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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44화


581화

“….!”

이드와 헤어져 4층으로 달려온 쉴라가 본 것은 불타고 있는 마법사들의 시신 수십 구였다.

불꽃이 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사방에 검은 재가 날렸다. 타고 있는 시신을 제외한 모든 물건은 이미 재가 된 후였다.

따닥따닥.

마법사들의 몸이 모두 타고 마지막 남은 뼈가 불에 타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와우, 화력이 좋은가 봐요. 깨끗하게 탔네요.]

라미아가 이상한 부분에서 감탄했다. 그 말대로, 마지막으로 타고 있는 뼈를 제외하고 책상을 비롯한 실험 기구가 있던 자리에는 검게 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검은 흔적조차 태워 버린 것 같았다.

“증거 인멸이겠지?”

[그렇다고 생각해요. 마법의 불이 실화(火)로 생길 수는 없죠.]

“즉, 우리를 몰래 감시하는 놈이 있다는 거지?”

라미아의 대답에 쉴라가 굳은 얼굴로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마법 전문도 아닌 그녀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마법이라면 검후를 수호하는 데 필요한 공격 마법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에 발각될 정도의 허술한 마법이었으면 라미아와 일리나가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드와 같이 있었을 때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없어요. 지금 막 확인했어요. 그리고 정말 몰래 훔쳐보고 있었는지 정확한 건 아니에요.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한 마법일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쉴라는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지켜보고 있었다면 부관주겠지?”

[가능성은 높죠. 그가 지켜보고 있다가 마법의 불을 일으켰다면 아래층도 불에 타고 있을지 몰라요. 포로들도.]

“그렇겠지.”

쉴라가 폼멜을 쓰다듬으며 동의했다. 1층에 제압된 포로들을 태우는 것은 시체를 태우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명의 관 밖에 내어놓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미아는 그 모습을 보고 좀 더 서비스해 주기로 마음먹고 말했다.

[확인해 보고 올까요?]

“아니. 불길이 같이 시작되었다면 이미 다 죽었을 거야. 무엇보다 그럴 시간도 없어. 진짜 그런 불이라면 카린이 숨어 있는 곳에도 불이 시작되었을지 모르니까. 포로는 포기한다.”

쉴라는 포로보다는 카린의 구출을 우선순위에 두고 움직였다.

그리고 쉴라가 발을 내디디는 순간.

[아, 잠깐만.]

화륵!

라미아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4층 바닥을 디딘 쉴라의 신발에 뜨거운 불이 작게 피어났다. 4층의 집기와 마법사들을 태우고 있는 그 불이었다. 

“흥!”

갑작스러운 불이었지만 쉴라는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내력이 담긴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발끝에서 시작된 나선형의 경력이 회오리쳤다.

난폭한 힘의 폭발에 쉴라의 신발에 생겨난 불은 파라락 하고 산산조각 나며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쉴라의 신발이 상했지만 그녀의 발은 멀쩡했다.

그 모습에 라미아가 안도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먼저 말했어야 하는데. 마법의 불이 4층에 있는 모든 것을 태우고 있어요. 이미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것도요.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바로 마법의 불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제거할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 이런 작은 불로는 은색 기사단의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이 불이 전신에 생겨나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만 평범한 불이 아니라 마법의 불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전신으로 번질 거예요. 평범한 방법으로는 못 꺼요.]

“그럼 전혀 문제없어!”

쉴라가 오만하게 말했다. 그녀가 비록 생명의 관에서 이드에게 주도권을 내주기는 했지만, 소드 팰러스의 오색 기사단 중 한 곳의 단장이었다. 충분히 오만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콰르륵!

나선의 경력을 두른 쉴라가 4층에 발을 디디고 거침없이 달렸다.

마법의 불은 피어나는 순간 찢겨져 붉게 휘날리며 쉴라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이 마치 불길을 달리는 로드러너 같았다.


비올라가 말한 쓰레기 통로는 실험체가 들어 있는 유리관 옆에 있었다. 통로를 타고 올라오는 악취에 평소에는 닫아 두고 필요할 때만 열어서 사용한단다.

불길을 가로지른 쉴라가 레버를 조작하자 벽면 일부가 앞으로 기울어지며 통로가 생겨났다.

