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91화
1526화
황제와 대화를 마치고 별궁으로 돌아왔다.
기사들과 함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스폴이 가장 먼저 그를 반겼다.
“수고하셨습니다.”
“크게 수고라고 할 만한 건 없었어. 그보다 라미아와 일리나는?”
“테라스에서 담소 중이십니다.”
이드는 그 말에 테라스로 향했다. 스폴의 말대로 두 사람은 테라스에 나와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겉옷 이리 주세요.”
이드가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겉옷을 받아 드는 일리나.
이드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라미아가 새로운 찻잔을 꺼내 들며 묻는다.
“마실 거 드려요?”
“아니, 마시고 왔어. 황제께서 직접 우려주시더라고.”
그 말에 이드를 따라온 스폴이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께서 직접 말입니까?”
“어, 그렇다고 특별한 일은 아니고, 집무실에선 항상 차를 직접 우리시는 것 같더라고.”
“그래도 놀라운 일이네요. 황제께서 손수 차를 우려주시다니.”
아무렴 황제가 아무에게나 직접 우린 차를 대접할까.
분명히 말해 파격적인 대접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 혹시 이드님께서 황제께 정체를 밝히셨나 했습니다.”
이드의 진짜 정체를 알았다면 어디 차가 문제일까.
조금 김이 샜다는 얼굴의 스폴.
그에 이드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밝혔어. 그런데 차를 우려주신 건 밝히기 전이야.”
“진짜로요? 정말 정체를 밝히셨어요?”
태연한 이드와 달리 스폴의 반응은 꽤 격렬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던 일리나와 라미아도 관심을 보였다.
“뭘 그리 놀라? 정체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댔잖아. 그래서 밝혔지.”
“켁! 정말 제가 한 말 때문에 정체를 밝히셨어요?”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스폴.
이드는 그 반응이 재밌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았지. 하지만 결정을 내린 건 황제의 대화를 나눈 다음이야. 이야기를 해보니, 정체를 밝히는 쪽이 나을 것 같더라고.”
이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일리나와 라미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에겐 미안해요. 미리 상의도 없이 결정해 버려서.”
이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본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흰 괜찮아요.”
“맞아요. 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잖아요.”
애초에 두 사람이 정체를 감춘 것도 이드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두 사람의 반응은 평온했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이드의 결정이라면 처음부터 반대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떤 부분 때문에 정체를 밝히셨어요?”
라미아가 물었다.
“황제가 대신들을 설득하는 부분에 있어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라고. 그 순간 느꼈지. 이건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구나라고.”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가 대신들을 언급했다는 시점에서 그들 사이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짐작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폴은 그런 부분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이드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 순간 모두 의미 없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인드 마스터와 대신들.
황제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 지는 보지 않아도 너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래서! 정체를 밝히니까, 황제께선 뭐라고 하시던가요? 어떤 반응을 보이셨어요?”
살짝 흥분한 듯 말이 빨라지는 스폴.
묘한 기대감에 남의 러브스토리를 듣는 소녀처럼 두 손을 한데 모은 모습이 한편으로는 우습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드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차분하셨어. 가슴이 벌렁거린다고는 하셨는데, 의외로 덤덤하시더라고.”
“덤덤…… 이요? 어떻게 마인드 마스터가 나타났는데 덤덤할 수가 있어요? 두 분이 보시기도 그렇죠?”
납득할 수 없다는 스폴의 말에 일리나와 라미아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이드는 황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전날 있었던 공작들과의 대화.
이드가 증명한 놀라운 실력.
검후처럼 마인드 마스터도 젊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과 의심.
그 이야기에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면 그럴 수 있겠네요.”
“그래도 그 작은 단서들로 거기까지 추측하는 건 대단하네요.”
“그러니까요.”
몇 가지 사실을 기반으로 다양한 가설을 내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거기서 문제는 그 가설이 얼마나 현실성 있냐는 것.
그렇기에 그 부분에 있어 황제와 공작들의 직관은 꽤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 이드님의 정체를 알고도 별다른 말이 없으셨던 겁니까?”
“아예 없진 않았지.”
이드가 정체를 밝히면서 결심을 굳힌 황제.
거기에 더해 대화의 말미에 황제가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부탁.
“작위를 내리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작위요?”
“아나크렌처럼 명예 후작도 좋으니, 부디 받아주길 바란다고.”
그 말에 스폴의 표정이 괴이하게 변했다.
“왜?”
“아뇨. 작위를 받아 달라고 사정하는 황제 폐하의 심정이 어땠을까 싶어서요.’
