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1074화


1509화

근심이 깊어 보이는 황제.

그런데 진짜 고민이 깊어 저런 것일까.

이드는 반쯤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황제가 그렇게 일차원적일 리가 있나.

절대의 권력을 손에 쥔 황제는 제국 내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물.

그런 그가 타인 앞에서 보이는 행동은 사소한 손짓 하나까지도 다 여러 의도가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자국의 대신과 귀족을 앞에 둔 때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결국 보여주고 싶은 거지.’

사신으로 온 자신에게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또 함께 자리한 공작들에게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그 증거로 깊은 한숨과 달리 황제의 눈빛은 여전히 깊어서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공작들 쪽에서 움직였다.

“명예 후작의 이야기는 잘 들었소. 하지만 아직 설명이 부족하오.”

새로운 인물이 나서서 대화를 넘겨받았다. 다른 공작들보다 스무 살 정도 젊어 보이는 그는 차분히 빗어넘긴 갈색 머리에 진한 검미가 인상적인 미중년이었다.

아마람 공작과 달리 발언권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므로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이드는 스폴이 가져온 초상화에 적힌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어떤 설명이 부족하십니까? 코페르니 공작님.”

“힘의 증명. 단 여섯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니.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 말을 어찌 쉽게 믿을 수 있겠소. 저들이 세상에 직접 간섭하지 않은 것이 계약 때문이라지만, 그것이 저들이 가진 힘의 증명은 아니니 말이오.”

“그것참 옳은 말씀이오.”

라미아와의 토론이 끊겨 아쉬워하던 폴카 공작이 맞장구를 쳤다. 살펴보니 다른 공작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증거가 부족하긴 하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현재론 그저 말뿐인 이야기.

두터운 신뢰가 있어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고 와서, 그걸 갑자기 믿으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힘의 증명이라니. 어려운 말씀이군요. 그렇다고 저들 혼돈의 파편을 이 자리에 끌고 올 수도 없는 일이고.”

끌고 오는 것은 둘째 치고 찾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렇다면 저들과의 전투를 보여줄까? 라미아가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 영상만으로 온전한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

마법 영상이라고 해서 조작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부분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 둔 대책이 있었던 이드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아니라 여러 공작들께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에 대해 증언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게 대체 누구요?”

코페르니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어떤 인물이 있어 황제와 자신들 모두로부터 믿음과 신뢰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언뜻 생각나는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런 분의 증언이라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의 증언이라면 믿지 않을 이유가 없소. 사신단에 그런 인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오?”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즉시 만나볼 수는 있습니다. 라미아.”

“네.”

이드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냉큼 앞으로 나서는 라미아.

그녀를 옆에 세운 이드가 황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 청이 있사옵니다. 코페르니 공작께서 말씀하신 힘의 증명에 대한 증언을 위해 마법 통신을 허락해 주십시오.”

“흐음. 마법 통신이라. 폴카 공작?”

이드의 요청에 황제는 폴카 공작을 찾았다.

황궁은 기본적으로 1급 보안시설이다.

황족의 안전을 위해 갖가지 보안 장치가 마련되어 있고, 그중에는 마법적인 통신을 제어하는 시설도 있었다.

즉, 내부의 허락 없이는 외부와 통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폴카 공작은 이러한 부분을 짧게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준비에 시간이 걸리고, 통신도 오직 통신실에서만 가능하옵니다.”

“흐음, 시간이 문제로군.”

이드의 요청을 거절할 생각이 없는 황제는 내일 다시 시간을 만들어 자리를 마련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이어지는 이드의 말에 끝이 났다.

“시간과 장소는 상관이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즉시 통신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황궁의 아스트랄 결계는 8클래스요!”

폴카 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황제의 눈치를 본 것이다.

황제만 없었다면 마법을 모른다며 역정을 냈을 것 같은 얼굴이다. 물론 이런 그의 반응도 과한 것은 아니었다.

아스트랄 결계는 단순한 8클래스가 아니다.

결계를 구성하는 복잡성과 보안에 있어서는 9클래스에 버금가는 마법이 바로 아스트랄 결계다.

단순히 힘으로 밀어서 깰 수 있는 마법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런 아스트랄 결계를 무슨 시골 담벼락 취급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드는 이런 폴카 공작의 반응을 완전히 무시했다.

