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88화
1523화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이드는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일리나는 전날 구입한 활을 점검하며 살을 다듬는 등 부산스러웠고, 라미아는 신체로 사용 중인 골렘과 본신의 적합도를 미세조정 중이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오랜만에 가지게 된 혼자만의 시간.
그렇다고 뭐 크게 심심하거나 그렇진 않았다.
나름 이 고요한 시간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한쪽 시야에 들어오는 시종들의 모습.
바쁘지만 잘 정돈된 듯해 착착 맞아떨어지는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잡념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랄까.
준비해 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조심스러운 발소리.
스폴이었다.
그녀가 주변을 경계하며 테라스 쪽으로 다가왔고, 이드는 자연스럽게 한쪽 자리를 권했다.
“차 맛이 좋은데. 한잔하겠어?”
“주시면 마시겠습니다.”
예상대로의 대답.
이드는 차를 따른 잔을 그녀 앞으로 밀어주었다.
“마셔봐.”
“하아~ 좋네요.”
따뜻한 차가 들어가서 그런지 한결 편해지는 스폴의 얼굴.
이드는 사방을 경계하던 조금 전 모습이 떠올라 슬쩍 말했다.
“여기선 습격도 없을 텐데. 긴장 좀 풀지그래?”
“제가 긴장한 이유는 습격 때문이 아닙니다. 이드 님이 계시는데 긴장할 이유가 없죠.”
“그럼 아까는?”
“습격은 무섭지 않은데, 전날 다녀가신 황녀님은 감당하기 어렵네요.”
순간 스폴의 얼굴을 스치는 짙은 피로감.
이드는 그 모습을 애써 모른척하며 물었다.
“・・・・・ 생각보다 고생이 심했나 봐?”
“그렇게 체력이 좋은 어린아이는 처음 봤습니다.”
잘래잘래 고개를 젓는 스폴.
도대체 어제 황녀는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고 돌아간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차마 아픈 기억을 들쑤시진 못했다.
그러는 사이 안정을 찾은 스폴이 다리를 쭉 펴고는 말했다.
“그래도 아침부터 달려오시지 않는 걸 보면, 그 망아지 같은 황녀님께 제법 튼튼한 고삐가 채워진 모양입니다.”
“어떤 고삐?”
“모르죠. 어제도 늦게까지 머물다 가셨으니, 황후께 엉덩이라도 맞지 않았을까요?”
상상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낄낄거리는 스폴.
전날의 고생 때문일까. 황녀에 대한 취급이 상당히 거칠어진 그녀였다.
이드는 그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잔에 차를 따랐다.
“이번 임무도 곧 끝날 테니까, 조금만 더 고생해.’
“곧 끝나는 겁니까?”
“사실 이미 끝났지. 사신으로서 임무는 완수했으니까.”
“그럼 맹약이 다시 발동하는 겁니까?”
이번 사신의 임무에 대해서는 이드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스폴의 물음.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발동될진 몰라도 부활은 확실해.”
검후와 황제가 마주한 시점에 이미 부활이 결정된 맹약.
하지만 그 안에 든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한 논의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국가 간의 일이 아니던가. 살펴야 할 것이 많은 만큼 짧으면 몇 주에서 길면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이런 상황이니, 맹약이 발동될 때까지 이렇게 별궁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임무가 끝나면, 떠나실 계획이십니까?”
“그렇겠지. 사신 임무가 끝나면 굳이 여기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원래 목적도 있고.”
“……………견제를 가장한 관광 말이군요.”
“어쭈, 관광? 이게 관광으로 보이면 같이 갈래?”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스폴이 으흐흐 웃으며 두 손을 저었다.
장난처럼 꺼내놓은 말이었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이 단순 관광이 아닌 혼돈의 파편에 대한 견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스폴이었다. 경우에 따라 매우 위험천만할 수 있는 여행.
높은 확률로 여정 중에 습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드의 힘을 알고 있는 만큼 그런 습격에는 혼돈의 파편이 직접 나설 텐데.
혼돈의 파편에 의한 습격이라니.
오소소.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기분.
스폴이 지금까지 직접 보고 느낀 혼돈의 파편이란 그만큼 압도적인 공포를 가져오는 존재였다.
“저는 얌전히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 부디 세 분께서 무탈하게 다녀오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누가 보면 당장 떠나는 줄 알겠다?”
“당연히 그건 아니죠. 아직 사신 임무가 정식으로 끝난 것도 아니고요. 모르긴 몰라도 몇 번의 알현은 더 남았을걸요?”
“그렇게나?”
“사신 일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셨어요?”
스폴은 어림도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사실 이드는 정식 사신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
진짜 정식으로 임명된 사신의 경우 원래 목적을 위해 타국에서 발바닥이 닳도록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주요 귀족들을 만나 조건을 조율하고, 자국을 지지할 세력을 다독이고, 준비한 예물로서 황족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신이었다.