제국의 작위를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하지만 제국이 어떻게든 작위를 내리고 싶어 하는 인물이 이드 말고 또 있을까.
황제도 지금 같은 경험은 처음일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이 사실을 알면 저희 황제께서는 또 얼마나 애가 타실까.”
“애가 탈 건 또 뭐야.”
“당연하잖아요. 이드님이 더 이상 아나크렌만의 명예 후작이 아니게 되셨는데요. 이 좋은 걸 라일론과 나눠야 한다니. 얼마나 아까우시겠어요?”
“내가 케이크야? 나눠 먹게?”
말과 함께 스폴을 노려보는 이드.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말이. 아무튼 그리고요? 또 없어요?”
그에 어깨를 으쓱이며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리는 스폴. 그 모습이 웃겼는지 라미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이드도 눈에서 힘을 풀고는 말을 이었다.
“하나가 더 있었지. 공작들과의 대련을 요청하시더라고.”
“흐음, 마인드 마스터의 가르침을 바라는 걸까요?”
“가르침보단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으신 모양이야. 바이언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이드는 전날 있었던 대련에서 바이언 공작이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바이언 공작의 경지를 한 단계 높여줄 정도로 대단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이언 공작의 무공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은 분명한 사실.
황제는 다른 공작들에게도 그러한 기회를 만들어 주고자 했다.
만약 공작들이 크든 작든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건 그대로 라일론 제국의 피와 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러겠다고 했지.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혹시 있을지 모를 혼돈의 파편과의 전투에 대한 경험도 될 것이고.”
정체를 숨기고 힘 조절을 하는 대련은 귀찮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가 없는 대련은 거부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공작들도 혼돈의 파편이 가진 힘의 크기를 직접 피부로 느낀다면 저들에 대해 방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 여기 황궁에서 체류 기간이 좀 더 늘어나겠네요?”
“그럴 거 같아. 하루에 두 명씩 봐주기로 했거든.”
그렇게 라미아의 물음에 답한 이드는 뒤이어 다시 스폴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체류시간이 길어진 만큼, 스폴 경의 고생이 늘어날 거야.”
“별궁에 머무르고 있어서, 저흰 기본 경호만 하고 있는 걸요. 고생이랄 건 없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꼬마 황녀님. 황제께서 자주 찾아갈 것 같은데, 잘 좀 봐달라고 하시더라고.”
“히익!”
순간 울상이 된 스폴이 이드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서, 설마 또 제가 황녀님을 혼자 상대해야 하는 건가요?”
“그건 아냐. 라미아와 일리나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매일 자리를 비울 예정이니까, 아무래도 스폴 경에게 좀 더 부담이 걸리겠지?” 그 말에 걱정이 태산이던 스폴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런 거라면 상관없어요. 휴~ 살았다. 전 또 저 혼자서 황녀님을 감당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두 분 명예 후작 부인께서 같이 계셔 주시면 아무런 문제도 없죠.”
“그럼 다행이고. 라미아와 일리나도 황녀가 오면 잘 돌봐줘요.”
“맡겨주세요.”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만만한 두 사람.
이드는 그런 두 아내의 모습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두 사람은 이날도 예고 없이 찾아온 황녀를 능숙하게 상대하면서 자신들의 말을 증명했다. 그런데 이날 별궁을 방문한 것은 황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별궁을 관리할 하인과 하녀들, 그리고 그들을 관리할 시종들이 추가되었다.
그 모두가 황궁을 관리하던 우수한 인력들이었다. 이드의 정체를 알게 된 황제가 티 나지 않게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저녁.
이드는 오늘 있었던 일과 황제의 반응까지 더해 검후에게 사실을 전달했다.
의외로 정체를 밝혔다는 사실에 검후는 놀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드가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 중에서도 이드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자신도 이드가 정체를 밝힘으로써 황제의 지지와 믿음을 얻는 쪽이 여러 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이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날부터의 일정은 규칙적이었다.
이드는 두 아내와 함께 아침을 먹고 대련장으로 향한다.
황궁 후원에 있는 대련장은 황제 전용으로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 대련장에는 이미 황제와 공작들이 나와 이드를 기다리고 있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고 이어지는 대련.
이때 이드는 어중간한 손대중은 절대 하지 않았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을 계기이겠지만, 이드는 혼돈의 파편을 상대할 경험을 주는 것에 더욱 신경을 썼다.
덕분에 아주 짧은 순간 승부가 갈렸다.
대신 충분히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한, 두 시간의 대련을 마치면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으며 대련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지나면 다시 다른 사람이 나와 대련을 지어간다. 그렇게 대련이 끝나면 별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하루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렇게 나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