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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84화


1519화

“아직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짧게 답하는 바이언 공작.

하지만 말과 달리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는 백 마디 말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를 본 황제도 무릎을 두드리며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소. 내 신관들을 보낼 터이니, 공작은 어서 돌아가 상처를 돌보도록 하시오.”

“황공하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참이다.

황제의 배려에 감사를 표한 바이언 공작은 그대로 몸을 돌려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황제는 대전의 문이 닫히자 말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참 옳은 말이 아니오?”

“어인 말씀이옵니까?”

“바이언 공작의 용기가 복을 불러와서 하는 말이오.”

아마람 공작은 황제가 바이언 공작의 깨달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신 또한 그리되길 간절히 바라오나, 이러한 기대가 자칫 바이언 공작에게 부담으로 비칠까 우려가 되옵니다.”

“아아, 물론이오. 그런 일은 없어야지. 다만 깨달음을 얻은 것은 확실해 보이지 않소? 나람 공작은 어찌 생각하시오?”

“황제 폐하께서 옳게 보셨사옵니다. 신 또한 그리 보았습니다.”

“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소.”

자신을 지지하는 나람 공작의 말에 기대감이 한층 더해진 황제.

그 때문일까. 자신과는 다른 공작들의 표정에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쉬움과 부러움이 섞인 얼굴.

황제는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공작들의 표정은 어찌 그렇소? 축하보다는 아쉬움이 더 커 보이는데, 제국이 강해지는 것이 기쁘지 않은 것이오?”

황제의 난감한 농담에 공작들은 당혹한 얼굴이 되었다.

“아,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아, 알고 있소. 나도 농담으로 해본 말이오. 바이언 공작에 대한 그대들의 부러움을 내 어찌 모를까. 나 또한 황제이면서 무공을 익힌 기사가 아니겠소.”

황제와 귀족들에 있어 무공은 교양이 아닌 필수였다.

스스로 강해지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어느 정도의 무공만 익혀 유지한다면 어지간해서는 몸이 상할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제도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그것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기사였다.

이러한 황제인 만큼 어찌 무공의 깨달음에 대한 의미를 모를까. 그 충만한 희열과 환희를 말이다.

또한 아쉬움이기도 했다.

이드와의 대련으로 바이언 공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만약 다른 공작들도 이드와 대련을 가졌다면, 바이언 공작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섣부른 생각이며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로서 아쉽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나온 말이기도 했다.

“바이언 공작이 부러우시오?”

“황공하오나, 솔직히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바이언 공작을 시샘하는 것은 결코 아니옵니다.”

공작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을 수록 괜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공작들은 자신들이 가진 솔직한 심정을 꺼내 놓았다.

이드와 대련이 나선 것이 바이언 공작이 아닌 자신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이미 패배가 결정된 대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낸 바이언 공작에 대한 부러움.

이러한 감정은 바이언 공작과 마찬가지로 무공을 익혀 경지에 오른 공작들이 특히나 컸다.

황제 또한 이런 공작들의 반응을 곡해하지 않았다.

“경들의 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건 어떻소? 원한다면 한 번 더 명예 후작과 대련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보겠소.” 

황제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그 속에 든 것은 바이언 공작과 같이 다른 공작들도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순간 다시 찾아온 기회에 생각이 많아 보이는 공작들.

하지만 이런 공작들과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니, 바로 아마람 공작이었다.

황제와 귀족들, 그리고 아홉 공작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게 자칫 세력 균형이 흔들리는 사건으로 확대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반대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앞선 황제의 농담처럼 이 일에 반대한다는 것은 제국의 전력을 상승시킬 기회를 거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

‘이거 당분간 꽤나 골치가 아프겠구나.’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이마를 문지르는 아마람 공작이었다.

그러는 사이 생각을 마친 공작들이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다시 기회를 내리신다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잡아 보이겠사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이 자리에 있는 공작들은 하나같이 제국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들이라고 바이언 공작보다 용기가 없고, 투쟁심이 모자랄까.

단지 이득이 없기 때문에 나서지 않았을 뿐.

그러나 깨달음의 기회가 찾아오자, 그 태도가 달라졌다.