사람 네다섯은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을 크기였는데, 실험에 사용되는 트롤의 사이즈에 맞춘 것 같았다.

검은 통로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역한 악취가 올라왔다.

통로를 타고 오르면 약해진 냄새일 텐데도 코끝이 시큰해질 만큼 독했다. 하지만 쉴라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부하인 카린이 이 악취 속에서 며칠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니, 고작 냄새를 가지고 투정을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옆에 있는 라미아가 내심 냄새를 맡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에 안심하고 있었던 것은 살짝 비밀이다.

라미아는 쉴라가 비스듬히 열린 벽에 올라앉자 그녀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라이트 마법으로 쉴라의 발아래 통로를 밝혔다.

준비가 끝나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 쉴라가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미끄러져 내리고 그 뒤를 라미아가 바싹 따라붙었다. 직선으로 보이던 쓰레기 통로는 중간에 두 번 꺾여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직선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쉴라와 라미아가 쓰레기 통로의 끝에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음 순간 등 뒤를 받치던 통로가 사라지고 몸이 허공에 뜨자 쉴라는 중심을 아래에 두고 몸을 긴장시켜 착지했다.

철벅!

그런데 발아래로 단단한 땅도 아니고 갯벌의 진흙 같지만, 그것보다는 질척이고 묽어 이상하게 물컹이는 땅이 밟혔다. 이곳의 용도를 알고 있는 쉴라는 감히 그 정체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라이트에 비쳐진 땅은 잘 썩어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코뿐만 아니라 눈이 괴로운 상황은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다행히 불타지는 않았지만 악취가 정말 심하군.”

폐기장 안의 냄새는 통로 위로 올라온 냄새와는 차원이 달랐다. 숨을 쉬는 순간 어질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라미아가 쉴라에게 디클리어리 에어 마법으로 깨끗한 공기 주머니를 만들어 주며 말했다.

[단순한 악취는 아니에요. 강력하지는 않지만 시독이 섞여 있어서 대책 없이 오래 있다간 중독될 거예요.]

“내공을 가진 기사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카린 경이 잘 견디고 있을지 모르겠군.”

[이곳에 숨긴 기사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게 아니라도 쉴라 경 말처럼 부상만 없다면 내공의 운용으로 잘 견디고 있을 거예요.] 

“그래야지. 일단 여길 좀 더 밝혀 주겠어? 이렇게 어두워서는 우리가 카린 경을 찾는 것도 어렵고, 그녀가 우릴 찾는 것도 쉽지 않아.”

[알았어요.]

라미아는 쉴라의 요청에 따라 라이트 마법을 증폭시켰다. 세 개의 빛덩이가 천장 가까이 솟아올라 빠르게 회전하며 밝기를 더하더니 엔젤링처럼 변하면서 폐기장을 밝혔다.

밝은 빛 아래 드러난 폐기장은 넓고 거칠고 울퉁불퉁했다. 폐기장의 목적이 그래서인지 땅속을 되는 대로 대충 파내고 만든 때문에 빛이 내리는데도 어둡게 그림자 진 곳이 많았다. 무엇보다 빛 아래 드러난 벽면에 간간이 붙어 있거나 걸려 있는 사람과 트롤의 팔다리가 지옥과 같은 흉흉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더구나 바닥에 반쯤 묻혀 썩어 가고 있는 몇 구의 시체는 쉴라의 발가락을 꼬물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이 방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이 대략 눈에 익자 쉴라와 라미아가 카린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히 숨을 만한 공간도 없는 주변에 카린의 흔적은 없었다.

[여긴 없는 것 같으니 좀 더 들어가 봐요. 카린 경이 우리가 지나온 쓰레기 통로를 통해 들어온 건 아니니까, 어쩌면 다른 곳에 있는 폐기장 출입구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 천천히 이동하자.”

두 사람은 주변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천천히 이동했다.

라미아는 공중에서, 쉴라는 아래에서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시야에 벗어나는 곳은 없었다. 폐기장의 천정이 상당히 높고 벽이 울퉁불퉁해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라미아가 아니었다면 수색에 상당히 애를 먹었을 만한 지형이었다.

천천히 수색하며 이동한 끝에 폐기장이 둥글게 넓어지며 그 앞쪽으로 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폐기장의 끝이었다. 처음 떨어진 곳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엄청난 크기였다.

