작님이 나서 주신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 면목 없는 일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가까운 곳에 도움받을 병력이 없겠습니까?”
“적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말입니까?”
이드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그렇지만, 겨우 수백 미터 앞으로 다가온 오크를 두고 언제 지원을 받는단 말인가. 지원을 받을 때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이 끝나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백이면 백.
명예 후작이 나서는 형태이겠지만,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길 소영주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겨우 사신단의 마중일 하나 완수하지 못하다니.
스폴은 몸을 떠는 길 소영주가 조금 불쌍해졌다. 그러려던 건 아니지만 그만 몰래 따돌리며 속이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덕분에 길 소영주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조금은 수그러드는 것도 같았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한번 알아보시죠? 방법은 있겠지요?”
“……알겠습니다.”
스폴의 재촉에 길 소영주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작은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간이 통신구였다. 길 소영주는 통신구에 마나를 주입하기 전 살짝 망설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와이번 라이더를 처음 보았을 때의 의심이 순간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 멀지 않은 곳에 지원병력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건 어떻게 봐도 일부러 그런 장면을 만든 것으로밖에 보이잖은가. 그런 모양이 되느니, 망신을 각오하고 명예 후작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낫다.
차라리 아무도 통신을 받지 마라.
길 소영주가 그런 마음으로 마나를 주입했다.
수신자를 정하지 않은 무작위 구조 신호 발신은, 그러나 길 소영주의 바람과는 달리 금방 수신자를 찾아내고 말았다.
-긴급 구조 신호를 받았다. 상황과 신원을 밝혀라.
“나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사신단의 마중을 나온 길 더 레크널이다. 지금 몬스터의 공격을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몬스터들의 이상 움직임을 확인하고, 순찰을 도는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위치가 가까우니, 곧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만 버텨 주십시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진 말.
그렇지 않아도 찝찝하던 길 소영주의 얼굴이 일순간에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변해 버렸다. 몬스터 근처에서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아군. 이래서야 아무리 변명해도 미리 짠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오래 막을 수는 없다. 놈들에게는 와이번 라이더도 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저희는 길 님이 계신 반대쪽 길목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통신구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길과 스폴의 고개가 저절로 길목 너머로 향했다. 산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반대쪽 길.
“알겠다. 그런데 통신을 받은 자네들은 누구인가?”
-저희들은 영광스러운 라일론의 여름의 기사단입니다.
그 대답을 끝으로 통신구에 빛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길 소영주와 스폴의 눈길이 마주쳤다. 스폴은 많은 의미를 담은 상대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방으로 나선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곧 여름의 기사단이 도착한다! 잠시만 버티면 된다. 병사들은 창을 들어 방어진을 구성하고, 기사들은 전진하라!”
“호위 기사단 전진!”
“곧 지원이 도착한다! 전진!”
여름의 기사단이라는 말에 기사들은 힘을 내기 시작했다. 굳었던 표정과 어깨가 풀어지며, 전의를 끌어올리는 모습이었다.
스폴은 그 모습을 본 후, 길 소영주를 향해 말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우연이 아닙니까. 마침 이 길목을 지나는 중에, 마침 기다렸다는 듯 여름의 기사단이 나타나다니요. 운명인 모양입니다.”
“・・・・・・ 생각하시는 그거 절대 아닙니다.”
유독 우연과 운명에 힘이 실린 말에 길 소영주가 소심하게 중얼거린다. 잘 들리지 않는 그의 말을 스폴은 웃음으로 흘려 넘기고는 마차로 다가가며
생각했다.
일이 참 재밌게 돌아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