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79화
1514화
황제의 중지 요청이 들어왔다.
이제 충분하다는 말에 이드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만 하라니.’
그러나 요청이 들어온 이상 어쩔 수 없다.
황제의 말을 무시하고 더 이어갔다가는 이게 증명이 아닌, 폭력이 될 테니까.
초식을 거두기 전에 고개를 살짝 들자 뻥 뚫린 하늘이 보였다.
그와 함께 투명하게 빛나는 이원일기의 긴꼬리가 하늘까지 닿아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꼬리다.
하늘까지 닿은 투명한 빛은 이원일기에 의한 힘의 발산이 아니었다.
아직 완전히 합일되지 않은 내력이 일부 승화하며 일어난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를 비롯한 공작들이 이를 알았다면 기겁할 일이었다.
자신들을 경악하게 만든 힘이 겨우 이원일기의 일부에 불과했다니.
하지만 이드는 이런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현상은 이원일기가 아직 완전하지 않기에 발생한 일이다.
섣불리 미완의 무공을 꺼내 보였으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긴꼬리를 단 이원일기의 지금 모습이 마치 유성 같네.’
아닌 게 아니라 승화된 내력이 하얗게 빛났다면, 진짜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모습이기는 했다.
투명한 백색의 유성이라니.
무공이라기엔 너무나 운치 있는 모습이지 않은가.
이드는 문득 이름을 바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확실히 백경유성추 같은 이름이 이원일기라는 꼰대 같은 이름보다는 좀 더 멋있어 보이긴 하지.’
이원일기라는 이름에 딱히 애착은 없었다.
무공의 근간이 된 이론인 원시태극의 한 구절에서 가져온 이름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애정을 담을 시간도 없었다.
혼원식 자체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최근에 탄생한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란 바로 혼돈의 파편을 소멸시키는 것.
사실 혼원식 없이도 이드는 지금까지 혼돈의 파편과 싸워내며, 봉인하고, 끝내 소멸시키는 업적을 이뤄냈다.
그에게는 12대식이라는 최강의 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12대식이 있었기에 이드는 혼돈의 파편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이드에게 작은 불안이 생겼다.
과연 이대로 충분한가?
점점 궁지에 몰리는 혼돈의 파편을 정말로 12대식 만으로 상대할 수 있을까라는 작은 불안.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어뜯고,
생명의 위기에서는 바위도 들어내는 것이 인간이다.
혼돈의 파편이라고 다를까?
남은 혼돈의 파편이 과연 지금까지처럼 순순히 소멸되어 줄 것인가.
혼원식은 그런 고민에서 나온 무공이었다.
그렇다고 혼원식이 완전히 새로운 무공은 아니었다.
아무리 이드라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12대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 낼 재주는 없었다.
기존 12대식만 해도 이드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스승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만들 수 없는 무공이었다.
그래서 이드는 새로운 무공을 만드는 대신, 기존에 있던 12대식을 재정립하며 다듬었다.
12대식의 무리를 하나로 집대성하고, 각각의 개성과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조합을 찾아 하나로 묶었다. 이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일리나와 라미아.
드래곤의 지식과 엘프의 지혜를 풀어낸 두 아내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이런 도움을 받아 탄생한 것이 바로 혼원식이다.
아직 완성까진 조금 부족하지만.
‘완성도 조만간이지. 그때가 되면……………’
물론 그 전에 혼돈의 파편을 찾아내는 일이 먼저이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라일론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을 마치며 두 손을 거둬들였다.
내력이 회수되자, 이원일기 속에서 어둡고 무겁게 회전하는 원시태극도가 멈춰 서며 서서히 흩어졌다.
순간.
안간힘을 쓰고 있던 공작들의 신형이 동시에 휘청였다.
그들을 찍어 누르던 힘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힘의 균형이 깨졌달까.
그래도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진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혹시 바닥이라도 굴렀으면 그 망신을 어쩔뻔했는가.
하지만 공작들 중 어느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압박에서 벗어난 순간,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체감한 이드의 힘을 분석하고 측량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언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상이라도 했을까.
그들은 제국 안에서 늘 최강이었다.
그들이 인정하는 최강은 검후뿐이었고, 제국 밖에서 자신들과 대등한 강자는 삼검왕뿐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자부심이 한 방에 무너졌다.
그것도 무너지고 부서져서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직접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초식이 가진 힘에 정신없이 무너졌다.
