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57화
594화
“귀빈들께서 본 영지를 방문하다니. 내 이보다 기쁜 날이 없겠소이다.”
탈탈 영주는 생각지 못한 거물들의 등장에 흥분했다.
일행을 대표해서 환대해준 탈탈 영주에게 감사 인사를 한 쉴라와 미노스, 두 사람 모두 전 제국에 걸쳐 이름을 떨치는 유명 기사들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당장 수도에 올라가서 두 사람을 만나고자 해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비록 작위를 가지고는 있지만, 두 사람의 배경은 자작이라는 작위를 콧바람으로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거물들이 직접 나섰다는 건 진짜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데, 이거 불안하구나. 내 영지에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유명 기사단의 기사들과 인사를 나누며 흥분이 가시자 탈탈 영주는 덜컥 겁이 났다.
탈랄 영지로 나갔다가 이들과 같이 돌아온 기사가 헬름 협곡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듣고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상식으로 그 거대한 협곡이 무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탈탈 영주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심산으로 저녁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했다.
“탈탈 영주님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식사보다 휴식이 필요한 부하들이 있으니 영주님의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쉴라도 탈탈 영주의 속내를 모르지 않았다.
몸이 피곤하기는 했지만 해야 할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생명의 관이 숨어 있던 영지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에게 경고를 겸해서 적당한 수준의 입막음을 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탈탈 영주는 쉴라의 요청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배려로 유명인들과의 인연을 만들어 두어서 나쁠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쉴라가 직접 해 주겠다지 않는가.
“그런가. 그럼 기사들의 수발을 집사에게 명하고, 내 집무실로 가지.”
“알겠습니다. 미노스 경도 함께 가시죠. 스폴 경도.”
“네.”
쉴라의 부름에 나란히 서 있던 두 기사가 즉각 따라 나섰다.
그런 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드는 슬쩍 돌아보는 쉴라의 눈빛을 보고는 집사를 따라 발걸음을 돌렸다. 그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라미아가 물었다.
[뭐래요?]
“쉬고 있으면 부르겠대.”
[왜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대충 짐작은 가네. 데일리가 미뤘던 대답을 하려는 거 아닐까 싶어.”
이드는 멀어져 가는 쉴라의 등을 슬쩍 바라보고는 기사들과 함께 집사의 뒤를 따랐다.
탈탈 영주는 기사들의 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그저 그런 기사들이 아니라 은색 기사단과 프랑 기사단의 기사들이기 때문이었다.
당장 프랑 기사단의 와이번에게도 살아 있는 소가 한 마리씩 지급되었다.
이드들도 기사들 사이에 섞여서 식사와 목욕을 했다. 쉴라가 잘 설명해 준 덕분에 이드들을 대하는 기사들의 태도는 정중했고,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자칭 천재 마법사인 비올라는 그 속에 쉽게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는 대충 샤워만 끝내고 배정된 방에 일찌감치 틀어박혔다. 그 모습을 보고 라미아가 가볍게 말했다.
[뭐,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하겠죠.]
“음.”
그 복잡한 마음을 휘젓는 데 라미아와 쉴라의 업신여기는 조롱이 한몫하고 있지만 이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였다. 그러자 그 가슴으로 라미아가 날아들고, 일리나가 팔베개를 하고 다가왔다. 미묘한 평온이 세 사람의 마음을 한데 뭉쳤다.
[이드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온몸이 나른해져요.]
밖에서 들리는 기사들의 떠들썩한 목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문득 이드가 말했다.
“라미아도 일리나도 수고 많았어요.”
[이 정도야 가뿐하죠. 히히.]
“저도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이드가 다 해결해서 전 실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었는걸요.”
일리나는 이드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며 말했다.
이드는 두 사람의 체온과 살그머니 올라오는 일리나의 향기에 그녀를 감싸 안았다. 따뜻하지만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똑똑똑.
갑작스러운 노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순식간에 기분이 쿨다운된 이드는 거칠게 문을 열고는 노크를 한 범인을 노려보았다.
“뭡니까?”
“아………… 저………….”
은근한 살기를 담은 시선에 문 앞에 서 있던 하인이 몸을 떨었다.
이드는 그의 반응을 보고는 아쉬운 입맛과 함께 살기를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네. 은색 기사단의 쉴라 경께 이드 님을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쉴라도 탈탈 영주와의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부르려면 일찍 부르든가. 왜 하필 이 타이밍인지.
이드는 내심 투덜거리며 같이 갈 생각이 있는지 라미아와 일리나를 돌아보았다.
도리도리.
두 사람 모두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럼 혼자 갔다 올 테니까, 먼저 쉬고 있어요.”
쉴라가 머물고 있는 방은 일반 기사들에게 배정된 것과 달리 귀족들이 방문할 때 내주는 귀빈실이었다. 아무래도 은색 기사단의 단장인 만큼 탈탈 영주가 신경을 쓴 듯했다.
“방이 좋네요.”
이드는 자신의 방보다 두 배 이상 넓은 방을 돌아보고 말했다.
“후후. 바꿔 드릴까요?”
“지금 방도 아늑해서 좋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제가 쉬는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니겠죠?”
“쉬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중요한 시간이기는 했죠?”
“네?”
이드의 작은 투덜거림에 쉴라의 귀가 움찔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탈탈 영주와의 식사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피곤했어요.”
쉴라는 쓰게 웃었다.
