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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82화


1517화

대련이 시작되기 전 검후가 말했다.

-황제가 시작 신호를 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하. 그럴까요.”

이런 세기의 대련이 언제 또 있을까.

기쁘게 승낙한 황제가 그 손을 들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시작을 외칠 것 같은 모습에 아마람 공작이 급히 나섰다.

“황제 폐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오?”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를 대비해, 황제 폐하에 대한 방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방비라면, 나람 공작과 폴카 공작이 있지 않소?”

이미 황제 곁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은 각각 제국 최강의 기사이며, 최강의 마법사다.

“모자랍니다.”

그럼에도 아마람 공작은 부족해 보였던 모양.

그는 다른 공작들을 불러 모아 황제를 지키도록 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두 분 명예 후작 부인께서도 안전하게 자리를 옮기시지요.”

황당하게도 그는 라미아와 일리나까지 황제의 보호막으로 쓰려고 했다.

안전에 대한 방비는 아무리 과해도 모자라다 지만, 이 정도로 심하면 집착이나 강박 수준이 아닐까?

그런데 검후는 이런 공작을 나쁘게 보지 않은 모양이다.

-공작의 말대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어요.

검후의 권유에 일리나와 라미아는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그 의도가 너무 뻔해서 오히려 기분 나쁘지 않았기 때문. 그리고 하는 김에 검후를 불러내고 있는 링크 마법진도 안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렇게 관람 준비를 마친 관객들 속에서 황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시작 신호를 보내려는 것.

이를 본 바이언 공작이 검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그런데 이 기수식이 좀 특이했다.

어깨높이로 든 상단세의 검끝은 이드를 향해 있고, 검자루를 든 손은 마치 활을 당긴 듯했으며, 살짝 앞으로 기운 상체는 발사되기 직전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래 마치 창을 든 창병처럼 말이다.

창병이라는 별명이 괜한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

그에 이드도 드물게 놀랍다며 반응했다.

다만 그 놀라움은 창병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라일론에서 사일 검법과 똑같은 기수식을 볼 줄이야. 이런 일도 있구나.’

사일 검법이라고 하면 점창의 비전 검법이다.

해를 쏘아 떨어트렸다는 후예의 신화에서 탄생한 이 검법은 찌르기를 중심으로, 요혈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살기가 짙은 검법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정파에서는 편협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또한 이런 특징으로 인해 강호의 검법 중 손꼽히는 쾌검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이런 사일 검법의 기수식을 중원도 아닌 그레센 땅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사람의 생각이란 차원이 달라도 비슷한 것일까.

갑자기 호기심이 일어났다.

‘기수식 말고 본초는 어떠할까?’

대련에 대한 흥미가 두 배가 된 기분.

이드는 그 기분을 담아 검결지를 곧게 세웠다.

바이언 공작의 그것과는 다른 무형검강결의 기수식이었다.

검법의 상성으로 보자면 수라삼검으로 사일을 상대함이 옳겠지만, 상대의 사일은 점창의 것이 아니며, 본 것이라고는 기수식뿐.

무엇보다 이드는 라일론의 관객들에게 검식의 강맹함을 선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양측이 준비를 마치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황제가 큰소리와 함께 손을 내렸다.

“대련을 시작하라!”

그 순간 바이언 공작의 동공이 수축하며, 호흡이 극도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 직전의 맹수와 같은 모습.

하지만 몸은 마음 같지 않음인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본 이드가 말했다.

“선공은 양보하겠습니다.”

“사양하지 않겠…… 소!”

이드의 양보에 망설임이 사라진 것일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이언 공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팡!

시작은 기수식만큼이나 매우 정직했다.

찌르기.

우직할 정도로 정직한 검로가 이드를 향해 그려졌다.

뻔한 검로였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마치 군더더기 없는 살수의 검을 연상시키는 찌르기.

그 찌르기가 이드의 얼굴을 꿰뚫는 순간.

어느새 나타난 검결지가 검신을 두드렸다.

따앙!

미끈한 검신이 갈대처럼 출렁이며 목표에서 벗어난다.

창병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검이 너무 가볍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바이언 공작의 손이 검신을 누른다. 금의 현을 누르는 듯한 섬세한 손길.

샤아악!

그 순간 목표를 잃고 빗나가던 검끝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던 칼끝이 방향을 바꿔 독사의 대가리처럼 이드의 목을 노렸다.

예측 불가의 변칙적인 검로.

하지만 이드의 기감을 벗어날 순 없었다.

팅!

이드는 겁대가리 없는 독사 대가리에 딱밤을 날렸다.

그러자 부러질 듯 굽어지는 검신,

그러나 부러지지 않은 독사는 더 독이 바짝 올랐다.

놈은 제 공격이 생각처럼 통하지 않자, 공격 범위를 넓혔다.

하지만 놈의 어떤 변칙적인 움직임도 이드의 검결지를 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독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놈은 상당히 독했다.

연이은 충격으로 붉게 달아오른 몸으로 공격 속도를 더 올렸다.

그에 따라 이드의 몸이 은색 그림자로 가려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중, 이드는 그 공격들을 느린 듯하면서도 공간을 제압하는 정중동의 움직임으로 하나하나 정직하게 제압해 나갔다.

그에 따라 양측의 공격과 방어 속도가 무섭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쩌엉!

쩌러!

동시에 고막을 따갑게 두드리는 쇳소리도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은빛 검광이 난무하는 대련을 지켜보던 황제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어째서 검기나 강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오?”

