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81화
1516화
최선을 다해 달라는 부탁.
어쩌면 그건 패배가 확실한 대련에 나서는 무인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드에게 있어서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였다.
모순된, 불가능한 주문이라는 말이다.
마음 같아서야 들어주고 싶다.
최선을 다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문제는 그럴 경우, 대련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이드에게 있어 최선이자 최강은, 그 무진장한 내공으로 펼쳐내는 12대식인데.
시작부터 바이언 공작을 상대로 12대식을 쏟아낸다?
대련은 둘째치고, 그 순간 바이언 공작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게 무슨 대련인가. 살인이지·
동시에 앞서 이미 끝낸 힘의 증명 2가 될 뿐이다.
이 대련에 있어 이드의 최선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이유로 즉답이 나오지 않자, 이를 오해한 바이언 공작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어졌다.
“불쾌한 부탁이었다면……………”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만, 분명 들어드리기 어려운 일인 것은 맞습니다.”
“어째서 어려운 것이오?”
“간단히 말해…… 최선을 다하기에는 힘의 격차가 너무 큽니다.”
조금은 노골적일 정도로 핵심을 찌른 이드는 앞서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짧게 정리해서 말했다.
듣기에 따라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바이언 공작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오히려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아쉬운 일이오. 격차가 너무 커서 정상적인 대련이 될 수 없다니. 하지만 좋소. 명예 후작의 진짜 무공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죽어도 웃을 수 있을 것이오.”
와, 이런 상남자를 보았나.
이드는 웃음으로 죽음을 반기는 바이언 공작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런 이드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황제였다.
이드가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이유에 놀라고 있던 그는, 죽어도 좋다는 바이언 공작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숨을 걸고 하는 대련이라니! 그런 대련이라면 나는 허락할 수 없소.”
“황제 폐하, 폐하께서 이미 허락하신 대련입니다.”
“말 잘했소. 내가 허락한 것은 대련이지, 생사를 건 결투가 아니오.”
“황제 폐하…….”
“그만! 공작은 제국의 검이오. 나는 결과가 뻔한 대련으로 제국의 검이 부러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이 없소.”
황제는 바이언 공작의 말을 막으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했다.
대련은 허락하지만, 목숨이 걸린 결투는 허락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 어떤 반론도 듣지 않겠다는 의지가 선명히 드러났다. 거기에 다른 공작들 또한 이 뜻에 공감하는 모습들이다. 뿐만 아니었다.
-황제의 말이 과연 옳습니다. 귀중한 전력을 사소한 일로 잃을 수는 없지요.
이 문제에 있어서는 검후도 황제의 편이었다.
“검후까지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검후라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리라 생각했던 바이언 공작은 크게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떨어트렸다.
-공작의 기분은 내가 잘 압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욕심은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법이에요.
그리 말하며 바이언 공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검후.
-그리고 최선이 꼭 내공의 크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시야를 넓히세요, 공작.
공작이 아닌, 한 명의 수련생을 가르치는 것 같은 모습.
실제 소드 팰러스에 수련생으로 머물렀던 경험이 있던 바이언 공작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좁았던 시야기 넓어지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울하던 바이언 공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는 가장 먼저 눈앞에 선 검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검후, 지금도 옛날처럼 절 깨우쳐 주시는군요.”
-호호호.
갑작스러운 인사에 웃음으로 답하는 검후.
바이언 공작은 그런 검후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황제를 향해 재차 말했다.
“황제 폐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다시 대련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번엔 결투가 아닌 대련을 하겠습니다. 목숨을 걸지도 않을 것입니다.”
황제를 향해 그렇게 말한 바이언 공작은 곧이어 이드를 향해서도 말했다.
“곤란한 부탁을 드려 죄송했소. 다시 부탁드리오. 최선을 다한 대련을 해 주시오. 내가 죽지 않는 선에서 말이오.”
짧은 한 줄이 더해진 부탁에 이드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드의 말에 따라 다시 결정권이 돌아온 황제.
그는 바이언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은 바이언 공작의 진심을 살피고 있었다.
이에 깊이 고개를 숙이는 바이언 공작.
그에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좋소. 대련을 허락하겠소. 그러나 대련 중에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련을 즉시 멈출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바이언 공작 그대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소. 부탁하오, 명예 후작.”
바이언 공작이 아닌, 이드를 향해 부탁의 말을 하는 황제.