최소한의 설명만으로 비밀 유지를 요청하는 쉴라의 말에 탈탈 영주는 그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해 주지 못했다. 머지않아 결국 알게 되겠지만 지금 그가 알아서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겁을 먹은 듯 보였던 탈탈 영주의 반응이 이상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명확한 이유는 말하지 않고 비밀 유지만을 강요하는 모습에, 혹시 헬름 협곡에 고대 유적이나 어떤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과 탐욕을 비치는 것이다. 실제로 갑작스럽게 발견된 금광에 영지를 빼앗기는 일이 있으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쉴라로서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비밀유지는커녕 앞장서서 억울하다고 나팔을 불고 다닐 판이다.
결국 소드 팰러스와 록마틴 후작가의 이름으로 위협과 압박을 한 후에야 겨우 의심을 막아 둘 수 있었다. 그래도 탐욕은 남는지 자신의 영지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야겠다며 후작가로의 동행을 요구했고, 미노스는 썩소를 날리며 허락했다.
“후작가에 가게 되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겁니다.”
이드는 쉴라의 말에 동의했다. 탐욕이 눈이 가린 탈탈 영주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의 행동은 록마틴 후작가에 대한 모욕이었다. 후작이 보물을 탐내서 자신의 영지를 노린다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쯧쯧. 욕심이 많으면 눈치라도 있든가.’
아마도 후작은 탈탈 영주를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조용히 있었으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지만, 괜히 후작의 신경을 긁어 자신의 영지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질책과 혹시 알고 있던 일이 아니냐는 추궁을 받게 자초한 꼴이 된 것이다.
“맛있는 저녁을 대접받았는데, 안됐네요.”
“그분의 선택이죠.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쉴라는 탈탈 영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손질하고 있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검을 손질하고 계셨나 봅니다.”
“네. 여유가 있을 때면 언제나 하는 일이죠. 그 시간 동안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이 검에 베어진 생명에 대해 묵념을 하죠.”
“적을 위해서요?”
“적은 친구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은 나와 생각이 다를 뿐, 생명의 고귀함은 다르지 않다고 검후님이 말씀하셨죠.”
“제 생각과는 많이 다르네요. 전 적은 적일 뿐이고, 당연히 죽어야 할 놈은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강간 살인마와 정의의 기사가 가진 생명의 고귀함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이드의 대답에 쉴라가 웃었다.
“어쩜. 저와 생각이 같으시네요. 저도 이드 님의 생각과 같아요. 지금도 바뀌지 않았고요. 그런데 검후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많은 적을 베고 난 후에 가만히 생각하니, 그분의 말씀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죠.”
“그 말 속에서 얻으신 것이 있나 봅니다?”
“감사한 일이죠.”
이드는 검후가 했다는 말을 곱씹었다. 그녀의 말은 무인이 아니라 절의 스님이나 도사가 할 법한 말이었다. 그러나 쉴라에게 가르침을 줄 정도로 공허한 소리도 아니었다.
그 짧은 말 속에는 검후가 살아온 인생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이드는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어린 소녀 시르피가 한순간 훌쩍 자라 중년의 여인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첫 만남에서는 자신보다 어렸던 소녀가 이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여인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이제야 진짜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이제부터 만만하게 시르피라고 못 부를 것 같네. 하하하.
과연 시르피를 찾아 직접 만나면 그녀의 이미지가 또 어떻게 바뀔지 새삼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 시간에 절 부르신 이유는 뭡니까? 아무래도 늦은 시간에 쉴라 경의 방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제가 카린 경의 수색에 도움을 청한 이유를 아시나요?”
“대략 짐작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 요청을 승낙한 이유와 같을 테지요.”
카린을 찾으면서 이드를 살펴보겠다는 쉴라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이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평가가 끝나신 것 같은데,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
“네. 과연 클라인 백작님의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기회였습니다.”
쉴라의 머릿속에 이드에 대한 데일리의 첨언과 그녀를 통해 들었던 클라인 백작의 전언이 떠올랐다. 그리고 탈탈 영지에서 이드들을 만나고 함께하며 직접 확인했던 일들이 스쳐 갔다. 그녀가 사람의 본질을 파악하는 눈은 클라인 백작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전장에서 같이 싸우는 전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클라인 백작보다 더 잘 파악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 감에 의하면 상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검후님을 찾을 때까지 이드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드 님께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저도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제가 일리나와 숲을 떠나 온 처음 이유 그대로, 실종된 검후님을 찾을 수만 있으면 끝나는 일이니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쉴라 경.”
이드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자 쉴라가 마주 미소 지으며 이드의 손을 마주 잡았다. 처음 잡아 본 쉴라의 손은 단단하지만 그만큼 따뜻했다.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면 클라인 경과 함께 데일리 경이 그날 듣지 못했던 놀라운 비밀 한 가지를 알려 드리죠.”
쉴라는 데일리에게 전해 들었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며 말했다.
“과연 어떤 일인지 궁금하네요. 이번 일 때문에 소드 팰러스에 돌아가면 당장은 바쁘겠지만, 궁금해서라도 꼭 시간을 내야겠는걸요.”
“그래야 할 겁니다. 클라인 백작도 듣고는 기함할 듯이 놀랐으니까요.”
‘인생은 리액션이랬던가?”
이드는 에단이 했던 헛소리를 떠올렸다. 과연 쉴라는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쉴라의 결정을 듣고 편한 마음으로 방문 앞에 선 이드는 일리나가 아직 자지 않고 기다릴까 하는 기대에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기대는 바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일리나뿐 아니라 라미아까지 자지 않고 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녀들보다 먼저 나선 비올라 때문이었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내 물건 받으러 왔습니다. 주십시오, 바이트 타블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