이 미친 마법사 놈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일 생각이었던 걸까!

반대편 벽을 보며 쉴라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카린 경은 저기 있겠군.”

쉴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녀는 넓은 폐기장을 그대로 가로질러 특히나 울퉁불퉁한 벽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바닥에 땅을 디디지 않고 편히 쉬기 위해서는 울퉁불퉁한 벽면의 홈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요건에 따라 카린을 먼저 찾은 것은 라미아였다.

[찾았어요, 쉴라 경. 이쪽이에요.]

라미아는 바닥에서 3미터 위쪽으로 유난히 돌출된 돌 위에 날아 내렸다.

그 위에는 오물이 묻어 검은 딱지가 덩어리진 여기사가 널브러져 있었다. 쉴라가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은색 갑옷과 손잡이만 남은 검을 봐서는 카린이라고 짐작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제외하고 이 폐기장에 있을 여기사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를 이곳에 숨긴 기사가 크든 작든 도와줬을 거라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찢긴 옷에 한쪽 가슴이 그대로 드러난 데다 한쪽 다리와 팔이 허벅지와 어깨까지 뜯겨 나가 있었고, 반대쪽 다리도 발목에서 잘려 있었다. 잘린 부위는 칼이 아니라 야수에게 잡아 뜯긴 듯 거칠었는데, 이미 상당히 시간이 지난 듯 피딱지와 고름이 흘러내리며 썩어 가고 있었다. 폐기장의 독한 환경에 상태가 더욱 좋지 않은 듯 보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뜬 듯 감은 듯 반쯤 열려 있는 카린의 눈동자가 죽어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라미아가 소리를 내서 쉴라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덜컥!

그때 라미아의 목소리를 듣고 한 번의 도약으로 뛰어온 쉴라가 카린의 처참한 모습을 확인하고는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무심한 듯 애처로운 눈으로 카린의 옆에 앉은 쉴라는 들고 있던 방패와 검을 옆에 내려 두고 물 묻은 손수건을 꺼내 카린의 얼굴과 가슴과 손을 닦아 주고는 살그머니 그녀를 품에 안아 주었다.

“무사해서 기쁘다. 수고했다. 카린 경.”

마음속 깊게 가라앉는 쉴라의 목소리에 미미하게 카린의 얼굴이 움직인 듯했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시 카린을 바닥에 눕힌 쉴라는 뜬 듯 만 듯한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직전까지 마지막 정신을 놓지 못한 듯 보이던 카린의 눈이 쉴라의 손에 안심한 듯 감겼다. 마지막으로 카린의 손에 있던 손잡이만 남은 검까지 챙긴 쉴라가 등을 돌려 크게 숨을 쉬고는 라미아를 찾았다.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고 싶지만 그건 힘들 것 같고, 네 선에서 치료가 가능할까?”

[가능해요. 하지만 추천하지 않아요. 어떻게 당했는지 영혼에까지 손상을 받은 것 같아요. 이런 경우 신전의 치료를 받는 게 가장 좋아요. 제 판단으로는 일단 고통을 없애고, 응급 조치를 취하는 정도가 좋을 것 같아요.]

“그럼 그렇게 해 줘. 부탁할게.”

[맡겨 주세요.]

쉴라는 라미아의 의견에 그녀에게 사과를 할 때처럼 정중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꾸르르르륵-

라미아가 막 치료를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그들의 아래쪽에서 거품이 부글거리며 검은 진흙이 불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공주를 납치한 괴수의 등장인가 본데요.]

카린 옆에서 그 모양을 보고 라미아가 차갑게 말했다.

놈은 카린을 제외하고 폐기장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 카린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을 확률이 가장 높은 범인이었다.

“다행이네. 공주를 납치한 괴수가 없었으면 분해서 어쩌나 걱정했는데 말이야. 치료를 부탁할게.”

쉴라는 라미아의 말에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내려 두었던 방패와 검을 들었다.

덤덤한 모습을 보였지만 처참한 카린의 모습에 그녀의 속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 그 갑갑하던 속을 풀 상대가 나타났으니 오히려 반가웠다.

“자, 괴수가 공주를 납치했으니, 이제 괴수를 처치하고 공수를 구할 턴이지? 복수의 시간이다. 철저하게 부숴 주마! 하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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