이런 스폴의 말에 이드는 소개팅을 앞둔 모쏠같은 표정을 했다.
“곤란한데. 이젠 가져온 이야기도 다 떨어졌는데.”
사신으로서 전해야 할 이야기는 모두 전달했다. 그리고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로서 혼돈의 파편에 관련된 일도 모두 밝힌 상태였다. 그렇기에 굳이 황제를 다시 만나야 할 이유도, 만나 할 이야기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찮은데.”
얼굴 가득 싫다는 기색이 가득한 이드.
스폴은 이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찼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드 님뿐일 겁니다. 보통 귀족이라면 전 재산을 내놓고 이런 기회를 잡으려고 할 겁니다.”
그야말로 억만금을 내놓고라도 잡고 싶어 할 기회일 테지만.
이드는 시큰둥했다.
“그건 보통 귀족들 이야기고. 애초에 난 명예 귀족이지, 진짜 귀족도 아니라고.”
“말이 명예 귀족이죠. 이드 님께 실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거기에…….”
스윽.
주변의 기척을 살핀 스폴이 이드의 귓가로 몸을 기울이고는 작게 속삭였다.
“이드 님이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사실만 밝혀도 명예 딱지는 즉시 떨어질걸요.”
어디 명예 딱지뿐일까, 후작이라는 작위도 최소 공작급으로 바뀔 것이다. 어쩌면 왕작이 내려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사실 이드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필리푸스 황제의 속내가 바로 이러했다.
지금이야 혼돈의 파편이라는 적 때문에 침묵하고 있지만, 그는 기회만 있다면 좀 더 확실하게 이드를 제국에 잡아 둘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 동시에 이드의 진짜 정체가 외국에 알려질까 봐 오늘도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였다.
스폴은 다시 한번 작은 소리로 물었따.
“그…………… 여기 황제 폐하께는 아직이죠?”
“뭘?”
“이드 님의 진짜 정체요. 마인드 마스터.”
“모르겠지. 내가 밝히지 않았으니까.”
“저희 황제 폐하께는 밝히셨잖아요. 여기선 밝히지 않으실 생각이신가요?”
“글쎄. 굳이 밝힐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필리푸스 황제께는 그럴 필요가 있어서 밝혔지만, 라일론에선 딱히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
사실 자신의 정체야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밝혀지든 아니든, 큰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밝혀질 경우 번잡함만 늘어날 것이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밝히지 않는 편이 편하다.
따지고 보면 필리푸스 황제에게 정체를 밝힌 것도 다 검후 때문이다.
검후의 존재가 없었다면 어쩌면 그에게도 밝히지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검후가 없는 상태에서 상황이 지금과 같이 변했다면?
‘뭐, 그땐 정확히 밝히고 협조를 요청했겠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꽤나 복잡한 과정을 거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검후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다 싶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제 짧은 소견이지만 최소한 여기 황제 폐하께는 이드 님의 진짜 정체를 밝히는 것이 옳다 싶어서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스폴.
그녀가 언제 이렇게 정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은 경우가 있었던가. 그것도 전투 외적인 일에?
이드는 흥미롭다는 듯 스폴의 눈을 바라보았다.
매일 생기로 가득하던 그녀의 눈이 어쩐 일인지 매우 깊어 보였다.
“그런 의견을 내놓게 된 이유를 어디 한번 들어볼까?”
“이유는 두 가지에요. 첫째는 맹약을 강화하기 위해서죠. 아무래도 이것저것 따지는 것이 많을수록 허점이 생기고 헐거워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이드도 내심 예상하던 바였다.
맹약의 부활은 확실하다.
다만 원래의 완전한 형태로 부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아무리 큰 위험이 다가와도 당장의 이익을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혼돈의 파편 때문이에요. 저들이 직접 나서서 맹약을 깨거나, 라일론을 흔들려고 할 때, 이드 님의 존재가 그 혼란을 잡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이드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첫째 이유는 이해가 갔지만, 둘째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과연 혼돈의 파편이 직접 나서서 라일론 제국을 흔들려 할까?
과연 놈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까?
그럴 의지가 있었으면 이전 있었던 필리푸스 황제에 대한 습격 때에 이미 놈들이 나섰을 것이다. 또한 카논 제국의 황제도 진즉에 자신들의 수족으로 갈아치우지 않았을까?
그 때문에 놈들이 직접 라일론 제국에 손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또한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맹약을 부활시킨 이유처럼 놈들이 카논 제국을 움직이는 때가 온다면, 정말 라일론 제국에 직접 손을 대려 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한번 생각해 볼 문제긴 하네.”
“그렇죠?”
팔짱을 끼는 이드의 반응에 조심스럽던 스폴의 표정에 단숨에 밝아졌다.
이드가 자신의 의견을 인정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기뻤던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황제가 보낸 시종이 이드를 찾아온 것도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