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36화
573화
이드는 천천히 2층에 올랐다.
혹시나 하던 기습 공격은 없었다. 대신 이미 죽었거나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피를 토하는 하인들과 마법기사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앞서 정령에게 실어 보낸 백린을 들이마신 듯 보였다.
그러나 그들 이외에는 그들을 돌보는 사람도, 경계를 서는 사람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올라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2층엔 중요할 게 없어서 그래. 네가 뿌린 독을 피해서 위층으로 도망쳤을 거다. 제대로 환자를 볼 만한 시설도 위층에 있거든.”
“그럼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왜 안 챙겨 간 거야?”
“가망이 없어 보였겠지. 네가 쓴 그 이상한 물질은 마법으로도 해독이 안 되잖아. 당연히 증상이 가벼운 놈들만 챙겨 간 거야. 저런 놈들은 버린 거지. 그리고 내 장담하는데, 챙긴 놈들도 고치는 것보다는 네가 쓴 물질의 연구를 위해서 데려갔을 거야. 그리고 말 나온 김에 그 희한한 독 나도 좀 줘라. 연구하면 기똥찬 게 나올 것 같은데.”
이드는 마지막 말은 듣지 못한 척하고 얼굴을 구겼다. 지금 상황을 만들어 낸 공격자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치료가 아니라 연구를 위해 데려갔다니…………….
“참, 대단한 연구욕이다.”
“흐흐흐, 아무렴. 대단하지. 그런 욕심들이 없고서야, 새로운 마법을 만든다고 감히 달려들 수 없는 일이지.”
“칭찬 아니거든?”
이드는 썩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법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그저 좋아 허허거리는 비올라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고 즐기는 데에도 정도가 있는데, 그는 분명 그 정도가 평균을 훌쩍 넘은 것으로 보였다.
이드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살피다가 지력으로 사혈을 눌러 고통을 끊어 주고는 말했다.
“2층에 살펴야 할 게 없으면, 바로 3층으로 올라가면 되나?”
“그래.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저쪽에 있다.”
이드는 그 말에 그를 앞장세웠다. 그때 일리나가 이드의 팔을 붙잡았다.
“나뉘어졌던 로이콘이 4층에서 모두 소환 해제 당했어요.”
“수고했어요. 일리나는 괜찮아요?”
이드가 물었다. 정령의 강제 소환 해제는 소환자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일리나가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무렇지 않아요. 그보다 로이콘이 소환 해제 되기 전에 전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3층에 적지 않은 기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4층에는 강력한 마법 전력이 있고요. 또 여기 2층에도 마법사 외의 사람들이 있었어요. 제 생각엔 납치되어 온 사람들이 아닌가 싶어요.”
“납치.”
이드는 납치라는 단어를 따라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기분이 나빠졌다. 앞서 1층에서 다시 봤던 트롤에 붙어 있던 사람들. “2층에 정말 납치된 사람들이 있는 거냐? 여기엔 별거 없다면서?”
이드는 비올라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하마터면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들을 땅에 묻어 버릴 뻔했다.
“그게 뭐?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잖아.”
비올라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잡혀 있는 사람들이 왜 중요한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게 왜 중요한 일이 아니야!”
퍽!
비올라의 태연한 대답에 분노한 이드가 그를 차올렸다. 비올라가 요란하게 사방에 튕기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엎어졌다. 화가 난 중에도 비올라가 튕겨 나갈 궤도를 순간적으로 머릿속으로 그린 것이다.
“네가 이 마굴에서 사람을 실험동물로 쓰다 보니 사람이 아주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구나. 쯧, 처음부터 이런 놈하고 뭔가를 해 볼 생각을 했던 게 잘못이지.”
이드는 순간 이 자리에서 눈동자를 부숴 버리고 비올라와 갈라서야 할까 고민했다.
그때 비올라가 몸을 일으키며 화를 냈다.
“이 빌어먹을 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 몸에게 발길질을 해? 미쳤냐! 죽고 싶은 거야?”
“미친 건 네놈이지.”
이드가 차갑게 말했다.
“멍청한 놈. 도대체 협력 관계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래서 무식한 무투파와는 말을 하지 않는 건데..
비올라는 한동안 씩씩거리다가 말했다.
“좋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내가 이번까지는 봐준다. 하지만 딱 이번까지다. 흐………… 생각해 보니 내가 실수한 것도 있구나. 너희처럼 평범한 인간은 같은 인간의 목숨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깜빡하고 있었다.”
[어머나~ 기막혀라. 자기는 인간이 아닌가 봐?]
라미아가 비꼬았다.
하지만 비올라는 그 말에도 웃어 보였다. 라미아의 말과 행동은 뭐가 되었든 그저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인간이지. 하지만 평범한 인간은 아니야. 천재거든. 탑주를 뛰어넘을 천재. 나 같은 천재의 눈에는 인간이나 몬스터나 똑같아 보인다. 지금부터는 그 점을 계산해서 말하도록 하지. 그리고 너희들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나는 아직 너희들이 말하는 ‘초인기 전이 실험을 직접 해 본 적이 없다. 실험 결과는 꾸준히 받아 봤지만, 탑주의 흔적을 수습하는 데 바빠 직접 실험에 참가할 정신이 없었지. 뭐, 실험 결과를 보고 리포트는 썼지만.”
“……”
이드는 기가 막혀 입만 딱 벌렸다.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어야 저런 말이 나올까. 가히 자기애와 자만과 오만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 뒤에야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지만 협력하기로 한 미친 마법사가 직접 인체 실험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하니 마음이 편했다. 뭐, 깊이 따지고 들면 그걸 방관한 놈도 똑같은 놈이기는 하지만 마음이란 게 또 달랐다.
