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63화
600화
금방 채비를 마친 두 기사단은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탈탈 영지를 떠났다.
먼저 출발한 것은 와이번을 보유하고 있는 프랑 기사단이었다. 프랑 기사들의 등 뒤에는 탈탈 영주와 세 명의 포로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하! 하! 속도를 높여라. 최대한 빨리 영주님을 따라야 한다.”
프랑 기사단의 그림자를 쫓아 탈탈 영주의 기사들이 죽어라 말을 달리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죽어나겠구나.”
이드는 뿌연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기사들을 보다 말했다. 저들은 최대한 빠르게 탈탈 영주를 따라잡기 위해 쉼 없이 말을 달려야 할 것이다.
“주군을 섬기는 기사들의 숙명이에요.”
스폴이 말했다.
하지만 이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보다는 모시는 주군이 시원찮아서 그런 거 같은데.’
하다못해 적당한 날짜만 정해 주었어도 저렇게 미친 듯이 말을 달리지는 않아도 됐을 텐데.
“은색 기사단은 소드 팰러스로 복귀한다. 출발!”
“오!”
쉴라의 선창에 은색 기사단이 일제히 말에 올랐다.
그러나 중앙에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카린과 포로들을 태운 마차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급하게 말을 달리지는 못했다. 그 모습에 스폴이 입술을 물었다.
“끙. 생각보다 더 느리네.”
생명의 관에 대해서 그녀가 들었던 정보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한시가 급한 일인데, 생각만큼 속도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폴은 말을 몰아 쉴라 곁으로 다가갔다.
“단장님, 우리 너무 느린 것 같아요. 역시 단장님과 카린만이라도 먼저 소드 팰러스로 복귀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마침 미노스가 먼저 이야기해 줬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나?”
당연하다. 스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출발 전, 미노스는 쉴라에게 용기사 한 기를 지원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쉴라가 거절했다.
미노스가 조용히 후작의 뜻이라고 전했지만 소용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스폴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넘겨짚어 물었다.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으세요?”
“있다.”
“옷! 역시! 뭐예요?”
슥슥 주변을 돌아본 스폴이 쉴라에게 귀를 가져 붙였다.
“비밀이다.”
“아~”
스폴은 쉴라가 머리를 밀어내자 오리처럼 입을 삐죽였지만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옆에서 보면 당연한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설명하기 미묘한 정치적이고 계략적인 일이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것은 쉽게 언급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스폴은 검후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는 그런 계산 없이 올곧게 맡겨진 임무만 해결하던 쉴라가 저런 계산까지 할 수밖에 없게 된 이 현실이 못내 서글펐다.
“와이번이라.”
쉴라는 스폴이 뒤로 물러가자 고개를 돌려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라미아의 도움을 받으면 와이번이 없어도 충분히 빨리 갈 수 있지.’
어쩌면 생물로서 중간에 쉬어야 하는 프랑 기사단의 와이번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사실이기도 했다. 라미아가 그럴 마음만 먹으면 불새가 되어서 날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쉴라는 그런 요청을 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무난하게 용기사를 지원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오히려 이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록마틴 후작이 먼저 행동해 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소드 팰러스와 생명의 관 사이에 있었다는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비올라와 부관주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의혹이기도 했다.
‘진실을 확인할 때까지는 최대한 조심해야지.’
그 전까지는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두고 행동해야 했다. 용기사를 거절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생명의 관과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소드 팰러스에 이후의 일에 대한 주도권을 내어줄 경우, 그 처리가 어떻게 뒤틀리게 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직 의혹이 없는 후작에게 주도권을 내주겠다는 것이 쉴라의 생각이었다.
“쉴라 경이 널 보는데?”
[그래요?]
이드의 말에 무슨 일인가 싶어 라미아가 고개를 돌리자 쉴라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냥 봤나 본데요?]
“그러네. 그런데 생각이 복잡해 보이지?”
쉴라에게 답을 듣지 못한 스폴과 달리 이드들은 늦은 이동에 대해서 쉴라에게 언질을 받은 상태였다.
[당연하죠.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부정을 알았잖아요. 쩝. 영화에서 보면 저 위치에 있는 인물은 꼭 죽던데.]
“영화에서나 그렇겠죠. 여기엔 이드가 있잖아요.”
라미아를 통해 영화를 접했던 일리나가 말하자 라미아가 큭큭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정말 큰 차이죠. 그런데 은색 기사단과는 어디까지 같이 갈 거예요?]
“소드 팰러스 쪽에 걸리지 않는 한은 최대한. 중간에 메르시오가 기습이라도 하는 날에는 얼마나 죽을지 몰라.”
[그렇긴 하지만. 과연 올까요?]
“나타나지 않으면 안전하고 좋지. 하지만 난 차라리 내 앞에 메르시오가 나타나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만 되면 놈을 통해서 나머지 혼돈의 파편과 세레니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메르시오의 존재만 아니라면 복귀는 순식간이다.
소드 팰러스에서 출발하기 전에 라미아가 돌아오는 길이 편할 수 있도록 텔레포트에 필요한 대응 마법진을 집에 만들어 둔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 모르게 은밀하게 빠져나온 그들 입장에서 복귀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그러나 생각지 못했던 메르시오가 튀어나오고, 놈이 생명의 관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저 급하다고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후 이드는 소드 팰러스와 반나절 거리가 남을 때까지 함께했다.