이드는 걱정하지 말라며 답했다.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옵소서. 황제 폐하. 선을 넘는 일이 없도록 대련을 잘 조율하겠나이다.”
“부탁하오. 제국의 검이 부러지지 않는 선에서, 날을 잘 세워주시오.’
날을 세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바이언 공작은 제국이 자랑하는 검 중 하나.
그런데 그런 검이 두려움을 품었으니, 이 대련을 통해 그걸 극복한다면 더 날카롭게 성장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황제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바이언 공작의 요청을 허락한 것이 분명했다.
이런 황제의 마음 때문일까,
순간 몇몇 공작이 아쉬운 기색을 내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차 황제의 허락을 얻은 바이언 공작은 신이 난 목소리로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있느냐! 어서 내 검을 가지고 오라.”
그러자 잠시 후, 기사 하나가 검 한 자루를 두 손에 받쳐 들고 대전으로 들어섰다. 이를 본 바이언 공작이 성큼성큼 기사에게 다가가 빼앗듯 검을 받아 들었다.
검을 손에 든 순간, 바이언 공작의 기도가 변했다.
가볍게 흔들리던 기도에 시퍼런 날이 서기 시작했다.
황제 앞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일. 그럼에도 곧 있을 대련에 대한 기대감에 절로 투기가 끓어오른 것이다.
직후 대전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바이언 공작.
이드도 그를 따라 대전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삼 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 선 두 사람.
묘한 긴장감이 장내를 채우는 순간, 황제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대련을 하기에 이 대전은 조금 별로인 거 같은데, 장소를 옮기는 것은 어떠하오?” 황제의 의견은 옳았다.
붉은 카펫이 깔린 대전은 대련을 진행하기 적당한 장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선 두 사람에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이미 장소를 가리는 경지는 지난 지 오래. 무엇보다 바이언 공작은 더 참고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옵니다. 그렇지 않소?”
“공작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쓰시는 검의 모양이 조금 특이하군요?”
바이언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의 관심은 어느새 그의 검을 향해 있었다.
바이언 공작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그의 말대로 일반 롱소드와는 조금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일단 검신이 롱소드보다 길었다. 대충 봐도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검자루도 길었다. 이쪽은 일반 롱소드의 네 배는 될 것 같았다.
어찌 보면 투핸드소드와도 닮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그보다 가늘고 길었다.
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바이언 공작의 입가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내 분신이오. 이름은 지그 내 검술을 정립하고 이 녀석이 태어나기까지 이십사 년이 걸렸소.”
“설마 검술을 새로 창안하신 겁니까?”
바이언 공작의 말뜻을 이해한 이드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바이언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오. 그저 내 손에 맞게 조금 고쳤을 뿐.”
같은 검술이라도 익힌 사람에 따라 그 특성이 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성격과 재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용하는 무기의 형태를 바꿀 정도로 그 형태가 변형되었다면, 그건 새로운 무공의 창안이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바이언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자신의 검을 봤다.
“내 검의 정수는 이 지그에 있소.”
스르릉.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을 뽑는 바이언 공작.
은색 늘씬한 검신은 아름다운 미녀를 떠올리게 하였다.
바이언 공작은 들고 있던 검집을 뒤로 던져 버리고는 말했다.
“명예 후작은 전장에서의 내 별명이 창병이라는 것을 아시오?”
“처음 듣습니다만, 이제 보니, 들고 계신 지그가 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검의 길이가 이 미터에 가깝다.
그 정도면 충분히 창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길이다.
거기에바이언 공작이 스스로 창병이라 말을 한 순간부터 그의 기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길쭉하게 뻗어 나가며 영역을 넓히는 그의 제공권,
그 깊이는 검이 아닌, 창의 그것에 가까웠다.
‘이건 또 흥미로운 무공과 무기네.’
이드는 바이언 공작에 대한 호감뿐 아니라, 흥미가 솟았다.
과연 검을 들고서 스스로 창병이라고 말하는 그는 어떤 무공을 보여줄 것인가.
“그런데 명예 후작은 검을 들지 않소?”
“제 검은 별궁에 두고 왔거든요. 대신 이 두 손가락으로 검을 대신하지요..”
그리 말하며 검결지를 들어 보이는 이드의 손가락에 투명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검기였다.
정련되기 전의 검기.
“괜찮겠지요?”
“흐흐. 다른 놈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다리부터 부러트려서 창밖으로 던져버렸을 것이지만, 명예 후작이라면 충분히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지. 그럼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