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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75화


1510화

-멋있어졌을 뿐만 아니라, 눈치도 빨라지신 것 같습니다.

마치 그를 기특해하는 듯한 검후.

여전한 그녀를 보고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제국의 지존을 이렇게나 아이 취급하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누가 있을까. 아무도 없다. 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가슴 한구석에 묻혀 있던 옛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기분.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군요.”

-그 말 칭찬으로 하는 소리겠지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검후.

“하하하. 당연합니다.”

그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웃음을 터트리는 황제. 덩달아 검후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과거의 인연과 오랜만에 친근한 인사를 나눈 검후는 곧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공작들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흡사 직속상관을 마주한 말단 관리 같은 모습이랄까.

“기합이 바짝 들었네.”

이드의 속삭임에 일리나와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외국이라지만 황실의 큰 어른이잖아요. 당연해요.”

“거기다 저 공작들 중 세 명은 검후와 안면이 있고, 또 다른 두 명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데요.”

다시 말해 대공작들 중 절반 이상이 검후와 크고 작은 인연이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반응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아무렴 검후를 직접 만난 경험이 있다면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어?”

“스폴이요.”

하긴 그녀가 아니면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런데 난 왜 못 들었지?”

“그때 이드는 황제를 만나고 있었으니까요.”

이번 여정에서 이드가 두 아내와 떨어져 있던 시간은 딱 그때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왜 자신에겐 해주지 않은 것일까? 물론 꼭 알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지만, 조금 섭섭하긴 했다.

그러는 사이.

검후와 공작들은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공작들은 하나같이 검후를 존경하는 태도였으며, 검후도 공작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에 황제는 오히려 불만이었다.

“저와 공작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십니다. 저는 그렇게 어리게 보시더니.”

-그럼 정중히 예의를 차려 드릴까요?

“……됐습니다.”

바란다면 그렇게 해주겠다는 검후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어쩐지 말로 하지 못한 불만이 그득해 보였다. 일견 사탕을 더 받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

이를 본 검후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큰 웃음을 터트렸고, 그 웃음이 황제도 얼굴에 가득하던 불만을 지웠다.

그렇게 어색함을 지워내는 시간이 지나자, 검후가 조금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흘러간 세월에 대한 이야기도 좋지만, 지금부터는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요? 이렇게 마법을 통해 서로 얼굴을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니까요.

“그러시지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어떤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지 한번 들어볼까요? 나람 공작, 그대가 말해 보세요.

“제가 말입니까?”

검후의 지목을 받은 나람 공작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당연히 명예 후작에게 질문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자 검후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대만큼 핵심을 짚어 낼 줄 아는 사람이 없어요.

말이 좋아 핵심을 짚을 줄 안다는 것이지, 결국 말솜씨가 없다는 소리였다.

이런 말뜻을 알아차린 사람들 사이로 가벼운 웃음이 오갔다. 하지만 당사자인 나람 공작은 그러거나 말거나 특유의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답하겠습니다.”

그렇게 말문을 연 나람 공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한 줄로 간추려 버렸다.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에 대한 증거가 부족합니다.”

ᄍᄍ쯧.

순간 여기저기서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어허, 줄여도 너무 줄이지 않았는가.”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그런 얼굴로 나서는 아마람 공작이었지만, 검후는 보충 설명을 더 하려는 그를 손을 들어 막았다.

-좋아요. 딱 내가 원하는 대로 핵심만 짚어 줬군요. 다시 말해 내가 할 일은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에 대한 증명이로군요. 그렇죠, 황제?

“그렇습니다. 혼돈의 파편이 어떠한 존재인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는 명예 후작을 통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라일론 제국을 움직이기에는.. 솔직히 근거가 부족합니다.”

-그렇겠지요.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예상하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검후에 황제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걸 알면서 명예 후작 부부만을 사신으로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의문이 생긴 탓이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를 모를 수가 없지요.

“좋습니다. 그럼 굳이 한 번 더 검후께 묻겠습니다. 오늘 명예 후작이 가져온 정보는 모두…………….”

-사실입니다.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서.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에 대해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거는 검후.

그런 행동이 뜻하는 바는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명확했다.

순간 그녀의 기백에 놀란 황제와 공작들이 잠시 말을 잊은 모습.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황제가 진중한 얼굴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말해 놀랐습니다.”

검후의 이름값은 결코 싸지 않다.

비록 제자들의 배신 때문에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대륙에 퍼진 그녀의 명성은 황제에 비교해 모자라지 않은 것.

그런 그녀가 이름을 걸었다는 것은 조금 과장해 황명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일론 제국의 황제와 대공작들 앞에 꺼내놓지 않았는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을 증명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런 일이라면 백번 천번이라도 내 이름을 걸 수 있어요.

“휴~ 검후의 이러한 자신감에는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당당하다 못해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검후의 모습에 황제는 결국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곧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허어~ 참, 이를 어쩐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에 대한 증명이었다.

이드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검후를 불러냈고, 검후는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걸고 이드의 말에 힘을 실었다.

이제 이드의 말을 의심하는 일은 검후를 의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목숨과 같은 명예를 걸고 확언한 일에 대한 의심.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증거를 요구하기 곤란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설마 검후가 이렇게나 강경하게 나올 줄이야.’

곤혹스러움을 느낀 황제는 공작들을 돌아보았다.

뭐,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는 무언의 질문.

그러나 공작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검후가 자기 명예를 걸었는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대전에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이드 부부는 이런 모습을 한걸음 물러선 상태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마치 구경꾼 같은 태도였다.

사실 이드는 진짜 자신이 구경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사신으로서 말을 전달하는 것.

라일론 제국의 황제를 설득하는 것은 온전히 검후의 몫이라고 이미 출발하기 전에 못을 박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런 방법을 쓸 줄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의 황제를 자신의 권위로 찍어 눌렀다.

검후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이드가 봐도 외통수였다.

황제와 공작들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반박할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검후가 적국의 인물이었다면, 대놓고 의심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라일론과 아나크렌의 관계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혼돈의 파편에 대한 증명은 결국 이렇게 끝이 나는가.

이드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검후가 황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물론 내 말만 믿고 제국을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겁니다.

“면목 없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당연해요. 제국의 전력을 움직이는 일인데, 아무런 물증도 없이 내 말만 믿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쪽의 곤혹스러움을 알고 먼저 말을 꺼낸 검후.

그에 혹시 하는 기대감에 황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혹시 다른 증거가 있는 겁니까?”

-글쎄요. 이걸 증거라고 할지, 아니면 증명이라고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순간 황제와 공작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저 말이 무슨 말인가?

그리고 그런 의문은 이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검후는 무슨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품고 검후를 바라볼 때였다.

‘어? 지금…….’

순간 눈이 마주친 검후가 자신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보인 거 같았다.

이드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검후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원한다면 황궁 위로 내가 알고 있는 드래곤을 날려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너무 소란스럽지요.

“……”

과연 그것이 단순 소란에서 끝날까? 황제와 공작들은 이것이 검후의 진심인지, 아니면 알아듣기 힘든 협박인지 순간 헷갈렸다.

그러나 굳이 고민할 필요 없는 문제였다.

검후는 처음부터 드래곤을 날릴 마음이 없었으니까.

-문제의 핵심은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의 증명이 아니겠습니까.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라도 말입니다.

“간접적인 증명?”

-그래요. 혼돈의 파편은 아니지만, 혼돈의 파편과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증명하는 겁니다. 조금은 이상하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갑자기 그 힘을 증명해야 할 당사자가 되어버린 한 사람이 즉각 반발했다. 

“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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