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26화
563화
“카린이라는 기사, 잘도 이런 곳을 혼자 조사하겠다고 들어왔네.”
이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밖에서 볼 때도 그랬지만, 일리나를 따라 수림 안으로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헬름 협곡이 크다는 것이다.
산줄기와 강줄기가 만나 만들어진 만큼 규모는 작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산 아래를 따라 걸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작은 언덕이 아니라 제대로 이름 붙은 산이라면 족히 한나절은 투자해야 한다. 그것조차 산 아래 만들어진 편한 길을 따라 걸었을 때의 이야기지, 경사지고 장애물 많은 산 안쪽으로 걸으면 이야기는 또 다르다.
헬름 협곡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보이는 출렁이는 산봉우리만 두 개인 데다, 그조차도 초록의 수림과 높이 자란 나무에 가려 보기 힘들었다. 강이 흐른 자리라 땅의 힘이 좋았던 모양이다.
“이런 곳을 조사할 생각이면 전문가라도 최소 수십 명은 있어야겠는데.”
수십도 최소한으로 잡은 인원이다.
[그것도 모자라요. 저희처럼 실종자를 찾는 거라면 그 열 배는 있어야 한다고요.]
라미아가 말을 더했다.
“흐. 그런 면에서 우린 행운이지. 이렇게 일리나 님이 우릴 보우하시잖니.”
이드가 음흉하게 웃으며 숲길을 찾고 있던 일리나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일리나는 이드의 행동에 빙긋 미소를 띠며 이드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입을 맞추고는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네, 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지금은 방해 말아요. 나중에 귀여워해 줄게요.”
밀려난 이드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자, 라미아가 깔깔거리며 이드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휴~”
쉴라는 마음이 복잡했다.
사람이 모자란다는 이드의 지적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지만 어디 쉽게 털어놓고 하소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저 속으로 삭일 뿐이었다.
‘오직 검후님을 위하여!’
쉴라는 지금도 제국의 곳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을 그 한마디를 되새겼다.
그러자 앞서 가는 이드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이번에는…………?
쉴라는 일리나가 찾아낸 마차 길을 바라보며 희미한 기대와 함께 경계심을 품었다.
분명 이 협곡에는 의심스러운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계와 그 의심스러운 흑막이 어쩌면 검후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지금의 여유만큼 실력이 있기를.’
쉴라가 처음 이드에게 도움을 청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드의 말처럼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사람이 모자라서였다. 그에 더해서 이드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이번 임무를 계기로 상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임무를 시작하자마자 중요한 단서를 잡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쉴라는 내심 기대를 가지고 기묘한 이드 일행을 살피는 한편으로는 카린이 남겼을지 모를 표식을 찾기에 열심이었다.
“일리나, 여기 생각보다 너무 조용한 것 같지 않아요?”
일리나의 말에 따라 얌전히 걷고 있던 이드가 문득 말했다.
“뭐가요?”
“촌장이 그랬잖아요. 협곡에 몬스터가 있어서 오지 못했다고. 협곡 입구까지 모습을 보일 정도면 상당히 많은 수가 살고 있다는 뜻인데, 너무 조용하잖아요.”
“아, 그러고 보면 확실히…………….”
일리나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다듬어진 돌로 만든 마차 길을 발견했기 때문에 어떤 확신을 가지고 따라 들어왔지, 몬스터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몬스터가 살고 있는 숲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깨끗하고, 조용하네요. 보통 몬스터들이 사용하는 길은 크게 티가 나기 마련인데 그런 숲길도 보이지 않아요.”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시온 숲의 주민답게 수상한 점을 척척 집어낸 일리나의 말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뒤따르던 쉴라가 의견을 냈다.
“그렇다면 혹시 몬스터가 가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느 쪽이요? 촌장이요? 아니면 몬스터가요?”
“몬스터 쪽입니다. 공들여 만들어 놓은 이 마차 길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탈랄 마을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가짜를 만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드도 마차 길에 대해서 생각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령을 이용한다면 몬스터의 유무를 알아보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쉴라 경은 여전히 반대하시겠죠?”
이드는 쉴라의 생각을 물었다.
협곡 입구에서 정령을 이용한 수색을 이야기했을 때 쉴라는 반대했다. 정령으로는 카린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정령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접근이 흑막에게 알려진 것을 염려했다. 혹시라도 섣부른 자극이 카린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과연 쉴라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가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요.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존재한다고 해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차라리 소란스럽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흠, 동감합니다. 계속 가 보도록 하죠.”
이드는 쉴라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너무 조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번 일의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쉴라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더 길을 따라 걸었을까. 드디어 마차 길이 끝났다.
이드들이 가야 할 길도 사라지는가 했지만 일리나가 그 속에서 또 다시 작은 숲길을 찾아냈다. 소수의 인원이 가끔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희미한 흔적의 숲길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일리나는 이드와 쉴라를 세워 두고 크게 원을 그리며 주변을 돌았다.
일리나의 눈이 주변의 수목과 돌을 빠르게 살폈다. 마치 레이더가 수십 개의 미사일을 탐지하는 것처럼 한 번에 수십 개의 목표를 살피고 놓기를 반복했다.
엘프 고유의 능력 중 하나인 고속다중인식이다.