물론 모두가 나서 기회를 잡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폴카 공작과 하인라이어 공작처럼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은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분야가 다른 만큼 이드와의 대련으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굳이 얻는 것이 있다면 강자와의 대련에 대한 경험뿐인데, 그건 대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경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오. 그럼 이차 대련은 내가 적극 추진해 보겠소.”

은근히 신이난 듯 보이는 황제.

이드의 대련이 퍽 인상 깊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런 황제의 얼굴은 다음 이야기가 나오자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즐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지금부터는 혼돈의 파편에 대해 논의해 봅시다.”

혼돈의 파편.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대전의 공기가 변했다.

공작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무겁게 변했다.

황제가 약속한 대련에 대한 기대는 물러나고, 대신 그 자리에 깊은 우려만이 남았다.

황제는 이런 공작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경들도 명예 후작의 힘을 잘 보았을 것이오. 명예 후작은 강하오. 그리고 그만큼 혼돈의 파편도 강하겠지. 제국의 힘으로 그들을 감당할 수있겠소?”

공작들을 향해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황제.

그에 공작들이 차례대로 자신들의 생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무인간의 대결이라면 제국도 감당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전쟁은…….”

황제와 여덟 공작만 남은 대전.

넓은 대전은 곧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그렇게 대전에서 논의가 진행되는 사이.

이드는 두 아내와 함께 별궁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 사람은 가장 먼저 답답한 옷을 편하게 갈아입고, 차가운 맥주를 꺼내어 마셨다.

“크으~ 시원하다. 갑갑했던 속이 이제야 뻥 뚫리는 기분이야.”

“맞아요. 역시 그런 답답한 자리는 우리 취향이 아니죠.”

이드가 단숨에 비워 버린 잔에 맥주를 다시 채우며 말하는 라미아.

그 얼굴은 미루고 있던 숙제를 해치워 버린 것처럼 시원해 보였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음료를 홀짝거리고 있던 일리나가 말했다. 

“그런데 잘 될까요?”

“물론이죠. 잘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사실 검후가 나선 시점에서 이미 맹약의 부활은 확실해진 상황이었죠.’

이드도 라미아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더했다.

사실 그 말이 옳았다.

사실 오늘 대전에서 볼 때까지도 확답을 주지 않던 황제였다. 그러나 링크 마법을 통해 검후를 불러내는 순간, 그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을 이드는 보았다.

“확실히 검후의 영향력이 대단한 거 같아요.”

라일론 제국의 설득에 대한 일을 검후에게 내던진 이드였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건 애초에 따로 설득이 필요가 없었던 일이었다.

과거의 기록이 있고, 맹약에 대한 근거가 있으며, 검후가 그에 대한 확인을 하는 순간, 이미 끝난 이야기였던 것이다.

애초에 증거도, 증명도 필요치 않았던 일.

“그럼 이드를 사신으로 보낸 것도?”

“설득보다는 소개를 위한 자리였다는 거겠죠. 아무래도 이후 서로 협력해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아 둘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물론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라미아가 빈 맥주병을 아공간의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으며 말했다.

“진짜 목적? 소개가 아니라?”

“물론 그런 목적도 있겠죠. 하지만 그뿐이라면 굳이 증거니, 증명이나 할 필요가 없잖아요. 무엇보다 애써 대련 자리를 만들 필요도 없었고.” “대련은 바이언 공작이 원한 거였잖아.”

“틀려요.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검후였어요. 앞선 그녀의 말이 없었다면 아마 바이언 공작과의 대련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검후가 먼저 자리를 깔아 놓았기 때문에 바이언 공작도 대련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말이다.

“흐음, 그럼 검후가 노린 진짜 목적이 먼데?”

“맹약의 주인. 검후가 진짜 증명하고 싶었던 건 아마도 맹약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였을 거예요.” 검후가 부활시킨 맹약의 내용은 복잡한 동시에 간단하다.

목표는 단 하나.

두 제국이 협력하여 혼돈의 파편을 상대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소하면서도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협력의 과정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즉, 두 제국의 전력을 누가 지휘할 것인가.

“그래서 누구에게 있는데?”

어쩐지 싫은 표정을 하고서 묻는 이드.

그에 라미아가 키득거리며 이드의 코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누구긴 누구예요. 당연히 이드죠. 검후는 대전에서의 증명을 통해 맹약의 중심에 이드가 있다고 확인시켜 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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