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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76화


1511화

이드와 두 아내는 평화롭게 팝콘을 뜯고 있었다.

진짜 팝콘을 씹었다는 것은 아니고, 검후가 능숙한 솜씨로 제국의 황제와 공작들을 쥐고 흔드는 모습을 느긋하게 구경하던 중이었다. 상황은 매우 흥미로웠다.

검후가 가진 설득의 기술은 상당히 뛰어났으며, 황제와 공작들은 순식간에 궁지에 몰렸다.

그들이 예상했던 화려한 언변이나 치열한 머리싸움은 없었다.

대신 검후는 시종일관 말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연륜이 엿보이는 언변이랄까.

그녀는 그저 짧은 말 몇 마디로 금방 원하는 결과를 뽑아냈다.

이걸로 이번 일도 다 끝났구나.

분명히 조금 전까지 이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황제와 공작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검후의 말과 함께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갔다.

증거인지 증명인지를 언급하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더니, 갑자기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을 증명하겠단다.

사실 할 수 있으면 좋다.

황제와 공작들도 좀 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테니까.

대신 간접적으로 증명하겠단다.

어떻게?

혼돈의 파편과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깜빡.

“검후!!!”

눈을 한번 깜빡이고 상황을 이해한 이드가 소리쳤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 자리에 혼돈의 파편과 같은 급의 힘을 가진 사람은 자신뿐이다.

검후는 자신을 통해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을 저들에게 경험시키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증거가 어떻고, 증명이 어떻고 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일을 떠넘긴 것이다.

자신이 그녀에게 황제와 공작들의 설득을 떠넘겼던 것처럼!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화가 나기보다는 당했다는 생각에 발끈한 이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글쎄요. 제가 그랬던가요?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는 검후.

이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사신의 임무 이외의 일은 없다고요.”

-흐음, 그랬지요. 하지만 다른 말도 있었습니다. 기억하나요? 사신의 임무와 함께 명예 후작 자신을 ‘증명’하겠다고 했던 말. 그래,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 마인드 마스터의 기록을 통해 혼돈의 파편을 증명하기 위한 것.

이는 황제가 이드를 인정한 시점에서 끝난 일이었다.

“그 증명과 이 증명은 다릅니다.”

-아니요, 다르지 않아요.

단호히 고개를 젓는 검후,

이드는 그녀가 묘하게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부탁을 하면 될 일을 왜 저러는 것일까? 혹시 황제와 공작들에게 일부러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증명된 것은 명예 후작의 신분일 뿐, 명예 후작이 가진 마인드 마스터로서의 힘에 대한 증명은 아니잖아요. 아마 저분들도 그 부분에 대해 궁금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제?

갑자기 질문을 받은 황제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꼭 보고 싶군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시작된 이드와 검후의 대화에 황제와 공작들은 제법 놀란 상태였다.

혼돈의 파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명예 후작이었을 줄이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왜 깨닫지 못했을까.

황제와 공작들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강력한 존재와 대등하게 싸워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존재는………… 당연히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일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드는 분명하게 말했다.

자신은 혼돈의 파편과 싸우고 있다고.

전투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어디에서 전투가 있었는지도 정확히 밝혔었다.

그것도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두 번이나.

그런데 어째서 자신들은 명예 후작을 혼돈의 파편과 같이 놓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지혜로운 이들을 빠르게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원인은 정보의 한계와 상식이라는 틀이 자신들의 상상력을 가로막고 있었던 탓이었다.

혼돈의 파편이 매우 강력하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들은 그 강력함의 기준을 검후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멸망이라는 섬뜩한 말도 피부에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

하지만 혼돈의 파편은 겨우 그런 수준이 아니다.

명예 후작이 그렇게 말했고, 저 검후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은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그들과 같은 힘을 가졌다는 명예 후작의 힘은 정말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며, 혹시 그 원천이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이라면………… 그것을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그리고 만약 아나크렌이 그 힘을 얻었다면, 라일론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국을 이끌고 있는 이들이기에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는 상념들이 빠르게 뇌리를 스치고 지난다.

그 때문일까.

황제와 공작들의 표정이 심상찮아 보인다.