고속다중인식 능력은 엘프가 숲의 강자로 있을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힘으로, 엘프는 이 능력을 사용해서 수많은 장애물이 가득한 숲에서도 부딪치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물체에 대한 반응도 빠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엘프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그들의 뛰어난 활 솜씨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솔직히 연약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칙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능력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이 차별은 뭐냐고 신의 멱살을 잡아 봄 직도 하다.
바쁘게 움직이던 일리나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여기에 표식이 있어요.”
표식이라는 말에 쉴라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헬름 협곡에 와서 처음으로 카린이 직접 남긴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쉴라는 일리나가 찾아낸 표식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 경의 표식이 확실합니다. 표식이 누워 있는 방향으로 보아 이쪽에서 와서 저쪽 방향으로 향했군요.”
이드가 보니 쉴라가 세워서 그렸던 표식이 한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표식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르면 카린은 이드가 진입했던 곳과 한참 떨어진 협곡의 산쪽 능선을 따라 진입한 것으로 보였다.
“이 표식으로 카린 경이 협곡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일리나 님이 아니었으면 찾지 못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쉴라의 말대로 숲길을 따라갔다면 보지 못했을 위치였다.
“마차 길이 끝나고 숲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라서 이쯤 이라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행이었죠.”
이드가 입구 쪽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숲길이 아니라 이 표식을 따르도록 하죠. 아무래도 카린 경을 찾는 일이 우선이니까요.”
아무렴 카린이 움직였을 곳을 따라가는 것이 그녀를 찾을 확률이 높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같아서 이드들은 숲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십여 분을 더 걸은 후에 이드들이 만난 것은 세 번째 표식이 아니라 숲길의 주인이었다.
“오크?”
앞서 있었던 몬스터의 실존에 대한 의심에 마침표를 찍어 주는 놈이었다. 다행히 숲길을 벗어나 있던 이드들을 오크는 아직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레이트 오크네요.”
일리나가 일반 오크보다 거대한 덩치의 오크를 보고는 말했다.
“저희들은 회색 오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저렇게 열을 맞춰서 행군하는 오크는 처음 봅니다.”
쉴라는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조금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열 마리의 오크가 나란히 두 줄을 서서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행군하는 오크라니.
…어중간한 기사단보다 발이 잘 맞네요.”
쉴라는 어이없는 웃음을 겨우 집어삼키며 말했다.
[원해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걸요? 눈동자가 사라지고 눈이 하얀색이에요.]
쉴라는 라미아에게 좀 더 설명을 요구했다.
[백안(白眼)에 마력이 흐르고 있어요. 정신을 제압당했다는 말이죠.]
“즉, 조종당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오크들이 단체로 눈병에 걸린 게 아니라면요.]
확실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오크들은 무식하지만 의리가 있다. 아픈 동족을 일하라고 내보낼 정도로 싸가지 없지는 않다.
가만 보면 오크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무기도 너무 깨끗하고 손질이 잘되어 있었다. 오크 중에도 대장장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후 관리에 관해서는 형편없는 편이다.
그런데 지금 오크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반짝반짝 광이 났다.
무기를 든 오크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숲길을 따라 협곡 입구를 향해 지나갔다.
“촌장이 말한 몬스터가 저놈들이군요.”
전투용보다는 위협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좀 더 안쪽으로 돌아서 들어가죠. 조심스럽게. 몬스터를 저렇게 번듯하게 입혀서 조종할 정도면 어중간한 놈들은 아닐 것 같으니까요.” 이드의 말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표식을 확인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중간에 멈춘 듯 서 있는 그레이트 오크들을 두 번 더 볼 수 있었다. 마치 경계를 서고 있는 보초병 같은 오크들의 눈도 눈동자가 사라지고 하얀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드들은 그들을 피해서 크게 돌아 움직여야 했다.
그레이트 오크 열 마리야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들을 처리함으로 인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주의하지 않을 없었던 것이다.
굽이치는 협곡을 따라 두 번 더 크게 돌았을 때였다.
멈칫!
앞으로 나가던 이드는 저 멀리 보이는 광경에 발을 멈춰야 했다.
오크가 서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앞서는 열 마리씩 서 있던 것과 달리 서른 마리의 오크가 있다는 점이 달랐다.
그리고 그 앞에 그레이트 오크보다 세 배 이상 거대한 몸집의 트롤이 서 있다는 점도 달랐다. 특히 그 커다란 트롤의 몸체를 꼼꼼히 둘러싸고 있는 백퍼센트 수제인 풀 플레이트를 생각하면 수상함이 폭발할 지경이다.
“흑마법사?”
이드는 영웅 동화 속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당의 직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요? 트롤도 눈이 오크들처럼 백색이에요.]
라미아가 애매하게 답했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봐서는 흑마법사의 전형적인 레퍼토리지만 몬스터의 눈에서 흑마력을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좀 더 멀리 돌아가도록 하죠.”
쉴라가 신중하기를 원했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스러운 곳은 일단 조심하는 게 좋다. 돌다리도 두들기라는 말이 괜히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도록 하죠. 저놈이 허락만 해 준다면 말이죠.”
“크르르르륵—”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갑옷 입은 트롤의 고개가 정확히 이드가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그 입에서는 거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침 좀 닦지. 드러.]
지금 침이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