끝내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가 적당한 순간에 나서지 않았다면.
중지를 요청하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자신들은 모두가 대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을 것이다.
참담했다.
진득한 패배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동시에 냉정한 머리는 자신들을 무릎 꿇린 힘을 재단하기 시작했다.
이 힘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
상대할 수 없다면 제국은 또, 자신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런 힘을 가지고도 위험하다 말하는 혼돈의 파편은? 이런 힘을 가지고 있던 멸망의 존재들은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공작들의 머리는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곧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
그 속에 든 어떤 단어에는 공작들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진정 궁금해서 명예 후작에게 묻겠소, 방금 보여준 것도 무공이오?”
“무공입니다.”
황제가 묻고 이드가 답했다.
“그것이 역사에 기록된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이오?”
자신이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지만, 무공은 옛것이 아니다.
“이원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에 대한 증명은 이걸로 충분하십니까?”
“넘치도록 충분하오.”
황제는 이원일기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박아 넣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가 가진 위험성을 재인식한 그의 표정은 참으로 무거워 보였다.
“방금 본 그 힘이라면, 충분히 세상을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소. 솔직히 말해 지금 마주하고 있는 명예 후작이 두렵게 느껴질 정도요.”
순간 이드가 묘한 눈빛으로 황제를 보았다.
두렵다니.
아무리 비공식적인 자리라지만 저런 말을 사람들 앞에서 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가 알기로 황제의 저러한 발언은 굉장히 복잡한 의미를 가지는 법이다.
자칫, 협력이 아닌 분란을 만들 수도 있는 일.
그 때문일까. 적절하게 검후가 나섰다.
-황제가 명예 후작을 두려워할 일은 없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이 세상의 구원이니까요. 혼동하셔선 안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적대해야 할 적은 혼돈의 파편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검후, 혼동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제가 가진 감정을 솔직히 꺼내 놓았을 뿐입니다. 이 자리에 제 말을 곡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작들도 그러하고요. 그렇지 않소?”
각자의 소감을 묻는 황제의 질문.
그러나 공작들 중 그 누구도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무참하게 당했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황제가 물었으니, 언제까지 침묵을 지킬 수는 없는 일.
가장 먼저 아마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크흠,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사실 지금도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과연 인간이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호오, 재밌는 감상이로군요.
“아, 오해는 마십시오, 검후, 그렇다고 명예 후작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걱정하지 마오. 오해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나도 가끔 생각한다오. 이이가 진짜 인간인지 말이오. 아, 황제는 아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황제가 오늘 체감한 힘. 그것이 극히 일부라는 사실. 오늘 이 자리에 있던 공작들이 느끼고 체험한 것에 비하면 십 분의 일 수준일까요.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황제는 알고 있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보좌에 앉아 있었다지만, 가까스로 무너지지 않고 압력에 저항할 수 있었다.
공작들이 저항하지 못하는 힘을 그가 견디다니, 이건 명예 후작이 봐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다행인가 싶지만,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앞선 검후의 말처럼 자신이 언제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기도 했다.
-원한다면 한 번 더 진짜를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안될 말씀입니다.”
폴카 공작과 나람 공작이 앞서와 달리 한층 강경하게 거부하고 나섰다.
여기서 더 넘어가면 황제의 심신에 타격이 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반대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검후, 저도 두 번은 힘듭니다.”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드의 옆에는 어느새 다가 온 일리나가 이드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혼원식을 다루는 일은 이드에게도 진땀 나는 일이었던 것.
덕분에 라미아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익숙한 12대식을 두고 왜……”
쫑알쫑알. 참새처럼 짹짹 쏘아대는 라미아.
그 앞에 힘없이 웃고만 있는 이드.
공작들에게 그 모습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조금 전 실력 발휘로 인해 그들에게 이드는 대적 불가의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그런 인물이 작은 여성의 잔소리에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다니.
“어쩐지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오.”
“동감입니다.”
묘한 허탈감을 공유하는 공작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기 한 명.
바이언 공작은 황제의 말은 물론 주변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이드가 힘을 거둔 다음부터 지금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도무지 떨림이 진정되지 않는 손.
떨리는 것은 자신의 손인가, 마음인가.
“괜찮은가?”
이런 모습을 뒤늦게 알아차린 코페르니 공작이 묻자, 그제야 고개를 든 바이언 공작이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안 괜찮은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냥은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바이언 공작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대전 기둥에 사정없이 이마를 들이박았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