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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55화


592화

[무슨 손님이 하늘을 날아와요?]

“그러게. 근데 우리 손님인지는 모르겠다?”

와이번을 탄 용기사라니. 이곳까지 이드를 찾아올 사람이 없기도 하지만, 애초에 용기사와도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쉴라의 은색 기사단에도 용기사는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이드도 쉴라도 아니라면 생명의 관과 연관된 사람은 아닐까?

이드는 고개를 돌려 비올라를 찾았다.

그는 한쪽 바닥에 고개를 푹 숙이고 주저앉아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잰 왜 저러고 있는 거야?”

[큭큭. 아마 쪽팔려서 그럴 거예요. 혼자 유난을 떤 게 있거든요.]

라미아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푸욱.

라미아의 말을 들었는지 비올라의 고개가 좀 더 깊이 숙여졌다.

생명의 관 밖으로 나온 후 시력을 회복하고 상황 파악을 마친 비올라를 덮친 것은 라미아의 말대로 얼굴을 갈아버리고 싶은 쪽팔림이었다. 특히 오만할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던 그였기 때문에 더욱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연구실에서 보였던 자신의 수치를 바꿀 수만 있다면 바이트 타블렛을 내주고라도 바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쉴라가 그의 수치심에 소금을 뿌리고 나섰다.

“의외로 담이 작은 자였습니다.”

그녀는 비올라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폐기장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그녀는 생명의 관 관련자는 모두 죽일 놈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올라가 필요하기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다.

당장 그가 조금만 도와주었다면 카린이 저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마음도 있었다.

“쯧쯧.”

이드는 쉴라의 말에 뾰족이 솟아 있는 가시에 내심 혀를 찼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가 여기 있는 여성진을 상대로 제대로 얼굴을 들고 천재 소리 하기는 힘들겠다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자로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목 부러지겠다. 시시한 일로 부끄러워하는 건 그만하고 일어나 봐. 물어볼 게 있으니까. 생명의 관과 연계된 곳 중에 용기사를 운용하는 곳도 있냐?”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선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그만 일어나라. 어쩌면 용기사가 덮칠지도 모르겠다.”

이드가 비올라가 고개를 들고 일어날 수 있는 이유를 만들고 돌아서자 일리나의 도움을 받아 카린을 땅에 눕힌 쉴라가 말했다.

“위에서 용기사를 보신 겁니까?”

“네. 와이번 위에 사람이 타고 있더군요.”

“제국에서 용기사를 운용하는 곳은 황궁과 록마틴 후작가뿐입니다. 어쩌면 제 긴급 신호 때문에 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쉴라의 말에는 그 두 곳은 절대 생명의 관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드는 그 뜻을 모른 척하고 물었다.

“그쪽으로도 연락을 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럼 어째서.”

“저희 은색 기사단 수석 기사의 전 애인이 후작가 프랑 기사단의 부단장이거든요. 헤어진 후에도 사이가 좋은데, 한쪽에서 미련이 많다더군요.”

[미련이 많은 건 수석 기사님 쪽?]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한 타인의 연애사 이야기에 라미아가 끼어들었다.

“부단장 쪽. 제 뒤를 따라 도착하기로 한 기사 중에 수석 기사가 있습니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제 긴급 신호를 확인하고 가장 빠른 수단으로 그에게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 …”

이드는 말없이 입맛을 다셨다.

용기사라는 특급 전력이 전 애인이 부른다고 달려온다니.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렇다고 하기도,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한 조건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말입니다. 일단 기다려 보죠.”

와이번이 일행들의 머리 위에 도착한 것은 금방이었다. 하늘을 달리는 와이번의 속도는 감히 말과 비교할 것이 되지 못했다.

와이번은 일행들을 확인하고 그 위를 빙글빙글 돌며 고도를 낮췄다. 그러더니 와이번에서 한 사람이 뚝 떨어져 내렸다.

“단장님!”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는 곧 묵직한 착지음과 함께 피어오른 먼지에 가려졌다.

하지만 목소리의 성별과 음성에 담긴 반가움만으로도 충분히 상대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쉴라의 짐작이 정확했다는 것이다.

‘헐 진짜 전 애인이 불렀다고 용기사가 달려온 거야? 누군지 몰라도 그 부단장 어지간히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나 보네.’

이드는 과연 쉴라가 이야기했던 커플이 누군지 급궁금해졌다.


모래 먼지가 가라앉고 그 속에서 짧은 단발을 한 귀여운 얼굴의 여기사가 뛰어나왔다. 평균적인 여성 체형에 귀여운 얼굴이, 기사라기보다는 어느 귀족가의 셋째 딸이라는 느낌의 여성이었다.

카린이 입은 것과 같은 형태의 갑옷을 걸친 그녀를 보고 쉴라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스폴 경.”

스폴이라 불린 여기사는 쉴라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어디 다치지 않으셨죠? 긴급 신호를 받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거기다 협곡까지 왕창 무너질 때는 제 가슴도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요. 그래도 이렇게 무사하시니 정말 다행이에요.”

“나도 성급했다고 반성 중이다. 그래도 같이 동행해 주셨던 분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보내긴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저 용기사는?”

“미노스예요. 단장님 신호를 받고 연락했더니,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도와주겠다고 달려와 줬어요. 이럴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러야겠어요. 미노스! 쉴라 단장님이 무사하시다고 알리고, 다른 사람들도 불러와 줘요!”

스폴은 말이 많은 것인지 말이 빠른 것인지, 쉴라의 짧은 질문에도 우르르 대답을 쏟아내고는 하늘을 날고 있는 와이번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알았소.”

그러자 와이번 위에서 무게를 잡고 있는 목소리가 울리고, 와이번이 날아왔던 방향으로 다시 날아갔다.

