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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61화


598화

카린의 치료는 성공적이었다.

이드가 괴물의 정체를 확인하는 동안 쉴라의 독려에 깨어난 카린이 검을 뽑아 들었고, 그녀를 붙들어 매고 있던 폐기장은 무너졌다. 그녀가 뽑은 것은 단순한 검이 아닌 한번 꺾였던 그녀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치료 효과가 즉각적이지 못했다.

정신이란 것이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높이 도약하고 바뀔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했다.

“……이야…… 단장님…….”

힘겹게 눈을 뜬 카린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주변에 가득한 동료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고맙다…………… 일어나서 보자………….”

기사들의 모습을 담은 카린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시 보자는 그녀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는 대신 기쁘게 미소지었다. 

“대사제께서 한 번 더 봐 주시겠습니까.”

“그냥 봐도 정신을 차린 것 같지만 그러지요.”

대사제가 다시 침대 옆으로 다가와 신성력을 동원해서 꼼꼼히 카린의 상태를 살폈다.

라미아의 치료가 확실히 효과를 보인 듯한데, 과연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그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곧 대사제가 손을 떼고 환하게 웃었다. 

“완벽합니다. 며칠만 안정을 취하면 이전과 같을 것입니다. 또한 다시 이런 일이 생기더라도 쓰러지지 않고 충분히 견뎌 낼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한없이 약하면서도 한번 경험한 일에 대한 저항력은 굉장히 강하니까요. 어쩌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일어섰기 때문에 실력이 향상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단잠님께서 잘 이끌어 주십시오.”

“마지막 당부 감사드립니다.”

쉴라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대사제의 말은 그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많은 무인이 죽음의 위기를 극복한 후 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카린의 경우가 딱 그랬다.

그녀가 이번 일을 기회로 한 단계 성장할 가능성은 높았다. 특히 자신이나 기사단의 수석 기사들이 옆에서 그녀를 돕는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대사제의 지적이 없었다면 카린의 회복에만 신경을 쓰다가 아까운 기회를 놓쳤을 수도 있었다.

“카린 경을 완벽히 회복시키지 못했으니 그런 거라도 챙겨야지요. 더구나 이번 일로 마음에 병이 생긴 사람들을 치료할 새로운 방법이 생겼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제가 라미아 양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보기는 했지만, 사용된 마법의 정확한 효과 등은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어서 말입니다.”

“제가 말해 보겠습니다.”

대사제의 조심스러운 말에 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말하면 될 일이지만, 카린의 꿈속에서 나온 후 이드와 라미아의 모습이 이상해서 쉽게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같이 꿈속에 들어갔던 쉴라는 그 이유가 카린을 공격한 괴물에 있다고 짐작했지만, 이 자리에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 지식이 필요하시다고요?]

라미아가 재밌다는 듯 또록또록 눈을 굴렸다.

집안의 가계를 담당하는 그녀의 코에 돈 냄새가 났다. 금과 보석이야 이미 많이 쌓여 있지만, 자고로 돈이란 다다익선이 진리다.

[제 지식이 좋은 일에 사용될 수 있다면 좋아요. 하지만 무상으로 제 지식을 넘겨 드릴 생각은 없어요.]

라미아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적인 지식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날 흥미가 생겨 읽은 몇 권의 책과 다큐멘터리 채널 시청이 다였다.

하지만 물건의 가치란 거지의 십만 원과 부자의 십만 원처럼 상대적인 경우가 많은데 바로 지금 경우가 그러했다.

그녀가 가볍게 읽은 몇 권의 책 안에 담긴 이론과 개념들은 그레센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학문이었다. 그것은 신천지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전한 작은 개념 하나가 씨앗이 되어 어떤 거대한 나무로 자라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라미아는 그러한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해서도.

“마법사의 지식을 살 수 있는데,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지식의 가치를 정확히 측정해서 계산해 주겠네.”

[치료 목적이니까 저도 비싸게 부르지는 않아요.]

“라미아 양의 지식으로 치료받을 자들을 대신해 감사하네.”

역시 뭐든 배워 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다. 도서관에서 대여해 본 책 몇 권이 이렇게 목돈이 될 줄이야. ‘하지만 뭐, 내 수고비도 만만치 않다고. 카린 경의 정신에 접속한 연계 마법은 내 오리지널이란 말이지.’

고급 지식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대가 없는 희생은 상대를 악하게 만들 뿐이었다.

무엇보다 신전도 이 지식을 가지고 좋은 일도 많이 할 테지만, 그만큼 돈 많은 귀족과 부자들을 치료하고 대가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각 신의 신전은 각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부자들이다.

라미아는 즉석에서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사용된 마법에 대해서 적어 주었다.

그에 대한 가치는 신전에서 평가하고 분석해서 지불하기로 신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그 순간 대사제가 신성력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계약서보다 믿을 수 있었다.

[가격이 정해지면 은색 기사단으로 연락해 주세요.]

라미아에 의해서 은색 기사단이 단순한 연락 창구가 되어 버렸다.

카린의 치료법을 챙긴 대사제는 프랑 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갔다.


카린의 치료에 하루가 꼬박 넘어가 버렸다.

“쉴라 경, 저희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쁜 일이 마무리되자 이드가 말했다.

“카린 경 꿈속에서의 일 때문이겠죠? 카린 경의 일이라면 저도 알고 싶군요.”