한편 검후는 이들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서는 이드를 향해 돌아섰다.

-보세요. 황제도 저렇게 부탁하지 않습니까.

다 네가 부추겨서잖아!

이드는 속으로 그렇게 소리쳤다. 동시에 검후가 이런 요청을 하는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저기 황제와 공작들의 얼굴을 보면 모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속내를 잘 감추고 있던 사람들이 저럴 정도면 제법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이드는 검후 가까이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지?”

-아니라고 하면 믿어 주실 건가요?

“아니.”

-흠, 조금 섭섭하네요.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헛소리는 그만하고.”

-네.

“그래서 나보고 지금 이 사람들 앞에서 한바탕 힘자랑을 하라는 거잖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저기 있는 사람들 중 몇 명만 적당히 두들겨 주면 되는 일인데. 그 순간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이유 모를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

“알았어. 그런데 꼭 사람을 상대로 실력 행사를 해야 해?”

-그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니까요. 그리고 이드도 대련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좋아하지. 그런데 그거랑 이건 조금 다르잖아. 무엇보다 상대를 신경 써야 하고.”

은색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처럼 다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상대는 그냥 평범한 기사가 아니라 제국의 대공작이다.

앞으로 저들의 협력이 필요한 이상 저들의 자존심을 깔아뭉개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러니 대련에도 나름 신경을 써야 하지만, 이드는 그런 대련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대련보다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요?

“어, 핵심은 힘의 크기를 체감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 그럼 방법이 있지. 감히 비벼볼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

무슨 생각인지 빈손을 내려다보는 이드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 기색을 빠르게 알아차린 검후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공작들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다시 생각해 보니, 대련을 통한 확인이 제일 적당할 것 같은데요.

“싫어. 이미 정했어. 그래도 대련이 좋을 것 같으면, 네가 와서 하던가.”

-음, 생각해 보니까. 그 정도의 의리는 없는 것 같아요.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진짜 손을 땔 것 같은 이드의 모습에 검후는 공작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버렸다.

‘이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지만, 저들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아예 꺾이지는 않겠지.’

한편으로는 이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검후는 표정을 고치고는 다시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좋은 소식입니다. 황제. 명예 후작이 증명해 보이겠다는군요.

“그렇습니까. 기대가 됩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증명하는 것입니까? 상대가 필요하다면……”

“황제 폐하.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명예 후작을 상대하겠습니다.”

무례하게도 황제의 말을 중간에 끊고 나선 사람은 나람 공작이었다.

평소 무표정하기로 유명한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명예 후작의 증명 방법에는 따로 상대가 필요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실력을 보지 않고, 어떻게 힘을 증명하겠다는 말입니까?”

부리부리한 눈에 사각턱이 인상적인 바이언 공작의 말이었다.

그는 검을 수련하는 기사로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겨룰 수 있는 기회를 내심 반기고 있었기에 아쉬움이 큰 것 같았다.

-방법은 명예 후작에게 직접 들으세요.

궁금하긴 검후도 마찬가지였다.

이드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나람 공작과 바이언 공작을 살폈다.

그 투명한 시선에 두 사람을 본능적으로 뭔지 모를 껄끄러움을 느꼈다. 괜히 내력이 출렁이는 것 같은 느낌.

그건 마치 맹수의 냄새를 맡은 초식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기 전에 이드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검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사람을 상대로 실력을 증명할 생각이 없습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오?”

이드의 눈이 황제를 향했다.

“사람을 상대로 한 대련에서 이겨 보았자, 그보다 강하다는 의미일 뿐. 혼돈의 파편과 같은 힘이 있다는 증명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지요. 누군가 오우거를 상대할 힘이 있다면서 고블린 몇 마리를 잡아 그것을 증명했다 하면 황제 폐하께선 그에게 오우거를 상대할 힘이 있다고 믿으시겠습니까?”

“믿을 수 없겠지.”

황제는 답을 하면서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공작들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몇몇의 표정이 실로 좋지 않았다.

제대로 자존심이 상한 얼굴들이다.

왜 그렇지 않을까.

방금 이드의 말은 그만큼 노골적이었다.

당신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당신들은 고블린과 같은 수준이라고.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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