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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53화


590화

앞서 잠깐 떠오른 패였지만, 선뜻 꺼내기가 마땅치 않았다.

“꺼냈다가는 분명히 무너질 텐데………….”

거대한 힘의 충돌일수록 그 여파는 크다. 12대식으로 녹색홀을 제압하면 필연적으로 힘의 충돌이 발생하고, 그 충돌은 연구실을 흔들어 무너트리고 말 것이다. 저 멀리 떨어진 바닷속에서 발생한 지진에 해일이 일어나 마을 덮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이 연구실에 미련 같은 건 없다.

이드 자신이 살던 곳도 아니고, 그가 봤을 때 이곳은 불태워 흔적조차 지워 버려야 할 악마의 똥통 같은 곳이다.

그러나 미련이 남는 사람도 있기 마련.

슬쩍 돌아본 이드의 시선에 비올라가 기다렸다는 듯 클레임을 걸었다.

“무슨 말이야. 뭐가 무너진다고? 설마 여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존댓말!”

“아, 씨. 지금 그게 문제예요? 여길 부수겠다고요?”

“왜, 미련이라도 남아?”

비올라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표정으로 녹색홀 안의 바이트 타블렛을 가리켜 보였다.

“줄줄 흘러넘치죠. 저거 없이는 여긴 절대 못 부숴요. 하려거든 나부터 죽이고 부숴요!”

생떼도 어지간하다. 누워 있는 김에 배 째라고 옷이라도 걷을 기세다.

“이드, 라미아 쪽은 어때요? 이곳을 무너트리더라도 카린 경을 찾은 후에 해야 할 테고, 저 녹색홀도 일단은 마법이니 그녀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일리나가 흡입력에 휘말리는 머리카락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시간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이대로 흡입력이 점점 강해지면 일리나도 바로 서 있기 힘들 것 같았다.

이드는 머리카락이 날리는 일리나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호신강기를 둘렀다. 황금빛 강기에 흡입력이 사라지자 비올라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털었다.

“쯧, 할 거면 빨리 좀 해 주지…….”

하려면 자신의 마법으로도 할 수 있는 놈의 배부른 투정이다.

“넌 저 녹색홀이 뭔지 모르냐?”

“저게 뭔지 알면 바이트 타블렛을 노릴 이유도 없지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표정에 이드가 질문의 방향을 바꿔 물었다.

“해결 방법도 몰라?”

“그건 경우가 다르지요. 충분한 시간과 자금만 있다면 풀지 못할 마법은 없지요. 맨땅에 헤딩하는 거라면 몰라도, 저렇게 실체가 있으면 해석해 볼 수도 있으니까요.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렇지.”

“얼마나?”

눈알을 한 바퀴 굴린 비올라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열과 성의를 다해서 삼 년! 나 같은 천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속도죠.”

쿵!

흡입력에 흔들리던 연구실의 벽 일부가 앞으로 쓰러졌다. 이드가 그 모습을 힐끔 보고 말했다.

“열과 성의를 다해서 저 아래 처박아 버리기 전에, 조용히 닥치고 있어라.”

헛소리도 상황을 봐 가며 해야지!

이드는 입이 툭 튀어나오는 비올라를 치우고 일리나의 말대로 라미아를 부르기 위해 가슴속에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막 그녀를 부르려는 순간,

[이드, 그쪽에서 어마어마한 흡입력이 마나를 끌어당기고 있는데, 무슨 일이에요?]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스 타이밍~”

이드는 무의식적으로 엄지를 척하니 들어 보였다. 그 행동에 비올라가 미친놈 보듯 그를 바라봤지만 무시하고 라미아에게 답했다.

“여긴 지금 좀 어려운 일이 있어서 말이야, 아무래도 네 마법 지식이 필요할 것 같아. 카린 경은 찾았어?”

[찾았어요. 응급조치를 했지만,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아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쉴라 경의 걱정이 크겠네. 바로 이쪽으로 와 줄래? 여기 심상치 않은 물건이 있는데, 그게 아무래도………….”

[잠깐만요.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보고 해요.]

라미아가 이드의 말을 막고 말했다. 동시에 이드의 마음속에 라미아의 형상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공간이 열리고, 라미아가 쉴라와 카린을 데리고 이드 앞에 나타났다.