그렇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던 쉴라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도 우선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비밀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요? 그때 같이 이야기하도록 하죠.”

“이런, 점점 궁금증이 커지는군요. 하지만 이드 님, 전 가능한 빨리 알고 싶어요. 카린 경을 저렇게 만든 ‘적’에 대해서요.”

은근한 재촉을 따라 쉴라의 입가에 살소(殺笑)가 맺혔다. 적이라는 단어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이드는 지금이라도 적에 대해서 알려주면 그녀가 당장 은색 기사단을 이끌고 메르시오에게 돌진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더더욱 범인이 누구라고 이야기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봤던 자가 메르시오가 맞는다면 달려든 은색 기사단이 전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전에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도 모르는 메르시오를 찾아야겠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드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그게 다였다.

하지만 쉴라는 그 말에 만족한 눈치였다.

‘역시, 이드는 카린을 공격했던 괴물에 대해서 알고 있구나.’

그녀는 그 이상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드가 말하지 않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에서였다.

지금은 그저 적에 대해서 확실한 정보를 확보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체를 알게 되는 때가 온다면……………’

은밀히 눈을 번뜩인 쉴라가 내심 다짐했다.


이드를 놓아 준 쉴라는 미노스와 마주 앉았다.

“카린 경이 완쾌된 일은 축하드립니다.”

스폴이 없었기 때문에 미노스의 목소리는 한 톤 높은 본래의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고마워요. 프랑 기사단에서 신속히 대사제 님을 모셔 온 덕분입니다. 이 일은 잊지 않겠어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카린 경이 깨어났으니 포로들을 모두 챙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생명의 관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은색 기사단 소속 기사의 증언이 근본도 알 수 없는 떠돌이 용병 수십의 발언보다 신뢰도가 높은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포로들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동감이에요.”

“그럼 내일 포로들이 도착하는 대로 저희들은 바로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최대한 빨리 주군께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보고는 이미 하지 않았나요?”

쉴라가 보안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그가 충성을 맹세한 주군에게까지 비밀을 지킬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과연 그녀의 생각대로 미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주군께서 직접 듣기를 원하십니다.”

‘당장 소환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가.’

소식을 듣고 당장 소환을 요청했으면 여러 가지로 일이 힘들어졌을 것이다. 당장 지금도 프랑 기사단의 기동력은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쉴라 경께서도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십니까?”

“그래야겠지요.”

“이번 사건으로 제국이 들썩일 겁니다. 초인 등장 이후 최대의 사건이 될 겁니다! 대대적인 토벌이 벌어지겠지요.”

미노스는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악의 마법사 퇴치. 그것이야말로 기사가 꿈꾸는 낭만의 한 조각.

어린 시절 가지고 있던 기사에 대한 환상이 현실이 될 순간이니, 미노스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힌 미노스가 말했다. 

“주군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후작님께서요?”

“예. 이번 일의 중요도를 생각하면 카린 경이 직접 수도에서 증언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그때 먼저 주군께 들러 준다면 힘이 되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감사한 말씀이군요.”

쉴라는 형식적으로 답하면서 후작이 전달한 말 속에 들어 있는 정치적인 계산을 읽고 골이 아팠다.

‘검후님이 있으실 때는 그저 그분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됐는데.’

검후가 없는 지금은 그녀가 하나하나 신경 써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유독 검후의 실종이 슬픈 오늘이었다.


이드는 라미아와 일리나를 데리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문이 닫히자 라미아가 방 안의 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마법을 걸고는 이드 앞으로 날아왔다.

[맞죠? 맞죠?]

“내 눈이 삔 게 아니라면 맞겠지? 하하. 설마 카린 경을 구하러 온 곳에서 메르시오를 볼 줄이야.” “정말 그였나요?”

일리나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간략한 이야기를 듣고 오기는 했지만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일리나도 한번 볼래요?]

라미아는 일루전 마법으로 이드가 봤던 메르시오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아…….”

일리나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메르시오는 혼돈의 파편 중 세 사람과 가장 인연이 깊은 자였다.

이드에게는 라미아를 들고 직접 싸웠던 적이었고, 일리나에게는 납치 미수범이었다. 그날의 일은 이드의 실종과 함께 일리나의 기억 속에 깊게 남아 있어 알아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맞아요.”

“역시! 난 또 내가 잘못 본 거 아닌가 했어요. 라이칸스로프의 얼굴이 워낙 거기서 거기라.”

거기서 거기인 정도가 아니라,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한다.

같은 색의 털을 가진 동일 견종 수십 마리를 풀어 놓으면, 주인도 구분하지 못한다. 이름을 불러 보기 전에는 말이다.

“하지만 은색 털과 손톱, 그리고 옷을 입고 부츠까지 신는 라이칸스로프는 드물죠.”

끄덕끄덕.

하기사 이드도 그 모습을 봤기 때문에 메르시오를 떠올릴 수 있었다. 드물게 옷을 입은 라이칸스로프는 있지만, 부츠를 신은 라이칸스로프는 없다.

우선 인간과 다른 발에 맞지 않을뿐더러 달리는 데도 방해만 된다. 그들에게 부츠는 족쇄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혼돈의 파편은 세레니아와 함께 실종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자가 여기 있다면, 세레니아는 어떻게 된 걸까요?”

좋지 않은 상상을 부추기는 일리나의 말에 이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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