여정 중에 카린이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하고 말을 탄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이동이 가능했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행도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 은색 기사단과 함께한다면 소드 팰러스 주변을 지키는 눈에 의해서 이드가 은색 기사단과 함께하고 있는 모습이 전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기껏 소드 팰러스를 은밀히 빠져나온 일이 헛일이 된다.
메르시오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은색 기사단과 카린에게 흥미가 없다는 것은 증명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드는 소드 팰러스 안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라미아의 마법을 이용해서 즉시 소드 팰러스 내의 집으로 이동했다.
마법진이 번쩍인 뒤 방 안에 세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중 비올라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야, 여기가 소드 팰러스입니까?”
“정확히는 내 방이야. 소드 팰러스를 보려거든 밖에서 보고, 빨리 나가자.”
이드는 내밀한 부부의 침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비올라의 등을 떠밀었다.
새로운 일행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라미아가 대응 마법진을 자신들의 은밀한 침실에 만들어 놓은 때문이었다.
“어어, 나가니까 밀지 마요.”
이드는 허우적거리는 비올라를 밀고 방을 나섰다.
“앗! 이드 님!”
마침 이드가 없는 동안 빈집을 지키고 있던 케마란이 호들갑을 떨며 반겼다. 옆에 같이 있던 네리베르는 이드의 복귀를 알리겠다며 나갔다. “이드 님,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가요?”
케마란은 이드와 함께 방에서 나온 비올라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당분간 우리와 함께 일할 마법사다. 이름은 비올라.”
“아, 마법사님이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케마란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참고로 나이는 열아홉. 케마란과 동갑이야.]
순간 정중히 고개를 숙이던 케마란이 눈을 치켜뜨고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건 반사와 같은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거짓말! 이 얼굴로?”
“이익. 뭐 이런 무례한 여자가 다 있어!”
“아, 미안해요. 내가 실수했어요.”
케마란은 비올라가 얼굴을 붉히자 급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지만 이미 비올라에게 케마란의 인상은 최악으로 박힌 후였다. 그렇다고 케마란이 아쉬울 건 없었지만, 어쩐지 노안의 친구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굉장히 마음이 쓰이는 케마란이었다. 특히 한창 외모에 예민한 꽃다운 나이의 여성으로서 절실하게 비올라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라미아는 원하던 그림이 나왔다는 듯 꼬마 악마처럼 큭큭거렸다.
이드는 그녀의 못된 장난에 혀를 차며 말했다.
“두 사람이 집을 지키고 있었던 거야?”
“네, 이드 님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변화가 필요하다고 백작님이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쉴라 단장님을 만나는 일은 잘되셨어요?” “일단은. 쉴라 경도 오늘 중으로 소드 팰러스로 돌아올 거야. 일이 좀 커져 버렸거든.”
“일이………… 커져요? 혹시, 가셨던 곳에서 어떤 굉장한 사건이 벌어진 건가요?”
“굉장하기보다는 골치 아픈 일이지. 자세한 건 있다가 듣고, 자리를 비운 사이 아무 일 없었지?”
이드는 가볍게 던진 질문에 케마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자 오히려 놀라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네. 자세한 일은 모르지만 이드 님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하시는 걸 들었어요.”
“나한테 손님? 누가?”
이드는 생각지 못한 단어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레센 대륙에서 이곳까지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배님들 이야기하시는 걸 조금 들었을 뿐이라서 자세한 사정은 몰라요.”
“그렇단 말이지. 그럼 그 이야기는 에단에게 듣고, 우선 간단히 씻고 옷부터 갈아입자. 며칠 노숙을 했더니 먼지투성이야.”
이드는 비올라에게 적당한 방을 정해 주고는 일리나와 방으로 돌아와 가볍게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네리베르에게 소식을 들은 듯 에단과 록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과 달리 클라인 백작은 쉽게 몸을 빼지 못한 듯했다.
“마스터,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염려해 준 덕분에. 그보다 손님이 있었다고?”
이드가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에단이 케마란을 째려보고는 끄덕였다.
“예. 좀 생각지 못한 쪽에서 찾아 왔습니다.”
“어디? 손님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말이야.”
“일리나스에서 이전 마스터께서 함께하시던 동료의 후손분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일리나스라면…..”
순간이드의 머릿속에 촌스럽지만 순박하고 성격 좋았던 청년과 귀여운 여사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드가 그레센에 발을 디디고 처음으로 만나 함께했던 모험가 파티의 동료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일리나는 지금 아내가 되어 옆에 있지만, 나머지 사람은 보지 못한 지 오래된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그래이와……….]
“하엘의 후손이겠군요.”
이드와 같은 사람을 떠올린 듯 라미아와 일리나가 말했다. 그때 동료들 중 후손을 두었다면 그 두 사람이 확실할 것이다.
“그쪽에서도 그렇게 밝혔습니다. 일단 마스터께서 중요한 수련 중이어서 당장 만나는 게 곤란하다고 했더니, 무작정 기다리겠다고 하고는 소드 팰러스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리나스에서 함께 왔다는 건 또 누구야?”
“일리나스의 사무엘 백작이 같이 왔습니다.”
에단의 뒤를 이어 록이 조금 찝찝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제가 조사해 보니, 아무래도 일리나스 쪽에서 이드 님의 뒤를 밟아 온 것 같습니다.”
“으음…….”
뒤를 밟다니. 그리운 추억 속의 얼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음험한 느낌이 가득한 어감이었다.