[이드, 일리나, 저 돌아왔어요.]

라미아가 반갑다는 듯 날개를 푸득거렸다. 그녀는 곧바로 이드를 향해 날갯짓했지만 그 앞을 귀신처럼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야!]

휘둥그레진 눈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비올라였다. 그는 잡을 수 없는 라미아 대신 허공을 연신 부여잡으며 말했다.

“헉! 헉! 이, 이 공간 파동은 뭐니? 이건 단순히 텔레포트 마법이 아닌데, 이건 뭐니? 도대체 이 작은 몸 안에 어떤 마법의 정수가 들어 있기에 내가 파악할 수 없는 마법………… 읍!”

주절거리던 비올라의 입이 이드의 손에 막혔다.

이드는 그대로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모르는 마법 많거든? 당장 해결해야 하는 폭탄을 두고 삼 년을 부르는 놈이.”

“읍읍흡, 읍읍!”

이드는 자신의 말에 불만이 많은 듯 웅얼거리는 비올라의 눈을 살벌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조용히 하고 있어라. 아니면, 연구실하고 같이 묻어 버린다.”

농담 같지 않은 살벌한 발언에 비올라가 숨을 멈췄다.

“……”

순간 그의 머릿속에 연구나 생명이냐가 우선순위를 두고 다투었지만, 결국 살아 있어야 연구가 가능하다는 결론과 함께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한쪽에 쭈그러졌다.

그렇게 비올라를 조용하게 만든 이드가 라미아와 쉴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두 사람은 일리나에게 사건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큰일이 있었군요.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쉴라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쉴라 경도 그다지 편해 보이지는 않는걸요.”

일리나가 쉴라를 보며 말하고는 그녀가 업고 있는 카린을 살폈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던 일리나가 말했다.

“이분이 카린 경인가요? 강한 분 같은데 영혼에 강한 충격을 받았군요.”

“놀랍습니다. 라미아도 같은 진단을 했는데, 알아보시는군요.”

당연했다. 귀를 감추고 있지만 일리나는 엘프다. 엘프는 인간보다 영적으로 좀 더 예민하고, 눈이 트여 있었다.

일리나가 이드에게 작게 속삭였다.

“제가 카린 경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하면 되는 일인데?’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는 일을 묻는다는 것은 그 행동이 이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이라면 아마도 그녀가 엘프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었다.

“엘프만 할 수 있는 도움인가요?”

“네, 엘프가 할 수 있는 요정의 축복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생각대로의 대답이다.

“그럼 도와야죠. 앞으로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닌데 미리 밝혀 두는 편이 일리나가 활동하는 데도 편할 테구요.”

이드의 허락을 받은 일리나가 쉴라를 불렀다.

“쉴라 경, 제가 작지만 카린 경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입니까?”

쉴라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움이 떠올랐다.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도 놀랍지만, 영혼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기는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 일리나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 일의 해결이 먼저가 아닐까요?”

아끼는 부하의 상태가 걱정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눈앞의 녹색홀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 쉴라가 말했다.

“괜찮아요. 저건 이드와 라미아가 해결해 줄 테니까. 그리고 제가 카린 경을 돕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랍니다.”

가볍게 미소로 답하는 일리나의 얼굴에는 편안한 믿음이 가득했다.

일리나가 카린 곁으로 다가왔다. 쉴라가 카린을 땅에 내리려 하는 것을 말린 일리나는 카린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그녀의 귀에 엘프어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사르락, 사르륵.

그것은 단순히 언어가 아니라 신께 올리는 기도 같기도 하고, 즐거운 노래 같기도 했다. 그녀의 말을 따라 바람이 부드럽게 카린을 감싸고, 일리나의 주변으로 기분 좋은 숲의 향기가 퍼져 나갔다. 일리나가 카린의 이마와 볼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에 머물던 숲의 향기가 그녀의 입술이 머물렀던 자리로 모여들었다.

“끝났어요. 아파하는 카린 경의 영혼에 작은 위로가 될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마법과는 다른 신비가 담긴 언어와 현상에 놀라 살짝 입을 벌리고 있던 쉴라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이드의 협박에 조용히 녹색홀을 관찰하고 있던 비올라가 떡 벌어진 입으로 놀라움을 표했다.