“미노스도 참, 여전하죠? 제 앞에서는 필요 없이 목소리를 내리깐다니까요.”

“그래도 선뜻 돕기 위해 달려와 준 건 감사할 일이지.”

“단장님의 감사 인사라면 그와 프랑 기사단도 영광일 거예요. 그런데 단장님, 카린은 찾으셨나요?”

스폴의 질문에 쉴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비켜섰다. 이어서 일리나도 비켜서자 그 뒤로 누워 있는 카린의 모습이 드러났다.

쉴라가 얼굴과 손을 닦아 주긴 했어도 엉망인 그녀의 모습에 스폴이 놀란 모습으로 급하게 다가갔다.

“카린 경의 상태가 좋지 못해서 응급조치 후에 재워 두었다. 당분간은 깨어나지 못할 거다.”

쉴라의 말 때문인지 스폴은 따로 카린을 깨우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카린의 손을 잡고 눈시울만 붉혔다. 그러나 타인이 있는 곳에서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쉴라가 나섰다.

“카린 경이 살아 있다면 분명히 완치시킬 수 있다. 그보다 지금은 카린 경을 구해 주신 분들께 인사를 드리는 게 먼저다.”

“네…….”

스폴은 살짝 젖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급히 붉어진 눈가를 닦고 카린의 볼에 입을 맞춘 후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얼굴을 정리하고 돌아서자 처음 등장할 때와 같은 웃는 모습이었다.

‘감정 정리 빠르네.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이 기사가 쉴라 경이 말한 용기사와 썸씽이 있었던 수석 기사인 것 같은데. 스스럼없이 쉴라 경을 대하는 걸 보면 친화력도 좋고 감정도 풍부해 보이고.’

과연 미노스라는 부단장이 이런 성격에 반했나 싶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귀엽기는 하지만, 거대 기사단의 부단장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노스라는 부단장의 취향이 귀여운 여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쉴라의 소개로 이드와 인사를 나누는 그녀는 카린을 구했다는 쉴라의 말 때문인지 첫 만남 같지 않은 살갑고 친근한 얼굴로 감사를 표해 왔다. “저희 은색 기사단은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요. 처음부터 카린 경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일이니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그런데 지금 막 도착하신 건가요?”

이드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물었다.

“아니요. 한참 전에 와 있었어요.”

“그럼 혹시 탈랄 영지의 기사들을 보지 못하셨나요?”

“이런! 그러고 보니 그들을 잊고 있었군요.”

쉴라도 그제야 생각난 듯 스폴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신이 그들을 협곡 앞에 세워 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만약 협곡과 가까웠다면 무너지는 바위에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봤어요. 단장님이 부탁했던 말씀도 전해 들었죠. 그런데 갑자기 심상치 않은 폭발이 일어나더니 마나가 구멍 난 맥주통의 맥주처럼 빨려 들어가지 않겠어요? 거기다 주변에 있던 풀과 나무들도 말라 죽어 가는데, ‘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안에서 벌어지는구나.’ 싶어서 급하게 의논한 후에 후퇴해 있었죠.”

거기서 한 번 말을 끊은 스폴은 아직도 먼지를 풀풀 날리는 협곡을 바라보았다.

“물론 전달받은 명령이 있고, 단장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고 그 덕분에 다친 사람 없이 무사할 수 있었지만, 막상 협곡이 무너지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전 정말 심장이 멈추고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아 버렸다니까요. 미노스가 협곡이 폭발하기 전에 뭔가 튀어나오는 걸 본 것 같다고, 확인해 보자고 하지 않았으면 전 아마 너무 슬프고 괴로워서 그 자리에서 울다가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요.”

쓸데없는 감상이 많이 들어 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럼 혹시 포로들도?”

이드가 혹시나 하며 물었다.

“명령을 전달받고 최우선으로 확보했어요.”

“휴. 다행이네요. 사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그들은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포로 이야기가 나오자 스폴이 강아지 같은 친근한 미소를 싹 지우고 말했다.

“그리고 포로들을 통해서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들었습니다. 단장님, 제가 들었던 일이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가 되기 전까지는 비밀이다. 누구누구가 알고 있지?”

“은색 기사단에서는 저와 페르다슈, 네갈이 들었고, 프랑 기사단에서는 미노스와 하나솔 경이 알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라 판단하고 그 외에는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들이 도착하면 내가 이야기하지.”

쉴라의 당부에 스폴은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카린의 옆에 앉아 다리 베개를 해 주었다.


이드는 쉴라와 스폴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자 살그머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러자 마침 기회라는 듯 라미아가 폐기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폐기장의 악취와 카린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모습, 이상한 형태의 검은 괴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비올라였다.

이드의 질문에 답한 후에도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마법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자 호기심을 보이고 나선 것이다.

“진짜 괴물이 폐기장에 있었다고? 내가 알기로 거긴 단순한 폐기장인데?”

[바로 그 폐기장에 있었어.]

“아쉽군. 알았으면 당장 잡아서 연구를…………… 윽! 왜요?”

이드는 욕심대로 그대로 말을 꺼내 놓는 비올라의 옆구리를 찔러 말을 막았다.

“그 괴수의 희생자일지도 모를 카린 경을 두고 그런 이야기가 지금 하고 싶냐? 거기다 뭘 들은 거야? 너희들 손에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에서

태어난 괴수라잖아. 양심에 찔리지도 않냐?”

“그게 뭐요.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난 실험한 적 없다고 했잖아요.”

“끙.”

이드는 어이없는 대답에 머리가 아팠다.

도대체 어떤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으면 저런 말이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가 힘들었다.

그렇게 비올라가 꿍얼거리는 사이 미노스의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선두에는 은색 기사단의 기사로 보이는 여기사들이 있었고, 하늘에는 용기사들이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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