“이 미친놈과 진짜 같이해도 되는 거야?”
이드는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당장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가 필요했다.
이드는 비올라를 재촉해서 납치된 사람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비올라는 시간 계획이 어그러진다고 투덜댔지만 반항하지 않고 안내했다. 자신의 말대로 이드들을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 같았다.
정말 말과 행동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드문 인간이었다.
다만 그 말과 행동과 생각이 철저하게 삐뚤어진 것이 문제일 뿐이다. 길을 안내하며 비올라는 생명의 관에 대해서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
그는 생명의 관을 미완성의 마탑이라고 불렀다.
‘마탑? 그래서 여기 대장을 관주가 아니라 탑주라고 부르는 건가?”
이드가 보기에 이 생명의 관은 마탑이 아니라 그냥 괴물들이 사는 던전 같아 보였다.
비올라의 말에 따르면 여기 2층은 실험 재료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일반적인 실험 재료가 아니라 ‘초인기 전이’를 위한 실험체다. 바로 초인과 초인기를 이식받기 위한 재료인 트롤이었다.
하지만 트롤까지 구해 줄 생각은 없었다.
비올라를 따라간 곳에는 단단한 문이 있었다. 이드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스물다섯 명의 남녀가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깨어 있으면 소리치고 살려 달라고 시끄러워서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재워 두거든. 하지만 실험을 위해서는 건강해야 해서 관리는 잘돼 있다고.”
비올라가 끔찍한 소리를 잘도 했다. 하지만 그 말대로, 사람들은 납치당해 갇혀 있었으면서도 모두 살이 오르고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이후 이들에게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그게 더 잔혹한 일이었다.
그때 가만히 사람들을 살펴본 쉴라가 황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을 어디서 데려온 거죠?”
실로 제국의 치안력에 대한 회의가 드는 순간이었다.
“글쎄. 나도 이쪽은 관심이 없어서 잘 몰라. 보급선이 있다는 정도만 알지.”
쉴라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람만 스물다섯이지, 그동안 희생된 사람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을까.
그것도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라, 크고 작고를 떠나서 초인기를 가진 초인들이었다. 무조건 각성만 하면 나라에서 관리하는 초인이 이렇게 많이 실종되었는데 아무런 소문이 돌지 않았다니.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 내부에 이에 협조하는 자가 있거나, 제국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었다.
‘아아………… 검후님,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만 실종된 검후가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비올라는 이드가 잠든 사람들을 모두 살핀 듯하자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데? 설마 이것들을 데리고 다닐 생각은 아니겠지?”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드는 이럴 때면 언제나 나타나서 해결해 주는 만능 해결사,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들 모두 밖으로 옮길 수 있을까?”
그러나 라미아도 이번엔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
[공간 이동 마법으로는 어려울 것 같고, 아무래도 내가 직접 데리고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대신 돌아올 때는 이드가 불러 주면 바로 돌아올 수 있어요.]
“어쩔 수 없지. 조금 수고해 줘.”
이드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두었다가 상층에서의 전투로 천장이라도 무너지면 그대로 끝이었다. 특히 대화력을 뿜어내는 마법사가 상대라면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혹시 놓친 사람이 있을까 재삼 확인한 후에 라미아는 잠든 사람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괜히 깨워 봤자 시끄럽기만 하다는 이유로 깨우지는 않았다. 라미아는 사람들을 공중에 띄운 후에 그녀의 꽁지 뒤로 일렬로 세웠다. 그 모습이 마치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 같아 보였다.
[헬름 협곡을 나가서 안전할 만한 곳에 내려두고 올게요. 일리나와 쉴라도 조심해요.]
“나는?”
[이드는 두 사람이 다치지 않게 신경 써요.]
자신의 이름이 빠져 섭섭함을 표하는 이드에게 툭 쏘아 준 라미아가 날개를 넓게 펴고 날아올랐다. 그 뒤를 줄줄이 사람들이 따라 나가더니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드들이 들어오고 닫혀 버린 출입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드가 다시 3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서 말했다.
“아, 그리고 올라가기 전에 한 가지. 카린 경을 살려준 마법기사가 있다고 했었지?”
그 말에 일리나와 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위에 없으니까.”
“지금 3층에 있나?”
저런 확신은 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드가 물었다.
“흐흐흐..아니. 하지만 그 마법기사는 3층에 없어. 1층에 있지. 네가 집어던진 그 하얀 가루를 뒤집어쓰고 말이야. 즉, 카린이라는 기사가 있는 곳은 나밖에 모른다는 말이지.”
마치 인질을 잡은 협박과도 같은 그 말에 쉴라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드는 그 모습에 작게 혀를 차고 말했다.
“네 말대로 서로 존중하자고.”
“그래, 존중, 좋지. 우선 4층에 가면 말해 주마.”
“좋아, 4층에서 듣자. 그럼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라미아가 돌아오기 전에 3층을 정리하죠.”
이드는 말을 마치고 한걸음에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통로의 어둡던 시야가 밝아지며 그 공간을 교묘히 포위하고 있는 마법기사들의 모습이 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이드와 마법기사들의 눈빛이 부딪치고 그들의 무기가 움찔하는 순간.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마법기사들의 위치를 파악한 이드의 공격이 허공을 붉게 수놓았다.
“난화십이식(亂花式) 화령인(花靈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