“엘프어에 숲 요정의 축복? 설마, 저 여자 엘프였어?”

동시에 비올라의 시선이 이드를 향해 돌아갔다. 그 얼굴에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부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헐! 그럼 당신은 엘프를 아내로 둔 거야? 세상에 도대체 무슨 수로!”

타 종족이 엘프의 사랑을 받는 일이 얼마나 드문 일인데.

이드는 비올라의 반응에 자랑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어쩐지 대단한 무공을 가졌다는 말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어깨에 구름이 든 듯 우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라미아가 돌아오고, 일리나가 카린을 축복하는 짧은 시간에도 흡입력은 더욱 강해졌다.

연구실은 점점 진공으로 변해 가고 흡입력을 이기지 못한 벽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면서 크고 작은 돌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지만, 바닥을 구르는 돌은 하나도 없었다. 떨어진 돌도, 떨어지는 돌도 모두 녹색홀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것이.

그렇게 많은 흙과 돌, 그리고 연구실의 물품을 모조리 먹어 치운 녹색홀 안에 그 물건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제 덩치를 몇 번은 다 채웠을 양을 먹어 치웠는데도 말이다. 그러고는 오히려 더 배고프다는 듯 흡입력만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어때? 좀 알겠어?”

일리나의 이야기를 듣고 호신강기 밖으로 나가 녹색홀을 살핀 라미아가 돌아왔다.

“모르겠어요. 일단 발현된 현상은 블랙홀을 모델로 한 그래비티 홀의 변형 마법인데, 정작 제가 확인한 마력의 결합과 법칙은 제가 알고 있는 마법과 전혀 달라요.”

“해결 방법은? 자칭 천재께서는 삼 년 걸린다는데.”

“윽!”

“연구를 통해서 절차대로 마법을 취소하려면 그렇죠. 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상호 작용을 유도하면 좀 더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해요. 하지만 아무리 저라도 그렇게 하자면 수 시간이 걸리는데, 그 정도 시간은 없죠.”

“그럼 ・・・・・・ “

“방법 없죠. 부숴야죠.”

“역시 그렇지?”

역시 복잡한 상황의 답은 역으로 간단하기만 하다. 너무 복잡하게 꼬인 낚싯줄은 잘라 버려야 한다.

그때 한쪽에서 안절부절 중인 비올라가 보였다.

이드가 말했다.

“그런데 저 안에 있는 바이트 타블렛은? 아무래도 같이 부숴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충분히 손쓸 수 있어요. 마력 결합은 다르지만 발현 분류는 같기 때문에 제가 녹색홀을 중심으로 중력 역전을 사용하면 공간 분리 현상이 일어날 거예요.”

“간단히!”

“제 신호에 맞춰서 녹색홀을 부수면 작은 틈이 생기니까 그때 그 바이트 타블렛이라는 걸 끄집어내면 될 거에요.”

“간단하네.”

이드는 서둘렀다.

라미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 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연구실을 채운 균열은 성인 남성의 다리가 들락거릴 정도로 커지고, 땅의 흔들림도 심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녹색홀을 파괴하는 충격이 아니라, 녹색홀의 흡입력에 생명의 관이 먼저 무너질 판이다.

바이트 타블렛의 확보를 목표로 한 이드는 라미아에게 나머지 사람들을 맡겼다.

생명의 관이 무너지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산사태같이 무너지는 땅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녀의 마법이 필수였다. 생각 같아서는 일행을 먼저 안전하게 생명의 관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차원 진동에 녹색홀이 공간과 마나를 빨아들고 있어서 공간 이동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나마 녹색홀이 사라진 후라면 생명의 관을 벗어나는 단거리 이동 마법은 부담 없이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 라미아의 진단이었다.

“리버스 그래비티 필드!”

구구구국─

둥실.

녹색홀을 중심으로 라미아의 마법이 사용되자, 강력한 흡입력이 중력 평형으로 멈추고 무수히 떨어져 내리던 돌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짧은 순간 무중력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드는 중력에 흔들리지 않았다. 곧 무한한 공력이 움직이고, 이드의 전신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지며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광인멸혼류(光刃滅魂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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