“아직 탐색 단계이기 때문이옵니다.”

코페르니 공작이 답했다.

“저 치열한 공방이 고작 탐색전이란 말이오?”

“분명 대단한 공방이지만, 아직 초식을 겨룰 뿐인 단계입니다. 저 두 사람의 발을 보시옵소서. 대련을 시작하고 아직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사옵니다.”

“오오, 정말 그렇구려.”

정말 두 사람의 발은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황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주변이 검영으로 가득할 정도의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니.

“본격적인 대련은 지금부터일 것입니다.”

과연 정확한 판단이었다.

코페르니 공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이언 공작의 검신에서 불쑥 솟아오른 푸른 검기.

샤아아아!

동시에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던 바이언 공작의 발이 움직였다.

직후 푸른 검기가 바이언 공작의 신형을 가리며 이드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사이 검기의 사각을 이용해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바이언 공작.

그러나 그의 노림수와 상관없이 이드는 검기 너머의 그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막 공격을 찔러 넣으려는 바이언 공작보다 먼저 검기의 파도 속으로 주먹을 찔러 넣었다.

쩌엉!

기습을 노리던 중 기습을 당한 바이언 공작.

하지만 그는 능숙한 솜씨로 이드의 주먹을 막아내고는, 그 순간 발생한 반탄력을 이용 위치를 바꾸며 반격을 넣었고, 이 강렬한 회오리 같은 공격에 대해 이드는 무형극의 초식으로 대응했다.

그 일격에 흔들린 회오리 사이로 이드는 장력을 때려 넣었다.

콰릉!

회심의 반격이 이렇게 쉽게 실패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겨우 장력을 막아낸 바이언 공작은 속수무책인 모습으로 주르륵 밀려났고. 이드는 그런 바아인 공작을 눈으로 좇았다.

그런 이드의 눈에는 작은 실망과 함께 또 그만큼의 흥미가 교차하고 있었는데. 그중 실망은 당연히 바이언 공작의 검법에 대한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똑같았던 기수식과 달리 그의 검법은 사일 검법이 아니었다.

초식의 구성과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굳이 닮은 점을 찾자면 찌르기를 중심으로 한 초식이 많다는 정도였다.

아쉽게도 그것을 제외하고는 사일 검법의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던 묘한 기대감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러나 실망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초식은 달랐지만, 그 속에 담긴 검의라고 할까? 검법이 이르고자 하는 궁극적인 형태는 사일 검법과 많이 닮아 있었다.

‘어쩌면 점창파를 위한 맞춤 인재였을지도?’

정말 그렇다면 점창파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자신들을 위한 인재가 차원을 잘못 타고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드의 생각이 살짝 옆으로 흐르는 사이.

한숨 돌린 바이언 공작이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며 말했다.

“죽지 않을 정도까지는 최선을 다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나는 아직 그대가 증면한 힘의 꽁무니도 보지 못한 것 같소만?”

차분하지만, 더욱 투지가 끓어오른 것 같은 바이언 공작.

이드는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부터 제대로 보여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우우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드의 손끝에서 아름답게 솟아오르는 검강.

이드는 그런 검강을 보며 하얗게 미소 짓는 바이언 공작을 향해 말했다.

“오시지요.”

“기대되는구려!”

화르르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이언 공작의 검에서도 바다를 닮은 푸른색 검강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달려드는 바이언 공작.

앞선 탐색전과 달리 이번엔 그의 발이 바빴다.

타타탁!

바닥과 대전의 기둥, 그리고 천장을 종횡무진하는 그의 움직임은 입체적이었다.

공격의 형태도 변했다.

창병답게 본격적인 찌르기가 이드의 요혈을 집요하게 노려왔다.

“크아아압!!”

공격에 더한 바이언 공작의 거친 기합이 그가 얼마나 전력을 다하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드는 이런 상대의 진심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같은 위력의 검강.

그러나 방어가 아닌 공격으로 돌아선 무형검강결의 위력을 마음껏 뿌려댔다.

쩌저저적!

그에 따라 바이언 공작의 찌르기는 무형기류를 절대 넘지 못했다.

반대로 이드는 무형일절의 검강으로 바이언 공작을 갈대처럼 휘청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대련이 격렬해질수록 대전 중앙은 검강의 파편과 충격파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특히 강기의 충돌로 인한 충격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폭음이 늘어날수록 바짝 긴장한 모습의 아마람 공작.

하지만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연이은 폭발에도 봄바람 같은 미약한 충격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에 눈을 크게 뜬 아마람 공작.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대련 중인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일정한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투명한 어떤 장막이.

그 장막이 검강의 폭발과 그에 따른 모든 충격파를 막아주고 있었다.

마법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순수한 힘의 결정으로 보이는 장막.

“내공? 혹시 나람 공작이…….”

“나는 아니오.”

“그럼 누가…….”

“명예 후작이오.”

나람 공작은 대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내겐 저런 기막을 형성할 능력이 없소. 이 자리에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둘. 하지만 그중 한 분은 실체가 아니니. 남은 것은 명예 후작뿐이오.”

설명을 들은 아마람 공작은 허탈한 숨을 토했다.

이럴 줄도 모르고, 공작들을 불러 모았으니. 쓸데없는 짓이 아니었나.

그나저나 저리 격렬한 대련 중에도 기막으로 충격파를 막아내다니.

“얼마나 여력이 남아도는 것인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중하시오. 곧 승부가 날 것이오.”

그리고 나람 공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전 중앙으로부터 지금까지 없던 강렬한 하얀빛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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