굳이 자신이 자세히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마법 통신을 연결할 사람은 라미아였고, 그녀가 가능하다면 가능한 것이니까.

이 그레센에 그녀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없었다.

“황제 폐하.”

다시 한번 뜻을 묻는 이드.

그에 황제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흥미와 동시에 곤혹스러움이 묻어난다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껄끄러워하는 기색도 조금 느껴졌다.

왜 그렇지 않을까.

황제에게 있어 이 황궁은 절대로 안전한 장소여야만 했다. 그를 위해 수많은 인력과 예산이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한마디에 그 모든 노력에 구멍이 뚫릴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마법 통신이 뚫린 것은 아니지만, 아무렴 제국의 황제와 대공작들 앞에서 저리 당당하게 나섰다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필히 확인해야겠군.’

황제는 폴카 공작을 잠시 돌아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통신을 허락하지. 그런데 정말 가능하겠는가? 비공식이라도 엄중한 자리라네.”

“당연히 가능합니다.”

이드는 경고를 포함한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라미아가 양팔을 걷으며 앞으로 나섰다.

“일단 공간이 필요하니, 다들 조금씩 물러서 주세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공작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크흠. 이 정도면 되겠소?”

“감사합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

“말씀하시오.”

“잠시 대전 바닥을 어지럽혀도 되겠습니까? 물론 통신이 끝나면 말끔하게 복구하겠습니다.”

“허락하오. 마음대로 쓰시오.”

황제는 시원하게 허락했다.

오히려 어떻게 대전 바닥을 어지럽힐지 궁금한 표정이다.

허락을 받은 라미아는 마나석 세 개를 바닥에 꺼내 놓고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심볼.”

치지지직.

미세한 마나의 흐름과 함께 대전 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졌다.

원과 삼각형으로 이뤄진 마법진은 복잡한 동시에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진은 완성과 동시에 자동으로 발동되었다.

달그락.

마법진이 만들어 내는 마나의 흐름을 타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놔두었던 마나석이 저절로 떠올라 있어야 할 곳에 자리를 잡았다.

직후 마나석에서 마나를 공급받은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황제 폐하.”

순식간에 작업을 마친 라미아가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

그 옆에는 어느새 자리를 옮긴 나람 공작과 폴카 공작이 자리해 있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황제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라미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마법 통신의 연결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럼 연결하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이곳에 너의 형상을 비춘다. 링크.

짧은 주문에 이어지는 마법.

이드는 저 주문이 지극히 보여주기식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링크는 라미아라면 시동어만으로 발동시킬 수 있는 마법.

곧이어 마법진이 살짝 밝아지는 듯하더니, 마법진에 어려있던 빛이 사라졌다.

대신 마법진 위에 희미한 그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차츰 색이 진해지며 한 사람의 모습을 비춰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완성된 순간.

반짝.

마법진 위에 나타난 인형이 눈을 떴다. 이후, 인형은 잠시 사방을 살핀 후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황제.

황제가 아니라 마치 옆집 청년을 부르는 것 같은 말투.

지극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어째서일까. 그것을 두고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럴 정신도 없어 보였다. 공작들은 하나같이 마법진 위에 나타난 인물의 정체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움직인 것이 황제였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린 폴카 공작의 어깨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검후.”

그랬다.

마법진 위에 나타난 사람.

이드가 마법 통신을 연결하겠다고 한 상대는 바로 검후였다.

그녀는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언제였지요? 대충 삼십 년인가요?

“정확히 삼십이 년 전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검후께선 변함이 없으신 모습이군요.’

-그런 황제는 많이 변했습니다.

“많이 늙었지요?”

-아니요. 멋있어졌어요.

“하하하하. 다른 분도 아니고 검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진짜인 것 같습니다.”

-어머나, 나는 진심입니다. 나는 이런 류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 황제였다.

-그나저나 황제는 날 보고도 놀라지 않던데, 내가 나올 줄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과 함께 자신을 돌아보는 검후에 고개를 젓는 이드.

“대략 짐작만 하고 있었습니다. 명예 후작을 대신해서 저와 공작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특히 이번 일의 관련자 중에 말입니다. 당연히 검후가 가장 먼저 떠오르더군요.”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